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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치 Apr 12. 2020

홍콩 가출기 #3-1. 밥 잘 사 주는 옛날 영국 오빠

1-3. 모든 것은 2015년 12월 25일, 그 날 시작이 되었다 

4년 전 즈음, 정확히는 크리스마스 날 그 오빠를 만났다.

그러니까 2015년 12월 25일, 소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스타운턴스 바(Staunton's bar)에서.


당시 나는 미국 은행을 다니고 있었고 이 사악한 (농담이다, 아, 농담이 아닌가?) 미국 은행은 크리스마스 전날, 그러니까 크리스마 이브에도 일을 시켰다.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부연설명을 하자면, 대부분의 외국 은행들은 12월 24일(크리스마스이브), 25일(크리스마스), 26일(박싱 데이)을(를) 크리스마스 휴가로 쉰다. 물론 일의 특성상 더러 크리스마스이브에 출근을 하는 곳들도 있으나 - 예를 들어 일본 같은 경우 크리스마스가 휴일이 아니다. 그 말은, 내 클라이언트가 일본 투자를 하고 있다면 나도 나와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 혹시 그 날 (주식/채권) 거래를 할 경우를 대비하여 - 그럴 경우 대부분 오전 근무만 한다. 물론 난 이런 대세를 거스르고 크리스마스이브 날 하루 종일, 몇몇 나와있지도 않은 동료들과 함께 더 빡세게 일을 하고 바로 시내로 나가 분노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겼더랬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집에 들어와 거의 반나절 이상을 죽어 있다 땅거미가 질 무렵 당시 같이 살고 있던 룸메 언니와 스물스물 기어 나와 이 스타운턴스 바에서 와인 한 병을 막 시키고 난 즈음이었다.


홍콩 소호의 터줏대감 스타운턴 바(Staunton's bar). 굳이 자리를 놔두고 저렇게 다 밖에서 마시는 분위기다. 참고로 이미지는 구글 검색에서 가져온 것

스타운턴스 바는 소호를 가로지르는,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라 알려져 있는, 미드레벨(mid-level) 에스컬레이터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바이다. 내부 좌석이 있는 제대로 된 레스토랑/바의 형태지만 이 제대로 된 좌석들을 굳이 놔두고 너도나도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이어진 바 옆 계단에 철퍼덕 자리를 깔고 앉아 밤을 즐기는 것으로 아주 유명한 바(bar)이기도 하다. 


홍콩은 겨울이라 해도 기온이 15도 이하로 거의 떨어지지 않고, 또 해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4월에서부터 9월 초까지가 거의 우리나라 한여름 날씨인데 그러면서도 의외로 해가 귀한 나라다 (생각보다 강우량이 많다. 특히 홍콩 봄철은 대부분의 날이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많다). 그리하여 날이 조금이라도 좋은 날이면 모두 다 선글라스 하나씩을 끼고는 너도나도 나와 이 바 계단에 자리는 잡고 앉아 저마다 좋아하는 술들을 마시며 한 때를 보내는 것이었다. 특별히 맛있는 맥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와인 리스트가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소호의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 그걸로 충분했다. 너네 서로 어떻게 알게 되었어?라고 물어보는 질문에 "아 우리 스타운턴에서 만났어"라고 말할 수 있는 친구 하나쯤은 있어야 진정한 홍콩 엑스팻(expat, 국외거주자, 주로 해외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을 칭한다)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할 정도로 홍콩에 사는 외국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는 바 이기도 하다.


친구네 루프탑 파티에서의 사진. 놀랍게도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이 날 처음 만난 사이였다. 스트릿 파티에서 만나 모두들 처음 보는 사람의 집으로. 이게 진짜 홍콩 expat의 삶

때는 12월, 해가 쨍한 날은 아니었지만 스웨터 하나로 괜찮을 만큼 겨울치고 따뜻한 날이었다. 기왕 앉는 거 간만에 안에 있는 제대로 된 좌석에 앉을까 했지만 이미 바 내부는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며 술을 마시고 있는 그룹이 차지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낮부터 나와 boozy brunch(술과 함께 하는 브런치. 대부분의 홍콩 레스토랑들은 주말/공휴일에 이런 브런치 딜을 제공한다. 일정 돈을 내면 2~3시간 동안 무제한으로 정해진 술들을 마실 수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건 역시나 샴페인 브런치!)를 한 듯했다. 워낙 시끄러워 안에 들어가면 그 그룹 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아 야외 계단 한 편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오후 4시 정도 밖에 안되었지만 아이스버킷(ice bucket)에 들어 있는 소비뇽 블랑(Sauvignonc blanc)을 꺼내 언니와 내 잔을 가득 채웠다. 크리스마스니까.


"어쩌다 보니 벌써 크리스마스네. 우리는 도대체 왜! 남들 다 놀러 가는 크리스마스에도 바쁜 거야?" 잔에 가득 찬 소비뇽 블랑을 한 입 마시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푸념을 했다. "그러니까, 우리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그래도 너는 오늘 좀 쉬었지, 난 지금까지 회사에 있다 왔어 야." 그러고 보니 알아주는 워커홀릭인 언니는 오늘도 회사에 나갔다. 남들 다 노는 클리스마스 연휴 때야 말로 그간 귀찮아서 미뤄두었던 자잘한 일들을 해치울 수 있는 기회라며. "말할수록 우울하기만 하다. 에라이, 짠해 언니! 짠짠! 내년에는 이렇게 살지 말자 우리!" 잔을 쨍하고 부딪히고는 괜히 분한 마음에 한 번 더 벌컥 와인을 넘겼다. 크리스마스이브날, 소호/미드레벨이라는 동네 자체가 외국인들, 그것도 주로 서양 외국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또 많이 모여 놀러 나오는 동네라 그런 지 다른 동네에 비해 유독 거리가 한산했다. 


간혹 내가 평소에 소호에 나가 이런저런 파티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지인들이 본인들도 그런 파티를 즐기고 싶다며 연말 즈음 휴가를 내고 놀러 오고는 했다. 내 친한 지인이라면 오지 말라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획을 강행을 해 내 인스타그램에서 본 것과는 아주 다른 썰렁한 분위기에 실망을 하고 간 경험들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당일 하루 신나게 나가 파티를 하는 우리나라의 크리스마스와 달리 서양권에서 온 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우리네 구정, 추석만큼 중요한 아주 큰 명절이다. 이에 외국 회사들 같은 경우 크리스마스 즈음에 회사 자체 내에서 크리스마스 런치나 디너를 하고는 하는데, 말이 크리스마스 런치/디너이지 사실 본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대부분의 파티들은 12월 첫째 주, 혹은 둘째 주에 다 끝낸다. 그 말인즉슨 12월 둘째 주부터는 정말 홍콩이 아주 썰렁하게 비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보통 새해까지. 


물론, 그들이 오기 전에 나는 이런 사실들을 충분히 경고했다. 연말에 홍콩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홍콩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 혹은 나처럼 너무 오래 살아서 크리스마스에 본국에 돌아가 봤자 돌아와서 남은 건 텅 빈 통장 잔고와 (크리스마스 즈음의 비행기 값은 가히 살인적이다) 가족들과의 싸움뿐만이라는 걸 아는(웃프지만 사실) 외국인들 뿐이라고. 그리고 그런 우리들(=남아있는 외국인들)은 대부분 남아있는 이들끼리 하우스 파티를 한다던지 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는 레스토랑이나 바 등에 가서 지인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런치/디너를 한다. 그러니 관광객 입장으로 온다면 정말로 매우 심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에 지인들은 대부분 괜찮다며 (아마도 설마 그렇게 심할까 했을 거다) 고집을 꺾지 않고 그대로 일정을 밀어붙여 홍콩에 왔고 결국 그들은 내가 경고했던 상황을 마주했다. Well, I told you so (그러게, 내가 그렇다고 말했잖아)!


아마 내 지인들이 기대한 건 이런 파티였을 거다. 파티를 즐기고 싶다면 연말연시는 피해서 오세요

그렇게 사람이 거의 없는 빈 소호의 계단에 앉아, 우리는 오래간만에 느끼는 여유로움과 함께 끊이지 않는 신세한탄을 안주삼아 와인도 벌컥벌컥 마셔 넘겼다. 썰렁하긴 한데 또 이렇게 사람이 없으니 여유롭고 좋은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왜 우리는 남들 다 노는 크리스마스에도 바쁜 거냐,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외로우면서도 왜 우리는 남자를 찾지 못하는 거지, 괜찮은 남자 씨가 다 말랐다니까? 와인병 아래 이거 뭐 새는 거 아니야? 와인은 또 도대체 왜 이렇게 빨리 줄어들어? 둘 다 꽤나 목이 탔는지 혹은 속이 타는 건지, 30분도 채 안돼 금방 와인 한 병을 비웠다. 처음 병은 미리 도착해있던 내가 샀고, 이에 두 번째는 언니가 사겠노라며 바 안으로 주문을 하러 들어갔다. 주문을 받는 곳 즈음에 아까부터 바에서 한창 크게 떠들며 놀고 있던 남자들 대 여섯 명이 모여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며 주문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외국의 바 문화 자체가 앉아서 누굴 기다리기보다는 직접 바 카운터에 가서 직접 주문을 하고 결제 후 술을 받아오는 시스템인지라 그런지, 종업원들이 꽤 여유로운 상황에서도 손님들 대부분이 바에 직접 가 주문을 하는 듯했다. 아까부터 시끄러웠던 그 무리들은 정말 도대체 언제부터 마신 건지 상당히 취기가 올라 보였다. 대부분이 3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혼자 있어 심심하기도 했고 워낙에 그들의 목소리가 크고 동작도 커 나도 모르게 그들을 관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무리 중 두 명이 아주 신이 나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오더니 대뜸 팔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나? 우리를 등지고 앉아 있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하얀 비니를 쓴 남자는 그들이 자리로 돌아오자 한참 동안 핸드폰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더니 금세 내가 심판을 보겠노라 같은 제스처를 취하며 신나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누가 먼저 시작할 것이라도 없이 갑자기 바에 있는 사람들이 그 자리로 모여들어 서로 편을 나눠가며 소리를 높여가며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Is this really happening now? (이거 진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 맞아?) 남자들은 할아버지가 되고 나서야(손자가 생기고 나서야) 철이 든다 하더니, 진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애구나 애. 이런 상황들이 너무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피식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시끄러운 그 무리 너머로 새 와인을 주문하러 간 언니가 바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꽤나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지 웃음이 오가는 게 보였고 이를 지켜보던 나와 눈이 마주친 언니는 내 쪽을 흘깃 보더니 이 쪽으로 오라고 고개를 까딱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언니는 알겠다는 듯이 곧 빨리 가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느덧 5시가 다 되어 갔다. 갑자기 찬 바람이 불었다. 아, 화이트 마시기 살짝 좀 추운데? 언니한테 소비뇽 블랑 말고 레드 와인 중 하나로 바꾸자고 말해야 하나?라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난 S 야"


세상 둘도 없는 나의 친구들. 모두 5~6년 전 클럽, 스트릿 파티 등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사진은 맨 오른쪽 친구의 생일 때 주말 방콕 여행을 가 W호텔 화장실에서 찍은 컨셉사진

잠시 당황하며 상황 파악을 해보려는 나에게 그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바에서 방금 내 룸메와 만났다고 이야기를 했다.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않는 나에게 그는 거침없이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런던에 본사가 있는 은행에 다니고 있으며 홍콩에 온 지 꽤 되었다는 사실을. 바에서 내 친구와 만나 이야기를 했는데 너도 은행에 다닌다고 들었다며 본인은 저 안에 있는 머저리 같이 팔씨름을 하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왔고 우리가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모두 금융권에 종사하고 있는 똑똑하고 괜찮은 남자들이라고 했다. 지금은 다들 꽤나 취했기에 이를 보증할 수 없다는 전형적인 자소적인 영국식 농담과 함께. 그런 그의 모습에 한껏 세웠던 경계가 약간 누그러졌다. 영국에서 왔냐고 물어봤다. Half yes, half no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영국에서 학교를 나오기는 했지만 영국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얼마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좋은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겠구나 싶었다. 말투, 억양, 그가 쓰는 어휘, 표정, 중간중간 넣는 제스처 등에서.


나중에 그와 더 친해지고 한 1년 즈음 지나 알게 된 건데, 그는 우리가 잘 아는 고급 홍차 브랜드 T의 오너 집안의 자제였다. 압구정에 꽤 큰 규모로 플래그쉽(Flagship) 스토어도 가지고 있는 그곳. 뒤늦게 이를 알고 왜 그걸 처음부터 말 안했냐며 그럴 줄 알았으면 널 만났을 거라고 소리 높이는 내게, 그 또한 그러게 처음부터 말을 했어야 했는데 괜히 가족 덕 안 보겠다고 자존심을 부렸네 라고 답을 했고 그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뒤로 넘어가듯 깔깔 거리며 웃었다. 이렇게 알게 된 거 너네 집 차 좀 종류별로 가져다 달라는 우리들에게 그는 " 헤이, don't be so cheap(그렇게 싸게 굴지 마). 너네 우리 집 차 마실 수 있을 만큼 돈 벌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어."라고 했고 이에 우리는 "야 우리 정말 싼 사람들이야. 그런 게 어딨어. 앞으로 네가 우리들 사무실 홍차 공급 맡도록 해"라고 했다. 그는 깔깔대며 "내가 더 좋은 옵션을 줄게. 앞으로 너네 만날 때마다 술값은 내가 다 낼게. 차는 너네 돈으로 사다 마셔" 라 대답했다. "너 지금 취한 거 아니야? 너 우리가 얼마나 술고래처럼 마시는지 알잖아. 아직 늦지 않았어. You can take back what you just said (너 지금 말한 거 취소해도 돼)" "알아 너넨 진짜 끔찍한 인간들이야. 하지만 너네랑 있으면 재밌거든." 그리고 실제로,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는 우리가 정신을 부여잡고 그가 안 보는 사이 달려가 겨우 겨우 계산을 해버리는 때들을 제외하고는 항상 우리의 술값을 다 내주곤 한다. 


Good old days. 친한 언니의 집에서 샴페인과 함께 하우스 파티하던 때. 역시 술은 주말 낮에 마셔야 제 맛이다

사실 전날의 여파도 좀 있었고, 간만에 언니와 둘이 좀 조용하게 마시다 일찍 들어가고 싶었으나 이미 그러긴 물 건너간 듯했다. 열심히 자기소개를 하는 사람한테 "아 그러셨나요?"하고 입을 닫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에 나 또한 어느 은행을 다니며, 무슨 일을 하고 있고, 홍콩에서 산 지 얼마나 되었노라 짤막하게 내 소개를 했다. 그리고 이 도시를 탈출할 날만을 손에 꼽고 있다는 말과 함께. 내 말에 그는 호탕에게 웃어 보였다. "당신도 홍콩에 갇혀 버렸네요" "그러니까요, 이 지긋지긋한 삶을 좀 벗어나고 싶은데 또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홍콩만 한 데가 없네요" "당신은 뉴욕이랑도 잘 어울릴 거 같아요, 나 홍콩 전에 뉴욕에서도 좀 일하다 왔거든요. 거기로 가보는 건 어때요?" "완전 흥미가 끌리는데요? 들어보니 꽤 높은 직책인 거 같은데 (그는 본인이 담당하는 분야의 아시아 헤드였다) 혹시 내 보스 알아요? 내 보스한테 좀 대신 말해줄래요? 나 뉴욕에 좀 보내주라고" "물론이죠, 보스 이름이 뭐예요? 지금 당장 이메일을 쓰겠어요" 과장된 몸짓으로 핸드폰을 꺼내 드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긴장이 좀 풀어진 듯한 나를 보자 그는 안심을 한 듯 안에 있는 친구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중 두 명이 내가 현재 다니고 있는 은행에 다녔던 적이 있다며 혹시 그 둘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당연히 알죠. 우리 은행에 다니는, 그리고 거쳐간 몇 천명의 사람들을 난 전부 다 알고 있거든요" 나는 살짝 웃으며 와인을 한 모금 넘겼다. 그러자 그는 두 손을 들어 항복의 제스처를 취하더니 이야기를 했다. "당신 같은 여자 진짜 오래간만에 봐요. 한 마디를 당할 수가 없네요. 난 당신의 그런 성격이 맘에 들어요. 그리고 아주 똑똑해요. 자신이 뭘 하는 지를 잘 알고 어떤 말을 하는데도 거침이 없죠. 내가 이때까지 일을 하며 볼 때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훨씬 똑똑한 거 같아요. 그런 여자들을 만나는 남자들은 정말 행운아들이에요" "그런데 웃긴 사실은 남자들은 이런 여자를 여자 친구로 두고 싶어 하지 않다는 거죠. 보통 너무 드세다고 하더군요" 자소적인 웃음과 함께 와인을 한 모금 더 넘겼다. "그럴 리가요! 듣자 하니 당신은 이제까지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지 못한 거 같군요" "그래요? 그럼 우리 왜 이렇게 똑똑한 여자들이 남자들에 비해 페이가 낮고 언제나 유리 천장(glass celing)을 부셔가며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이런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즐기는 거 맞죠?" "그럼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오늘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그 주제 꺼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들어와요. 들어가서 우리 그에 대해 다 같이 논의해 보죠. 우리 이상한 사람들 아니에요." 반 농담이기는 했지만 공격적이라 할 수 있는 내 대답에도 여전히 재치 있었다. 오래간만이었다. 이런 재밌는 대화. "흠, 그런데 어떡하죠?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길에서 모르는 사람(stranger) 만나거든 절대로 따라가지 말라고 했거든요" "아우치(ouch), 이렇게 오래 이야기를 했는데 모르는 사람이라뇨. 나 지금 상처 받아서 심장 마비가 올 거 같아요." 심장을 부여잡는 그의 과장된 동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잡아먹지 않아요. 다음 라운드는 우리가 살게요. 오늘은 크리스마스잖아요" 


한참의 실랑이가 오고 갔다. "아 이거 정말 난처한 상황이네요. 우리 엄마가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하면 절대 따라가지 말라 했거든요" "하하하, 술이 맛있는 거라는 거죠? 우리랑 딱 맞는 레이디네요" "당연하죠. 이 세상에 술보다 맛있는 건 없어요. 스트레스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더욱 맛있죠" "그럼 제가 오늘 그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걸 사드리죠. 스트레스는 줄 수 없으니 그건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요" 남은 맥주를 다 마신 그는 잠시 동안 자신의 잔을 응시하더니 나를 바라봤다. "흠, 좋아요. 근데요, 확실히 하기 위해서 말하는 건데... 난 당신에게 이성적으로 관심 없어요. 혹시 그런 의도로 사준다는 거면 지금 거절을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이 전의 이별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때였다. 바에서 시시콜콜 농담 따먹기 정도야 상관없었지만, 그러다 번호라도 물어볼 때면 심장이 얼어붙고는 했다. 바에서 한참 재밌게 대화를 하다 번호를 물어보는 남자를 두고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집으로 가버린 적도 있었다. 갑자기 온 세상이 핑핑 도는 것 같고 토할 듯이 속이 울렁거렸더랬다. 아직도 이 전 헤어진 연인을 이따금씩 떠올리며 숨죽여 울고는 했던 시기였다. 사실 그래서, 크리스마스이브 근무도 자원한 것이었고. 


"이를 어쩐다.. 그 말을 들으니 자존심이 좀 상하기는 하지만, 뭐, 그래도 약속은 했으니 내가 한 병 살게요, 크리스마스라 나 완전 관대한(generous) 무드이거든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했다. "그럼 당신의 제너러시티(관대함)를(을) 아주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과장된 몸집으로 유럽의 귀족들이 인사를 하듯 손을 저어 고개를 숙여 이야기했다. "천만에요, 근데 이 겨울에 소비뇽 블랑을 마셔요? 정말 이상한 취향을 가졌네요" 그는 아이스 칠러에서 내가 마시던 와인병을 꺼내 보고는 말을 했다. "당신한테 관심 없다고 하자마자 이렇게 공격해 오기 있기에요? 사준다면서 뭐 이렇게 말이 많아요. 마시라고 강요 안 할 테니 걱정 말아요" "예스 마담(yes, madam), 저기 내 친구들 있는 곳 보이죠? 거기 가서 앉아 있어요. 금방 와인 가져 갈게요" 그렇게 그는 와인을 주문하러 바 카운터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팔씨름 심판이 다 끝났는 지 아주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다시 핸드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흰 비니를 쓰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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