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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Jul 03. 2023

컴칼 미술 과정 2년 차

커뮤니티 칼리지 봄학기가 지난주에야 끝났다. 작년부터 그림 인증 과정(Certificate in Painting)을 수강하는데 이번 학기에는 <2D 디자인>과 <라이프 드로잉>이라는 과목을 들었다. 커뮤니티 칼리지 미술 과정은 포트폴리오를 낸다거나 시험을 보지 않고 수강하고 싶은 지역 주민이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코스이다. 미술 필수 과목과 선택 과목을 일정 학점 수강하고 교양 과목까지 들으면 전문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고, 교양 과목을 듣지 않고 전공과목만 들으면 그냥 인증서(Certificate)를 준다. 미술을 대학과 대학원에서 전공한 사람도 많은 마당에 인증서를 긴요하게 써먹을 수 있어서 이 과정을 수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림을 잘 그리려면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집에서 가장 가까운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정한 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한 과목을 수강하는 데 약 $150달러, 즉 20만 원이 채 들지 않으니까 한 학기에 두 과목 씩 듣는다고 해도 크게 부담 가는 비용은 아니다. 


사실 커뮤니티 칼리지에 대해서는 밤새워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로 할 이야기가 많다. 미국에 와서 영어를 배운 곳도, 번역하면서 필요한 기반 지식을 쌓은 곳도, 부동산 중개인 자격증 과목을 수강한 곳도 모두 커뮤니티 칼리지이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일에 그토록 진심인 교수님들, 내 아이였다면 업어주고 싶을 만큼 열심히 사는 기특한 젊은이들도 이곳에서 많이 만났다. 미술 과정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작년에 처음 수강한 미술 과목은 초급 드로잉이었고 선생님은 마사코 미키라는 일본인이었다. 코로나가 극성인 시기에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는데 실시간 수업은 아니고 월요일에 올라온 강의 자료를 각자 학습한 뒤 주중에 숙제를 해서 제출하고, 숙제에 대해 학생들과 선생님이 코멘트를 해주는 방식이었다. 온라인이고, 실시간 수업도 아니었지만 어찌나 정성껏 수업을 준비하고 코멘트를 해주는지 사뭇 인상이 깊었다. 알고 보니 마사코 미키는 뉴욕을 비롯한 큰 갤러리를 중심으로 매우 활발히 활동하는 현직 작가였다. 페이스북 본사에 그린 벽화 중에 늑대 그림도 이분의 작품이고, 에어비앤비 본사에 전시된 조경 작품도 이분의 작품이다. 마사코 미키에게 초급 드로잉과 중급 드로잉을 배우는 건 매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론 과목도 문외한이 예술의 개념과 역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수업이었음은 물론이다. 

마사코 미키의 작품. 출처: https://ryanleegallery.com/artists/masako-miki/

수채화 중급과 고급, 유화 초급과 중급, 그리고 이번에 디자인 과목은 쥴리 휴즈(Julie Hughes) 교수님에게 배웠다. 물감이 곳곳에 묻어있고 이젤이 서 있는 학교 교실에서 난생처음 대면수업으로 미술을 배운 거다. 쥴리 선생님은 마사코 선생님과 교수 스타일이 꽤 달랐다. 온라인 수업과 대면 수업의 차이일수도 있는데, 마사코 선생님은 학기 초에 계획한 교과 과정을 충실히 준비해서 가르치는 스타일인데 비해, 줄리 선생님은 다음에 무슨 프로젝트를 할지 학생들 개인의 스타일과 발전 정도를 보면서 계속 바꾸었다. 두 분 모두 학생들의 스타일을 가능한 존중해 주어서 잘못한 부분을 지적하기보다 그 학생의 스타일을 보고 어떤 발전 가능성이 있는지 짚어주었다. 따라서 모든 학생에게 모두 다른 코멘트를 해주었고 각자 자신이 잘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다. 아무 기초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들을 수 있는 과정이다 보니 학기 초에는 웃음 밖에 안 나오는 그림을 그리는 학생도 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네거티브 페인팅, 텍스쳐 표현하기, 내러티브 자화상 등 고심해서 준비한 프로젝트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아이디어를 깜짝 놀랄 정도로 멋지게 표현해 내는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거였다. 줄리 휴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이며 나도 LA 공항에서 작품을 본 기억이 난다.

LA 공항에 전시되었던 줄리 휴즈의 작품, 출처: http://www.juliehughesart.com

줄리 선생님은 학생들이 예술 분야에서 성장하도록 프로젝트를 만들고 기회를 소개해주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선생님 추천으로 나도 로터리클럽 공모에 응모하여 토끼의 해 기념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다. 파이버글라스로 제작한 토끼를 장식할 디자인을 선정하여, 자신의 디자인이 선정된 아티스트들이 아크릴이나 타일 모자이크, 비즈 등 자신의 전문 기법으로 토끼를 장식하고 커뮤니티에 전시하는 것이다. 연말에 옥션을 하여 수익금 일부는 아티스트의 보수로, 일부는 우크라이나 난민 돕기에 사용한다고 한다. 내 토끼의 제목은 Rabbit of Hope이다. 다양한 식물을 모티브로 하여 싹트고 성장하여 다시 어린 생명체를 키우는 선순환의 희망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어릴 때 마당에 있던 목단,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는 아이비, 우리 동네에서 집집마다 기르는 과실수들도 등장시켰다. 파이버 글라스로 제작되어 아크릴로 표면 처리된 조각을 사포로 문질러서 매끄럽게 하는 과정부터 족히 한 달은 이 토끼에 매달렸다. 끝에는 자동차 도색하는 공장에서 코팅으로 마무리했다.

커뮤니티 칼리지에 전시된 모습

이번 학기에 가장 인상적인 과목은 라이프 드로잉이었다. 나체 모델을 직접 보고 그리는 수업인데 한국어로는 이 수업을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겠다. 가장 인상적인 이유는 한 번에 세 시간씩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수업이 알차서 터져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메이루 후왕이다. 수업을 함께 듣는 학생이 학기 시작 전 선생님께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아이 놀이방이 일찍 끝나는데 픽업 때문에 10분 정도 일찍 나가도 될까요?"

선생님의 답장은 이랬다고 한다.

"이 수업이 당신에게 맞지 않군요. 그냥 취소하세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깐깐한 성격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모델이 오지 않는 첫 시간부터 그 선생님의 답변은 성격이 깐깐해서가 아니라 모두에 대한 배려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대개 첫 시간에는 선생님 소개하고 준비물과 교과과정 소개하면 3시간짜리 수업이어도 1시간이면 끝날 때가 많다. 이 선생님은 자신 소개는 이름 정도만 소개하고, 준비물과 교과 과정도 이미 이메일로 보냈으므로 매우 짧게 설명한 뒤, 학생 전원이 한 사람 씩 모델로 서게 했다. 한 명씩 가운데 놓인 스테이지에 서서 1분간 포즈를 취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그리는 것이다. 어려운 포즈를 취한 학생들은 몇 초가 지나지 않아서 손이나 온몸을 덜덜 떨면서 1분을 버텼다. 게다가 다른 학생이 취한 포즈는 취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서 있거나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선생님이 말했다.

"1분 포즈 너무 어려웠을 거예요. 이제 모델이 오면 모델은 5분도, 10분도, 20분도 같은 자세로 있습니다. 아무것도 입지 않았죠. 아주 어려운 일을 하는 겁니다. 모델보다 늦게 들어온다거나 모델보다 일찍 나가서 모델이나 열심히 그림 그리는 학생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모델이 포즈를 잡고 있는 동안에는 무조건 쉬지 않고 그려야 합니다." 

실내에서 포즈를 잡게 한 뒤에는 야외에 나가서 지나다니는 사람의 모습을 또 그리게 하여 결국 첫 날부터 3시간을 빡빡히 채웠다. 한 학기 동안 어린 학생들까지 모두 놀랍도록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그들의 그림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무엇보다 모델들의 전문적인 태도는 놀라웠다. 처음에는 모델이 옷을 벗었을 때 그 아래 숨어있던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나이 든 모델의 축 늘어진 피부, 겉으로 건장한 젊은 모델의 어쩌면 감추고 싶을 것 같은 흔적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 모습은 목욕탕에서도 드러내지 않으니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조금 더 근육을 잘 드러내기 위해, 아름다운 자세를 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델의 태도에 나는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모델은, 포즈 중간의 짧은 휴식 동안 있는 선생님이 토막 강의를 할 때, 선생님의 질문에 답변도 하고 질문도 하면서 흥미 있게 강의를 경청하기도 했따. 수업 5분 전에는 교실에 도착해야 드로잉 보드를 세워놓고, 필요한 재료를 꺼내고 준비를 마칠 수 있고, 수업 시간 시작과 동시에 모델이 포즈를 잡기 시작하여 1분 포즈 10개부터 40분 포즈까지 정신없이 진행되어 마치는 시간까지 10 분 휴식이 전부인 숨 가쁜 시간이었다. 

쉰이 된 아줌마가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몇 과목 수강했다고 해서, 평생 그림을 그린 화가나 미술대학 가기 위해 밤낮없이 그림을 그리는 입시생의 실력과는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엘리트 미술 교육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림 실력과는 별개로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만나는 선생님과 다양한 연령의 학생들을 접하며 얻는 배움의 경험에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의미가 있다. 인생에서 겪는 그 밖의 경험과는 구분되는 일종의 예술 영역에 속하는 성장의 경험으로 다가왔다. 그림 인증 과목을 모두 이수하려면 이제 여섯 과목이 남았다. 처음에는 이 많은 과목을 언제 모두 수강하나 했는데 이제는 남은 과목이 줄어드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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