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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치 Nov 24. 2021

[홍콩이야기 1-1] 프로퇴사러

열심히 일 한 자여, 떠나라? 떠나고 싶은 자여, 떠나라!

생애 두 번째 퇴사는 첫 번째보다 훨씬 쉬웠다.


퇴사라는 것이 결국 별거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뒤였고, 재취업한 회사를 다닌 지 일주일 정도만에 난 내가 퇴사를 해야 할 이유 또한 명백하게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일주일 만에 퇴사를 해야겠다 결심을 했지만 - 그 일주일 안에 정말 많은 드라마가 있었다. 이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쓰기로.. - 오히려 주변의 만류, 그리고 6개월 간의 외도 후 홍콩에 돌아와 맘에 드는 집을 발견하자마자 덜컥 싸인해 버린 2년짜리 집 렌트 계약 때문에 결국 그로부터 1년 반 이후에야 난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회초년생도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 날 이토록 힘들게 했을까. SNS에서 우연히 만난 이 문장, 내 상황을 대변하는 거 같아 글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Some people are in your life to test you, until you stand up and say: Enough is Enough. I am worth more than what you offer me.”

(의역: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당신을 시험하기 위해 존재를 하기도 한다. 당신이 마침내 그에게 “그만하면 됐어요. 난 당신이 날 취급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요!”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대학을 갓 졸업하고 홍콩에 온 지 어느덧 12년이 다 되어 간다. 난 그동안 총 4군데의 직장에 몸담았고, 우리나라 기준에서 보자면 왜 저렇게 자주 이직을 해 싶기도 하겠지만, 이직을 통해 흔히 말하는 ‘몸값’을 올리는 것은 홍콩 직장생활에서는 사실 아주 보편적인 일이다. 실제로 난 내가 처음 몸 담았던 직장에 비해 총 4번의 이직을 통해 내 ‘몸값’을 5배 정도 올렸고, 처음 ‘사원’에서 시작해 매 이직 때마다 직급을 올려 11년 뒤 마지막 퇴사를 할 때는 글로벌 영국 은행의 ‘이사(Vice President)’로 퇴사를 했으니 이 정도면 꽤 나쁘지 않은 이직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유난히도 어렸을 때부터 인복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는데, 어려서는 선생님복, 커서는 상사복이 참 많은 편이었다. 내 첫 금융 커리어를 시작한 글로벌 미국 은행은 정말 매일매일이 전쟁터 같은 곳이었는데, 그곳은 나에게 그런 정글 같은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철저한 생존 본능을 심어 주었다. 아무리 높은 보스 앞이더라도 내 클라이언트는 내가 지킨다!라는 사명으로, 무섭고 속상하고 억울해서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를지 언 정, 떨리지만 또 다부진 목소리로 “그게 아닙니다. 내 말 좀 들어 보세요” 라며 일이 해결될 때까지 보스들에게 거머리 같이 달라붙어 내가 원하는 답을 해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길러 주었던 곳이었다. 그렇게 큰 일을 치르고 나면 말 그대로 다리에 힘이 쭉 풀렸는데, 누가 봐도 지친 표정의 날 보며 다른 팀 동료들이 “오늘 뭐 더 바쁜 거 있어? 내가 백업해줄까? 별거 없음 오늘은 좀 빨리 집에 가”라고 선의를 베풀기도 했지만 혹시나 내 클라이언트를 잘 모르는 이에게 맡겨서 일이 또 터지느니 그냥 내가 다시 와서 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에 “고마워, 나머지는 그냥 내가 내일 와서 할게”라는 말을 남기고 정말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돌아와 그대로 가방을 메고 침대에 쓰러져 잠에 드는 것이 다반사였다. 내가 오늘 점심을 먹었던가? 아까 화장실을 갔었나? 매일매일 내가 가진 것의 120%를 쓰며 살았던 나날들이었다.


그 당시 내 상사들은 다소 깐깐하고 냉정한 편이었는데 당시 내가 처한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오히려 그렇게 깐깐한 그들은 그 당시 내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상사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들은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기는 것이 없었으며 내가 전달한 내용 중 정말 토시 하나라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바로 연락을 해 설명을 요구하고는 했다. 때론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30분 뒤에 다시 전화 걸겠다는 후덜덜한 코멘트들을 남기면서. 하지만 그 와중에도 누구 하나 나에게 감정적으로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었고 - 아니다, 계중에 몇 있다. 어느 회사나 미친 X들은 있는 법이니 - 사실 이는 회사 내에서 철저히 금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난 대학 졸업 직후 바로 홍콩에서 취업을 했기에 사실 현재 한국 기업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어떤 문화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게 맞다. 하지만 뭐가 어찌했든 내가 다니고 경험한 글로벌 은행들에서는, 열 받아서 폭주하거나 업무 이외에 개인의 자질을 비난하거나 하는 상사들은 정리 해고, 혹은 엄청나게 나쁜 인사고과를 받을 감이었다. 그 이유로는, 업무에서 오는 압력에 쉽게 굴복당함. 스트레스를 제대로 해소할 줄 모름. 다른 이들을 감정적으로 괴롭히는 직장 내 괴롭힘 유발자. 일을 잘할지는 모르나 매니저로써의 자격미달. 이 사람 하나 때문에 다른 인재들을 놓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음, 정도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매와 같은 눈으로 내가 한 일을 검토하고 또 검토해도 사람이 하는 일, 실수가 없을 수는 없다. 특히나 내가 처했던 상황 - 일은 그대로인데 팀원이 줄어들어 나 혼자 거의 일당백을 해내야 할 경우 - 에서는. 하지만 돌이켜 보건대, 만에 하나 그런 이유로 일이 터졌던 경우들에도 나는 단 한 번도 내 자질을 의심받거나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반성을 요구당하거나 혹은 그에 대한 불이익을 당한 적이 없다. 일이 터졌음(내가 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내가 왜 그랬을까’ 정말 백만 번의 자책 후 떨리는 마음으로 보스에게 내 잘못을 고했을 때, 나에게 돌아왔던 대답들은 “너 도대체 왜 일을 그딴 식으로 한 거야?” 가 아닌 “음 알았어. 보고해줘서 고마워. 일단 왜 그렇게 일 처리가 된 건지에 대한 사건 경위를 좀 정리해서 줄래?”였다. 그들은 일단 내가 일을 그렇게 처리했던 경위,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는 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유가 타당하다 생각할 경우 더 이상의 추궁 없이 바로 내 입장을 정리하여 위에 보고를 하였다. 아마 (적어도 홍콩) 금융권에 다니는 사람들은 공감을 하겠지만 이는 은행 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건 중 하나로 여겨지는데, 실제 각 은행들마다 이러한 주제(Escalation)에 대한 트레이닝을 매년 실시하고 있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이직 과정에서 항상 이렇게 비슷한 상황을 주고 얘가 위기 발생 시 어떻게 대처를 하고 얼마나 또 빠르게 위로 보고를 하는 가에 대한 질문을 꼭 받고는 했었다.


이후의 프로세스는 ‘그래서 얘를 징계하여 한 번 제대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합니다!’가 아니다. ‘우리 이 프로세스를 제대로 검토한 거 맞아?’, ‘왜 이렇게 중요한 일을 주니어가 결정하고 진행할 수 있게 된 거지?’ 이미 벌어진 건 어쩔 수 없는 일,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가 타당한 후속절차였다. 오해하지 마시라. 다시 말하지만, 그 조직 내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이성적인 건 아니었다. 다만 너무 감사하게도 내가 그 은행에서 만난 보스들은 모두들 그렇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분들이셨다. 내가 아주 존경하고, 그리하여 예전에는 보스에서, 그리고 지금은 너무나도 애정 하게 된 언니가 된 멋진 언니가 나에게 해준 조언 중 내가 항상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말이 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군가를 손가락질 해 사건의 책임을 떠넘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사실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고. 근데, 그러기엔 우리는 너무 멋진 사람들이잖아? 우리 그렇게는 일하지 말자. 문제가 일어나면 해결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다시는 그 일이 발생하지 않게 노력해 나가는 거고. 실수를 하지 않으면 사람은 배울 수 없어. 배우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는 건 너무 자명한 거고” 난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감명받아 정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돌이켜 보건 데 그때가 바로 이 분을 내 멘토로 모셔야겠다고 다짐한 날이기도 한 것 같다.


그 이후로 나는 이 말을 내 가슴속에 생겼고, 이후 직급이 올라가 나 또한 어떤 팀을 매니징 하게 되고, 혹은 다른 부서 때문에 큰일이 터져 내 클라이언트가 크게 손실을 입는 상황이 되었을 때, 머릿속에서는 ‘아 진짜 환장하겠네. 도대체 이거 어떤 새끼가 그런 거야?’ 라며 폭풍 같은 분노를 일으켰을 지언 정, 이때 들었던 말을 꾹꾹 눌러 새기며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는 얼른 해결책을 찾고, 일이 수습이 되고 나면 왜 이런 일이 터지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배워온 대로, 내가 가르침을 받았던 대로 하려고 노력에 노력을 했다. 어쩌랴, 이것도 내 일의 일부인 것을. 이것도 내가 키워야 할 역량의 일부이다. 올챙이 적을 생각하자. 나 또한 정말 말도 안 되는 실수들을 하고, 나 자신을 자책하고, 그 과정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는가.


그다음으로 가게 된 은행은 벨기에 은행이었다. 사실 이곳은 다른 상업은행들과는 좀 많이 다른 ‘기관’의 성격이 강한 곳이었다. 잠깐 설명을 하자면, 지금은 아니지만 과거 유럽 채권들 같은 경우 내가 다니던 벨기에 은행과 룩셈부르크 베이스의 은행, 이 두 곳에서만 거래가 가능했는데 이에 이 두 은행은 유럽 채권들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가졌다. 물론 이후 시대가 변하고 지금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자유롭게 유럽 채권들이 거래가 가능하지만 과거 이러했던 역할 때문에 유럽 채권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클라이언트들(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클라이언트들은 개인 고객들이 아니라 전부 은행, 회사 같은 기업 클라이언트다)이 각 나라의 마켓들 보다는 아직도 이 둘 은행에서 거래/결제가 되는 것을 선호하며 이에 이 둘 은행들 또한 은행의 역할에 더불어 이런 채권들을 결제(clearing)시키는 마켓 인프라스트럭쳐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클라이언트 프로파일 또한 각 글로벌 은행들에 더해 각 나라의 중앙은행들, 예탁원들, 증권 거래소들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 둘 은행은 타 상업 은행들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깐깐한 법률적, 규제적 제한을 받고 있다.


‘은행들의 은행’. 당연히 그 기업 문화 또한 타 상업 은행들과 많이 달랐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니, ‘해야 하는’ 일들만 하고 그 이외의 것들은 칼 같이 쳐내는 어찌 보면 약간 공기업 비슷한 분위기였달까? 나 또한 이 때문에 입사하고 나서 처음 1년 동안은 ‘아니 이 회사는 도대체 왜 이딴 식으로 굴러가는 거야? 돈 안 벌 꺼야? 이러니 다들 밖에서 느리다고 욕을 하지!’ 라며 부글부글 속을 끓였고, 6개월에 한 번씩 있는 인사고과에서 이 당시 내가 제일 많이 들은 피드백 또한, ‘성격이 너무 급하다’, ‘너무 심하게 밀어붙인다’, ‘그녀는 우리가 상업은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녀는 아직도 예전 회사에서 일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등이었다. 업무 때문에 한 전화해서 상대방의 안부를 먼저 물어보는 대신 다짜고짜 업무 관련 질문을 해댔다는 이유로 상사에게 불려 가 좀 진정하라는 (calm down) 피드백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후 이를 바득 바득 갈고 내 자리로 들어와 포스트잇에 1) 안녕? 오늘은 어떻니? 2) 지난 주말엔 뭘 했니? 3) 날씨는 어떻니? 등등의 질문을 적어 모니터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그 이후 동료들이나 다른 팀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그 포스트잇에 있는 질문들을 다 읊고 그 답을 들을 때까지 내가 하고 싶은 일 이야기를 꾹꾹 참는 연습을 의식적으로 했다. 우리는 벨기에 은행. 우리는 일반 은행이 아닌 마켓 인프라스트럭쳐. 벨기에 사람처럼 생각하고 벨기에 사람처럼 일을 해라. 내 미국적 생각과 미국 은행 스타일의 일 처리 방식을 바꾸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벨기에적 가치(Belgian way of thinking)’와 더불어 이 은행의 가장 중요시 여겼던 가치는 바로 ‘존중(Respect)’이었는데 이는 조직 내부에서 서로 상대를 부르는 호칭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일반적인 글로벌 은행들의 직급 체계를 보면, 물론 이는 은행들마다, 또는 부서들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략, 사원 - 대리(Assistant Manager) - 과장 또는 차장(Manager) - 부장/팀장급* (Assistant Vice President) - 이사급 (Vice President) -??? (Senior Vice President/Associate Director) - 상무(Director) - 전무 (Managing Director)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급’을 부친 건 이게 직급이지 꼭 이 급이라고 해서 팀을 맡아서 이끌거나 해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족으로 실제로 이쯤 되면 회사에서 또한 해당 직원들에게 앞으로 팀을 이끌며 매니저로써의 스킬을 쌓고 싶은 지, 혹은 특출 나게 성과를 올리는 개인 플레이어로 일하고 싶은 지 물어보고 그에 따른 커리어 패스를 제안, 혹은 직원 자신이 골라서 갈 수 있다.


이 벨기에 은행 같은 경우는 상무(Director)급 이하로는 직급이 명시가 되지 않았고 서로가 서로를 호칭할 때도 ‘동료(colleague)’라 불렀지 내 ‘부하’ 직원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절대로 불러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물론 직급에 따라 페이와 성과급이 차등 지급이 되지만, 어찌했든 일상 업무를 하거나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상황에서는 내가 달고 있는 ‘직책’이 아닌 내가 하고 있는 ‘업무’에 따라 나를 소개하고 일을 했다. 일례로 내가 Client On-boarding Manager라는, 은행 외부의 자산들을 우리 은행으로 가져오는 프로젝트 업무를 맡고 있었을 당시, 나 혼자서 아시아 전체를 담당하고 있었다. 자산 크기에 따라 몇 백억 대부터 수십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포트폴리오들이 존재했고, 이를 보고 분석을 하고, 소위 말해 줄을 세워 프로젝트들을 들여오고 하는 것 또한 ‘나 혼자’의 몫이었다. 물론 그냥 내 맘대로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닌 각 나라의 세일즈 담당자들과 벨기에 본사에 있는 팀장 및 펀드팀 헤드, 실제 이 일을 처리할 오퍼레이션 팀의 각 팀 팀장들, IT 팀, 런던의 전략팀, 그리고 아시아 세일즈 헤드 등과의 긴밀히 회의를 통해 그 결정들이 만들어졌지만, 어찌했든 그 업무의 담당자는 나였기에 내가 왜 그렇게 줄을 세웠는지,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하자고 제안하는 건지, 내가 타당한 이유나 합리적인 근거가 뒷받침할 경우 그들은 나의 결정을 전적으로 신뢰했으며 이에 토를 달거나 뒤에서 불평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업무를 맡고 있는 이에 대한 ‘신뢰와 존중’.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너무나도 지키기 어려운 그 가치가 중심이 되고 또 장려가 되는 곳이었다.


실제로 내가 한 번은 아시아 세일즈 헤드와 함께 하는 가벼운 술자리에서 그에게 왜 이 일을 맡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나에게 한 번도 의구심을 갖거나, 내가 한 것들은 다시 체크하거나 하지 않느냐 물었던 적이 있다. 이에 그는 오히려 내 질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취하며 “그 업무는 너의 업무이고 난 그 업무에 대해 잘 몰라. 그런데 어떻게 내가 세일즈 헤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한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네가 하는 일에 대해 우리가 그렇게 사사껀껀히 간섭해야 할 거라면 애초에 널 그 자리에 앉히지도 않았을 거야. 난 앞으로도 너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거고 너의 분야에 대해서는 너의 조언을 받을 것이며, 만약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 다면 오히려 너를 그 자리에 앉힌 우리들이 다 잘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너를 믿어(We trust you)”라는 아주 감동적인 말을 덧붙이면서.


이 전의 미국 은행이 나에게 뚝심과, 끈기과, 근성, 그리고 불도저같이 밀어붙일 수 있는 추진력을 심어 주었다면 벨기에 은행은 나에게 상대를, 상대방의 시간을 존중하는 법,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법,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어떻게 하면 정말 나이스 한 방법으로 상대를 거절하거나 설득시킬 수 있는지, 무조건 달려가는 것이 최선이 아님을 일깨워 주었다.


난 이렇게나 회사복, 상사복이 많았다. 내 전 직장으로 이직을 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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