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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치 Dec 06. 2021

[홍콩이야기 1-2] 프로퇴사러

열심히 일 한 자여, 떠나라? 떠나고 싶은 자여, 떠나라!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설명을 하자면, 대학 졸업을 한 후 홍콩으로 건너와 내 몸 불사르며 산 지 10년째가 되었을 때 난 홍콩을 떠나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떠나야’했다’는 게 맞겠다. 너무나 배울 점이 많고 멋진 사람들과 사는 건 (게다가 돈도 어느 정도 벌며 산다면) 정말로 멋진 일이었다. 어렸을 때 보며 꿈과 환상을 키웠던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고, 실제로 한국에 돌아가서도 홍콩 금융권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다들 “와~~”라는 부러움의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하지만 10년을 그렇게 아등바등, 그것도 누구 하나 기댈 곳 없이 ‘혼자서’ 버텨내는 건 아무리 멘탈이 강한 '나'라 해도 힘든 일이었다. 이 정도면 됐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타지에 건너와 10년 동안 살았으면 충분하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덧 삼십 대 중반이 되었고 이제는 일 뿐만이 아니라 내 개인 생활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그러하듯,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 어느 나라로 갈지는 확실히 정하지 않았지만 일단 ‘유럽의 어느 곳’이라 결정을 하고 정확한 그림이 그려질 때까지 일단 여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푸켓에서 한 달, 발리에서 한 달, 베트남에서 두 달,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다음 나라인 미얀마로 넘어갈 준비를 하던 때 코로나가 터졌고 의료 제반 시설이 터무니없이 약한 동남아 국가들은 그 전의 동선 와 관계없이 당시 중국과 함께 확진자가 마구 나오던 우리나라 여권 소지자의 입국을 무조건 금지시켰다. 한국 이외에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계획에는 없던 한국행, 그리고 한두 달 사이 코로나는 유럽을 빠르게 강타했고 선진국이라 여겼던 각 유럽 국가들이 사실을 얼마나 별 볼일 없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똑똑히 목도했다. 그렇게 계획 없이 한국에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홍콩에서 알고 지내던 헤드 헌터에게 연락이 왔다. 홍콩에 있는 글로벌 영국 은행에 한국인을 뽑는 자리가 났는데 혹시 지원해 보겠냐고.


영국 은행으로의 이직을 이야기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99%가 이를 만류를 했었다. “진짜로? 거기를 왜가. 너랑 진짜 안 맞을 텐데?” 심지어 영국분이신 지인은 본인도 영국 사람이지만 자기는 그 영국 은행들 특유의 수직적인 문화가 싫어서 절대로 영국 은행은 안 다녔고, 또 앞으로도 다닐 의사가 없다고 하시며, 그간 내 커리어를 생각해보면 가서 적응하는 게 녹록지 않을 거라 걱정을 하셨다. 물론 나 또한 이에 대해 익히 들어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했지만 내심 뭐 회사가 다 거기서 거기지, 다르면 뭐가 그렇게 다르겠어? 뒤돌아 보면 그 치열하다는 미국 은행도 버틴 난데 그리 힘들겠어? 라 자만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영국 은행과 같은 경우 마켓에서 통용되는 말이 ‘거기는 either 아예 10년 이상 장기근속하며 다니거나 or 그 특유의 문화 못 버티고 1~2년 안에 퇴사/이직한다’였다. 내가 그곳에 들어가 본 조직 또한 실제로 그러했다. 각 회사들마다 특유의 문화나 분위기가 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게 특징적인 문화를 갖고 양극으로 나눠져 일하는 곳은 내 짧은 10년 반의 경험상 정말 처음 봤다. 그곳에 오래 다닌 사람들(그들은 대부분 그 은행에서 주니어부터 시작했더랬다)은 정말 놀랍게도 엄청난 애사심을 갖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처럼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정말 대부분이 1~2년을 못 버티고 나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과장이 아니었다. 한 직장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많은 만큼 나가는 사람도 정말 많은 조직이었다. 첫 출근을 했을 때 예전 벨기에 은행에서 같이 일하던 옛 동료가 날 보며 반갑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여길 왜 왔어. 나갈 수 있을 때 빨리 나가.”


사실 이 장을 쓸 때 생각보다 오래 걸린 것이, 도대체 어느 정도 수위로 이야기를 해야 하고, 소위 말해 어느 정도로 ‘까야 하나’라는 것 때문이었다. 이미 느낄 수 있듯이, 내 전 직장에 대한 나의 경험은 전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보통 나는 글을 쓸 때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을 와르와르 다 풀어놓고 이후 3~4번의 검토 이후 발행을 하는데 이 글 같은 경우는 초안만 4번을 썼다. 분노인지 절망인지 모를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내가 과연 이걸 객관적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싶었다. 오래간만에 유달리 화창하고 선선한 홍콩의 겨울날, 드립 커피 한 잔 내려놓고 앉아 결심했다. ‘그냥 다 쓰자. 아주 솔직한 내 감정을 담아. 내가 무슨 신문 사설 같은 거 쓰는 것도 아니고, 내 브런치에 내 경험을 적겠다는 데, 굳이 고고한 척하며 객관적으로 쓸 필요가 있나. 이 휘몰아치는 감정을 그대로 담아내자’ 그래서 그냥 다 쓰려고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에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들을 바탕으로.


1)   보스고,   부하직원이야

나에게 가장 큰 문화 충격이자 내 퇴사 이유의 8할이었던 이유는 입사 전부터 내 모든 지인들이 걱정했던 그 조직의 구조 자체에 있었다. 큰 조직일수록 어느 정도의 위계질서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고, 외국 회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말 하면 죄송하지만 한국에 계신 분들이 잘못 아시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경험한 글로벌 은행들 중에 ‘내부 정치’와 윗사람에 대한 ‘싸바 싸바’가 없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오로지 능력으로, 윗 보스에게도 할 말 못 할 말 다 해가며 일할 수 있는 직장은 미드에 밖에 없다. 예전 미국 은행에 다닐 때 그 은행 밑에 까페 겸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해피 아워 술 값도 꽤 저렴해 그 은행 사람들은 그 까페/레스토랑에서 종종 해피아워를 하고는 했다. 나는 그때 다른 오피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술 마실 생각에 들떠 얼른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달려가니 금요일이라 그런 지 저녁 7시라는 이른 시간에도 이미 30명 정도가 넘는 사람들이 모여 거하게 술에 취해 술잔을 부딪히고 있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얼굴이 있었는데, 뉴욕에서 홍콩으로 발령되어 온 지 얼마 안 된 미국인 동료였다. “너 몸이 안 좋아서 당분간 술 안 마신다 하지 않았어?” “어, 나 술 안 마실 거야. 근데 여기 B(이 미국애의 직속 보스이자 전무급)가 온다잖아. 얼굴 비추려고 왔어” 와 C, 이 새끼 대단하다, 싶었다. 미국 사람도, 그니까 외국 사람들도 윗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다들 ‘싸바 싸바’ 하고 산다. 그 미국인 동료는 3년 간의 홍콩 생활 후 뉴욕으로 다시 돌아갔고, 이 전무급의 B 또한 글로벌 헤드가 되어 뉴욕으로 옮겨갔다. 들리는 소문으로 그 미국인 동료는 ‘B의 아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여전히 B의 예쁨을 받고 일을 한다고 했다. 일 잘하는 것만이 능력이 아니다. 일만 잘하는 사람은 평생 일개미로 산다. 위로 올라가고 싶다면, 그리고 조직에서 쳐내지고 싶지 않다면, 윗사람에게 적당히 ‘싸바 싸바’를 잘하는 것 또한 능력이다


하지만 내가 다닌 영국 은행의 수직적 구조는 이런 ‘자발적’ 싸바 싸바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내가 즐겨 보는 한국 프로그램 중에 ‘이제 만나러 갑니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북한을 탈출해서 온 피란민들이 북한의 실상들, 남한에서의 생활기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토크쇼 형태의 프로그램이다. 친가/외가 가 다 6.25 때 남쪽으로 오신 실향민이어서 그런 지 몰라도 어렸을 때부터 북한 문제에 대해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나는, 벌써 몇 년째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애청자이다. 내가 그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내용 중 참 충격적으로 들었던 것이 바로 ‘생활 총화’라는 것이었는데, 생활 총화란, 공개적으로 상대방이 뭘 잘못을 했는지 그 잘못을 비방하고, 당사자는 모든 이들 앞에서 반성을 하는 독재국가 특유의 문화이다. 내가 있던 팀은 하루에 한 번씩 ‘handshake(직역:악수)’라 불리는 회의를 했는데, 이사급 이상의 관리자 역할의 직책들과 working level (내가 정말 싫어했던 그 회사 용어였지만, 대략 말하자면 ‘실무자들’)이 모여 매일매일의 일에 대해서 회의하는 것이었다. 아니 굳이 이렇게 매일매일 회의를 해야 하나 싶었던 게 사실이지만, 뭐 어쩌랴, 나는 이제 막 굴러 들어온 돌인걸. 일단 조직에 순응을 하자.


회의의 형식은 이러했다. 순서에 따라 각 working level의 직원들이 본인의 이메일 박스를 열어 (난 여기부터 충격과 공포였다) 관리자 급들(나를 포함하여 내 보스, 그리고 한국에 있는 동료) 앞에서 자신의 케이스를 하나하나 설명하고 이때 뭔가 관리자 맘에 들지 않게 처리가 된 케이스들의 같은 경우는, 몇 시에 이메일을 받았고, 왜 몇 시가 돼서야 이메일이 나갔는지 모든 이들 앞에서 설명하게 하는, 그리고 잘못 처리가 되었을 경우 질책을 하는 방식으로 전개가 되었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내가 보고 듣는 것이 내 앞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인가. 왜 아무도 이게 이상하지 않나. 왜 이런 야만적인 방식에 순응을 하는가, 내가 지금 도대체 어떤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거지.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진땀을 빼며 설명을 하는 실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것이 뭔가 논리에 맞다 설명이 되면 순간 ‘미안하지만’, ‘실례하지만’이라는 상대에 대한 조금의 예의와 존중도 없이 바로 끼어들어 ‘패스’를 외치는 내 보스를 보며, 아주 솔직히 말하건대 난 그의 교양과 사회성, 더 나아가 인간성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듣고만 있는 것도 정말 괴로웠는데 회의가 거듭되며 내 보스는 중간중간 나에게 내 의견을 물었고 (물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물론 나도 브리핑을 들으며 ‘아 저 일이 이렇게 진행되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이 드는 케이스들이 있기는 했지만, come on,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면 몰라도(사실 이것도 꽤 불편한 과정인데..) 이렇게 공개 처형을 하는 방식은 옳지 않았다. 난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을 거부했다. 물론 좋은 말로 둘러 둘러. 이후 난 보스에게 일이 힘드냐, 적응을 못하겠냐 (네, 못하겠고, 절대 안 하겠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걸 알아듣냐(이게, 사람한테 할 말이냐..)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지만, 난 그 이후로도 그 회의에서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비방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zoom 화상 회의에서도 강제적으로 비디오를 켜게 하거나 (“시니어 매니지먼트들이 다 키는데 XX 씨가 비디오 안 키고 있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저 오늘 얼굴 상태가 정말 안 좋아서요, 오늘은 좀 끄고 있을게요” “뭐 우리끼리 그래. 그냥 켜!”),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아랫사람에게 시키고(pass down) 자신이 보고를 한다거나 (“이거 제 업무가 아닌 거 같은데 제가 왜 해야 하나요?” “XX 씨, 이게 결국은 다 XX 씨한테 도움이 될 거야. 승진하고 싶지 않아?”), 이사급으로 들어온 나에게 본인은 할 일이 많고 귀찮다는 이유로 자신이 따온 딜을 시스템에 입력시키는 등의 온갖 잡무를 시키거나, 다른 회사에도 있어봤으니 새로운 의견을 내 보라는 말에 의견을 냈더니 “근데 그 은행에서 XX 씨 주니어 아니었어? 경험이 많은 내가 볼 때는~ “이라고 운을 띄우며 그 의견을 박살을 낸다거나,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에피소드가 많지만, 이미 이 글을 쓰는 와중에 혈압이 오르는 나의 개인 정신 건강을 위해 이 정도에서 그치기로 한다.


2) 그들만의 리그 

위에서 말했듯 유달리 고인물들이 많은 곳이 이 조직이었다. 사실 글로벌 은행 조직에서, 그리고 특히나 이직을 통해 연봉과 직책을 올리는 문화가 강한 홍콩에서, 어떤 한 직장을 10년 이상 다닌 사람들을 찾기가 생각보다 굉장히 힘든데 이 조직은 정말, 유달랐다. 어찌 보면 자신의 조직을 잘 이해하고 이에 애사심이 큰 사람들이 많은 조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새로 굴러들어 온 돌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냥 ‘썩은 웅덩이’ 같은 느낌이었다. 이미 단단히 굳혀진 그 기업만의 방식이 있고, 주변의 사람들이 그게 다 옳다 라고 동조를 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을 때, 그들이 요하는 ‘새로운 시각(fresh eyes)’은 그저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위에서도 간단히 적었지만 실제로 이미 굉장히 다른 두 은행에서 경력을 쌓은 내게 내 의견을 요청을 하면서도, 막상 내가 이 조직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다른 조직에서는 이럴 때 이런 식으로 한다 이야기를 하면 이미 그 이야기를 듣는 얼굴들이 일그러지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 경력에 대한 비하, (“XX 씨 의견은 알겠는데 그때 XX 씨는 주니어였잖아. 그래서 그쪽 프로세스를 잘 이해를 못 했나 본데 거기가 그렇게 움직이는 게 아니야” “XX 씨가 일했던 그 벨기에 은행은 우리에 비해 product 이 너무 lean 했지 않아? 우리 같이 큰 은행들은 그렇게 못해. 앞으로 배워야 할 게 많다”)  등등 난 단 한 번도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걸 본 적이 없다. 이는 알게 모르게 나의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어느새부턴가가 난 나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쩌면 난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그렇게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왜 이렇게 이 조직에 도움이 되는 의견을 단 하나도 내지 못하는가. 자괴감이 몰려왔다. 난 뭘 해도 안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다 너무 재미가 없었고, 일이 너무너무 하기가 싫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고역이었고, 일을 하는 내 내도 퇴근 시간만을 기다렸다. 내가 꽤 오랫동안 우울증, 무력감에 시달렸다는 걸 퇴사를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꼰대’ 이외에 설명할 없는 문화 이외에 이렇게 고인물들이 많은 집단이 어려운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다. 바로 본인들이 ‘새로 굴러 들어온 돌’이 돼 본 적이 없기에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려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직을 해 본 사람들은 공감을 하겠지만 새 조직에 적응하는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또한 이 부분이다. 좀 더 쉬운 설명을 위해 일례를 들자면, 주식/채권 거래의 업무 특성상 한 거래 자체가 크게는 몇 백억, 몇 천억 가까이 되기도 한다. 거의 대부분의 은행들 같은 경우 기본 통화는 미화(USD)인데, 만약 이런 거래가 미국 마켓이 아니라 예를 들어 일본에서 일어난다 하면, 우선 사고 싶은 만큼의 돈을 일본엔(JPY)으로 바꾸는 환전(FX, Foreign Exchange)을 통해 거래 자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런 환전 과정에서 내가 예전에 다녔던 미국 은행과 같은 경우 철저히 각 마켓의 룰을 따랐기에 이에 이런 일본 마켓 거래는 일본 마켓의 데드라인에 따라 아주 이른 아침시간에 이뤄졌고, 클라이언트들 또한 이런 환전 지시를 이른 아침 데드라인에 맞춰 제출을 해야 했다. 벨기에 은행 같은 경우는 주로 거래들이 실제 장에서 이뤄지는 것보다는 은행 내부 고객들 간에 이루어지는 게 많기에 환전 업무 또한 마켓의 데드라인과 관계없이 좀 더 여유롭게 늦은 오후까지 가능했다. 물론 이 벨기에 은행의 특성상(기관의 성격) 상업 은행들에 비해 자금은 운용하는 것에 훨씬 더 까다로운 규제를 받기에 규모가 큰 거래의 경우 마켓이나 은행 내부의 데드라인과 관계없이 하루 전에 미리 승인을 받도록 권장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같은 거래를 하더라도 큰 기본 프로세스는 같지만 각 은행마다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아무리 마켓이나 업무에 대한 이미 지식을 갖고 있는 경력자들이라 한 지라도 일단 이직을 하게 되면 새 회사의 새로운 프로세스를 익혀야 하며 거의 전 세계 마켓의 거래들을 다 커버하는 글로벌 은행의 특성상 각 마켓들의 + 이 회사 고유의 프로세스를 익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할애가 된다. 평생 자사의 프로세스만을 따르고, 이게 거의 시장의 유일한 룰이라 생각하는 고인물들의 입장에서는 굴러온 돌들의 고난과 역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 또한 그런 말들을 종종 들었다. 은행에 그렇게 오래 다녔다는 데 왜 이 걸 모르냐고. 내가 다녔던 이 전 회사들은 이런 프로세스를 따르지 않는다 라며 열심히 항변을 했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XX 씨가 그때 주니어였어서 그러나 본데~”였다. 이런 의미 없는 싸움들에 난 점점 치져만 갔다.


3) 차라리 내게 침을 뱉으세요

매일 반복되는 생활총화, 본인들의 프로세스를 조금이라도 따르지 않으면 이어지는 내 자질에 대한 의심, 그동안 쌓아왔던 내 경력에 대한 무시, 이메일의 길이 & 문체까지 따지고 드는 마이크로 매니징, 내 일에 더해 ‘결국 이런 것도 나중에 다 도움이 될 거야’ 라며 내 일에 더해지는 보스의 업무들까지 겹쳐 난 내 일생에 처음으로 우울증이라는 게 찾아왔다. 사실 한국 클라이언트는 빅 플레이어들이 이미 정해져 있기에 어느 은행을 옮겨가도 항상 클라이언트가 겹치게 된다. 나를 미국 은행에서부터 봐왔던 한 클라이언트가 한국에 있는 동료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XX 씨 미국 은행에 있었을 때는 정말 활기차다 못해 우리가 클라이언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수로 거래 잘못 넣거나 하면 XX한테 엄청 혼나곤 했는데, 영국 은행 가고서는 너무 힘이 없어진 거 같아요” 이 말을 전해 들은 날 난 정말 말 그대로 엉엉 대성통곡을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재택을 하니 남 눈치 보지 않고 그냥 이렇게 맘 놓고 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내가 클라이언트랑 얼마나 자주 전화하는지(농담이 아니다. 실제로 이걸 물어본다), 다른 부서 사람들이랑 얼마나 교류를 하고 지내는지(아니 유치원도 아니고 내가 누구랑 친하게 지내라, 누구랑 밥 좀 먹어라 라는 말까지 들어야 하나) 등등 온갖 검열받아 지친 내게 신경성 위염 & 장염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사실 원래가 워낙에 조금 민감한 위장을 가지고 있어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위염 증상이 나타나곤 했지만, 실제로 먹은 걸 다 게워 낼 정도의 증상은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처음 입사 해 첫 한 달 반 사이 5kg이 빠졌다. 점심을 먹고 나면 어차피 게워낼 거기에 일부러 맵지 않은 음식들을 먹었다. 이 와중에도 내가 중간에 그만 두면 그런 나를 두고 “역시 널널한 벨기에 은행 출신은 빡세고 일 많은 우리 영국 은행을 못 버텨”라 말 들을 게 뻔해(실제로 내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괜히 나 때문에 모욕당할 옛 동료들 생각, 그리고 그런 말은 들을 수 없다는 자존심에 그렇게 매일매일을 토하고 울며 오기로 버텼다. 내게 이렇게 모진 말로 마음과 자존심에 생채기를 낼 바에는 차라리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nough is Enough. 정말 이 이 상은 못하겠어. 이 정도면 됐어, 란 생각이 들 때까지, 그렇게 미련하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했다. 이미 비디오 안 키면 거의 신경적 발작을 하는 보스와 함께하는 콜이 3개나 잡혀있다. 재택이지만, 미리 샤워를 하고 머리를 하고, 제대로 된 윗도리를 입고 자리에 앉는다. 보스와의 콜이 몇 시인 지 확인한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심장이 쿵쾅댄다. 오늘은 또 뭐가 잘못됐다고 할까. 엄마한테 문자가 온다 “XX아, 너무 힘들면 그냥 한국에 와. 엄마 아빠는 언제든 XX이 편이야”. 내가 정말 매일매일을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하는 친한 언니한테 문자가 온다. “XX아,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짧은 메시지지만 그녀의 문자 없이는 하루에도 마음이 몇 번이나 들쭉 날쭉한 나를 아는 그녀의 배려이다. 왜 내가, 이렇게 됐지. 갑자기 너무 서글펐다. 그리고 뭔지 모를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그래, 결심했다. 오늘 이 모든 걸 끊어내겠다.


보스와 하는 콜 이전 한국에 있는 내 보스의 오른팔인 그녀와 짧은 미팅이 있다. “상무님, 안녕하세요. 회의 시작 전에 미리 말씀드릴게요. 저 오늘 그만두려고요”. 갑자기 던져진 폭탄선언에 그녀의 동공이 흔들린다. 무슨 일이에요? 그 한 마디에 난 그간 있었던 일들, 내가 겪었던 감정들을 쏟아냈다. 의외로 그녀는 그런 이야기들을 묵묵히 다 들어주었고 중간중간 너무 힘들었겠다는 말 또한 건넸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사실 요즘 XX 씨가 너무 의욕이 없고 일도 딱 할 일만 하는 거 같아서 보스랑 이야기를 해서 XX 씨를 막 푸시했는데, 괜히 나 때문에 퇴사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네요” 중간중간 감정에 복받쳐 말을 이어갔던 내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와, 내게 이제까지 가해지던 압박이 이 둘이 뒤에서 짜고 말 맞추어 ‘일부러’ 그런 거였구나. 이 망할 X들. 한치의 지체도 없이 보스에게 연락해 퇴사 사실을 전달했다. 저, 오늘 그만둡니다.


나를 괴롭히는 패턴을 알아차렸을 때. 이를 과감히 떠날 수 있는 것 또한 용기

이 전 벨기에 회사의 퇴사가 아련하고 뭔가 서글프고, 그리고 고마움이 가득한 느낌의 퇴사였다면 이 번의 퇴사는 후련함 그 자체였다. 퇴사 의사를 밝힌 그 순간부터 뭔가 가슴이 뻥 뚫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때, 비록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불투명할 지언 정, 정말 잘 한 결정이라는 것, 그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퇴사가 결정이 된 후 이제 더 이상 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더 의욕이 차 오르고 활달해졌다. 물론 나갈 때까지도 쿨하게 놓아주지 못했던 그 회사는 나에게 다음 사람을 위해 내가 하던 일들을 다 매뉴얼로 만들라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내렸지만 부디 내 다음 사람은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퇴사 직 전까지 자 한 자 매뉴얼을 만들어 두고 걸어 나왔다.


왜 나는 그 당시 그런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조금 더 크게 항의를 해보지 못했을까. 난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걸까. 이게 결국 회사의 압력이라는 건가. 내가 부족했던 걸까. 그동안 그 회사에서 시간 낭비한 것은 아닐까. 퇴사 후 별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은 입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제라도 알고 벗었으니 된 거다.”


내 퇴사 소식에 주변 사람들의 대부분의 반응은 ‘벌써 그만뒀어?”였다. “응, 나 벌써 그만뒀어. 왜냐하면,” 이후 이어지는 내 몇 가지의 에피소드를 듣고 난 지인들은 다 같이 내 손을 부여잡고 입을 모아 말했다. “너 그거 어떻게 버텼어 정말. 야, 너 너무 고생했다. 잘했어. 진짜 수고했어.”


어떤 경험을 통해 항상 뭔갈 배워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번 경험을 통해 내가 배운 게 있다면, 정말 ENOUGH IS ENOUGH라는 거. 앞으로의 내 길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회사를 찾을 때는 단지 업무나 연봉, 타이틀뿐만이 아니라 그 회사의 문화 내 성향이 잘 맞을 수 있는 지를 정말 주의 깊게 봐야 한다는 것. 회사가 다 거기서 거기지,라고 했던 생각이 얼마나 나이브(naive)했던 지를 깨달았다는 것.


그래서 지금 퇴사 후 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후련하고 행복하다. 그 전의 트라우마가 정말 컸던 건지 일도 안 하면서 아직도 가끔 일요일 밤에 정말 생뚱맞게 내일 월요일이 온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잠을 뒤척이고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가 내린 결정이 정말 잘 된 결정이었음을 느낀다. 내가 그동안 이렇게 살아왔다니. 나 그간 정말 수고가 많았다. 그렇게 전보다는 조금 더 행복한 백수로, 오늘도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 ‘[홍콩이야기 1] 프로퇴사러’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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