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만남이 가르쳐준 위로의 다른 얼굴
오늘 점심으로 밀면 먹으러 갈래요?
구내식당으로 향하던 길, 동료가 불쑥 외식을 제안했다. 지하 식당으로 가면 화려한 6찬 반찬이 나왔겠지만,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특식도 괜찮겠다 싶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뜨끈한 육수 속 밀면과 김이 모락오르는 만두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오니, 슬쩍 걷고 싶어졌다.
‘선배님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공원 좀 돌다 갈게요’라는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아 괜히 휴대폰 시계를 보며 “지금 몇 시지…” 하고 얼버무렸다.
이미 눈치챈 듯한 선배가 말했다.
“저 공원 OO님이 매일 가는 곳 아니에요?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한 바퀴 돌다 오세요.”
못이기는 척, “그러죠 뭐…” 하고 공원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 나는 언제쯤 속마음을 그대로 말할 수 있을까…’
공원에 닿자, 수백 그루 단풍나무가 가을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잠깐 전의 넋두리는 금세 사라졌다.
연못 위로 잉어들이 헤엄치고, 물에 비친 단풍이 낭만적으로 흔들렸다.
나는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영상을 찍었고, 찍은 영상을 또다시 감탄하며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저기요, 사진 한 장 찍어줄래요?
하얗게 머리가 센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바쁜데 미안해요. 나, 사진 한 장 좀…”
괜찮다고 말씀드리며 어디에서 찍을지 묻자, 가로등 앞에서 그냥 찍어달라 하셨다.
“가로등보다는 여기 꽃 옆이 더 예쁠 것 같아요.”
보라꽃 옆에 모시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꽃과 함께 담긴 그녀의 모습이 참 따스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한 장 더 찍어달라고 하시며 조금 더 뒤로 가서 찍어달라고 하신다.
“내가 늙어서… 가까이 찍히는 건 싫어요. 멀리서 찍어줘요.”
몇 번이고 “아유, 너무 예쁘신데요.”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녀는 계속 자신을 늙었다고 말했다.
예전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분이 떠오르며 가슴이 저릿해졌다.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 사이에 끼면 불편할까 봐’라며 젊은 친구들과 차 마시러 가는 것도 거절했던 그분.
사진을 건네며 “날이 좋아서 산책 나오셨나 봐요?” 하고 조심스레 여쭈니, 할머니는 나를 빤히 보며 조용히 말했다.
“오늘이… 우리 아들 하늘로 떠난 날이에요.”
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안타까운 표정만 짓고 있는데 그녀가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의대 본과 3학년이었어요.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은 다 병원에서 일 잘하고 있죠. 그 아이는... 여기 없고요.”
“그리고 남편도 작년에 떠났어요. 근데 그이는 가면서 기뻐하더라고.”
“혹시… 아드님 만나러 가신다고 생각하셔서…?”
조심스레 묻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아들 기일이라 성당 갔다가… 집에 가는 길에 공원에 들렀어요.”
나는 잘하셨다고, 하늘에서 남편 분과 아드님이 함께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실 거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혹시 사진을 하나 더 찍어드릴까요 여쭤보니 이번엔 ‘하모’ 옆에서 찍어달라 하셨다.
하모는 이 지역 캐릭터인데 제법 귀엽다.
단풍 속에서 하모와 함께 찍히니 확실히 분위기가 살아났다. 할머니는 “하모가 좋네, 예쁘네~” 하시며 아까와는 다르게 ‘가까이 찍히는 건 싫다’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으셨다.
하모가 엄지척을 하고 있어
“우리도 엄지척 한번 해볼까요?” 하니 그녀는 의외로 힘차게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예쁜 것은 이성을 건드리고,
귀여운 것은 감성을 건드린다.
그래서 예쁜 것은 귀여운 것을 이길 수 없다’는 문장을 어디선가 읽었다.
그녀에게도 그 공식이 닿은 것일까.
귀여움이 사람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힘 말이다.
귀여운 하모와의 투샷을 담은 사진을 건네드리고 어떤 말로 작별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집에 바로 들어가지 마시고, 맛있는 거 드시고 들어가세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죠.” 하고 씩씩하게 답했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면서도 아련해진 채 사무실로 돌아가는데 귀여운 아기 고양이가 냐앙냐앙 울어댔다.
‘아유 귀여워… 츄르라도 챙겨올 걸.’
퇴근 후 가방에 츄르를 가득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만난 할머니께도 그런 귀여운 위로 하나 선물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영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에는 약사가 마음이 무너진 여고생에게 '어린이 비타민'을 건네며 위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이런 걸 주냐며 툴툴거리던 여고생이 결국 그 귀여운 비타민에서 위로를 얻는 장면.
내 가방에도 어린이 비타민 한 알만 있었다면…
“할머니, 이거 드셔보세요. 이거 먹으면 새 살이 뿅뿅 돋아나요.” 하며 유치한 위로라도 건넬 수 있었을 텐데.
예쁜 위로가 아니라, 귀여운 위로.
그 위로에 그녀도 픽— 웃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퇴근길, 가방에 츄르와 어린이 비타민을 가득 채워 넣어야겠다고 다짐하며 걸었다.
이상하게, 그 길을 걷는 내 발걸음마저 귀여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