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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미워이 May 27. 2023

용서

2009 WCF Final Game 6 Nuggets vs Lakers

이전 글들을 조금씩 다시 올려보면 어렵게 데뷔한 브런치 작가로서의 생명연장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존 본능의 발동.

 

이 글은 2009년 5월 30일 토요일(미국 시간 5월 29일 금요일)에 덴버 너게츠와 LA 레이커스의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6차전 중 일어난 장면과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본 내용에 영감을 받아 (상당 부분을 인용하여) 썼다. 지난 글 <Kings of His Own Glory>의 서두에 언급된 바로 그 글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에는 전 직원이 돌아가면서 아침마다 5분 스피치를 해야 하는 어마무시한 조직문화가 있었는데 나는 이 때를 개인적 취향과 가치관 전파의 좋은 기회로 삼았고 이 글도 그런 취지로다가 작성된 것 중 하나이다.

 

혹시나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왜곡된 관점을 기반으로 한 억지 기록은 아니었을까 14년이나 지난 지금 뒤늦게 염려가 되어 어제 이 경기 풀영상을 다시 찾아 보았다. 다행히 심각한 수준은 아니어서 인용된 문장의 출처들을 포함해서 적당히 손을 보고 다시 올려 본다.




2009년 5월 말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토요일 오전에 미 프로농구 플레이오프를 보고 있었습니다.

 

최강팀 LA 레이커스와 신흥 강호 덴버 너겟츠의 서부컨퍼런스 결승 6차전이었는데 레이커스가 시리즈 전적 3대2로 앞서고 있어 이날 승리하면 NBA 파이널에 진출하고 덴버는 홈에서 시즌을 종료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늘 그렇듯 레이커스가 아닌 덴버를 응원하고 있었고 경기 상황은 시종일관 끌려가던 덴버가 어렵게 기회를 잡고 레이커스를 추격하는 분위기에 있었습니다.

3쿼터 종료 1분을 남기고 덴버의 케년 마틴이 어이없는 행동을 합니다. 공격권이 자신의 팀으로 넘어가 속공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직전에 볼 다툼을 하다 코트에 넘어진 마틴은 일어나지 않은 채로 상대팀 샤샤 부야시치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백코트를 하려는 데 발목을 붙잡힌 부야시치의 몸이 휘청거렸고 이를 놓치지 않은 심판, 부야시치는 그렇게 얻어낸 자유투 2개를 모두 성공시킵니다. 어렵게 끌려가던 상황에서 간신히 점수차를 좁히며 추격에 불을 당기는 시점에 나온 이 어이없는 파울은 분위기를 다시 반전시키고 맙니다.

 

사실 케년 마틴의 이런 기질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장신에 빠른 몸놀림과 엄청난 운동 능력을 보유한 위력적인 선수이지만 다혈질에 심판과도 자주 싸우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경기장을 가득 매운 수만 관중과 같은 팀 동료 그리고 팀을 이끄는 조지 칼 감독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고 케년 마틴은 그 파울 이후 교체가 되어 경기가 끝날 때까지 나오지 못했습니다. 점수차가 다시 크게 벌어져 경기를 포기할 때 즈음엔 카메라가 조지 칼 감독과 케년 마틴의 얼굴을 번갈아 클로즈업하며 추격시점에 저지른 이해할 수 없는 파울과 그에 대한 조지 칼 감독의 조치에 대해 논란의 여지를 남겼습니다. 성질이 불 같은 케년 마틴도 이날 만큼은 조용히 앉아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결국 레이커스가 승리하여 결승에 진출합니다. (결승에서 올란도를 누르고 우승)

 

많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두를 화나게 했던 그 장면에서 마틴에게 내려진 조치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생각해 봅니다. 경기 종료까지 그는 벤치에 앉아서 감독과 다른 선수, 그리고 홈 팬들과 함께 팀의 패배를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운동 경기 중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장면이기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지만 모든 경기가 중요하고 자칫 한 선수와 한 팀의 운명이 크게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심사숙고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대목에 용서라는 한 단어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조지 칼 감독이 그를 불러 다독이며 '중요한 순간인 만큼 자신을 잘 다스려서 다시 추격분위기를 살려보자'라고 말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사실 경기 이전부터 더 많은 사람들이 레이커스의 결승 진출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결과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경기에 뛴 선수와 감독, 넓게는 태평양 건너 TV로 지켜본 저 같은 사람에게도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용서라는 일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아래는 Helmut Thielicke라는 독일 신학자가 용서에 대해 언급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아, 상대가 잘못을 알고 용서를 빌기만 한다면 다 용서하고 싸움을 끝내지." 우리는 용서를 상호 교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양쪽 모두 "저쪽에서 먼저 사죄해야 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눈짓으로 무슨 신호라도 보내지 않는지, 혹은 상대의 편지에 미안함을 표하는 작은 표시라도 없는지 열심히 살핍니다. 나는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정작 용서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 스스로가 너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란 바로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용서로 가장 먼저 치유 받는, 그리고 많은 경우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자입니다. (What’s so amazing about grace – Philip Yancey).

 

진실된 용서는 포로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러고 나면 자기가 풀어준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Lewis Smedes).

 

흉악한 범죄가 만연한 이때에 그런 범죄의 주범들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묻는다면 그것은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논쟁거리를 방패 삼아 우리 가정, 회사, 학교 등 자신이 속한 다양한 공동체에서 흔히 마주치는 상황에 상대를 용서할 수 없음을 너무 쉽게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봅니다. 우린 때때로 더 단순하고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쉽게 화내고 원망과 질타를 반복합니다.


저는 용서가 징계를 이긴다고 확신합니다. 돈과 형벌로 죄값을 지불한다 하여도 상처는 여전히 남습니다. 원망과 질타, 책임 전가가 잃어버린 성과를 되돌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용서와 독려로 회복되는 인간관계와 애정은 벌금과 징계보다도 더 크고 값진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자신에겐 절대 용서하고 싶지 않은,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가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 봅니다. 반대로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용서받기 어려운 존재일지 모릅니다. 서로를 용서하고 상대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참 자유를 허락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끝

 

2008년 8월 해외출장 때 숀이라 불리는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What’s so amazing about grace / Philip Yancey)’를 읽고 예전에 농구 보며 잠시 했던 생각을 회사 5분 스피치 때 이야기 했다. 아침부터 여러 사람 세워놓고 떠들었지만...나 역시도 누군가를 용서하기를 꺼려하는 사람아닌가.

괜찮은 척, 착한 척, 앞에서는 아닌 척하면서도 험담하며 미워하고 불편해하며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행위로 용서받을 수 있다면 구원에 이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8-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대로라면 용서는 곧 사랑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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