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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는 어떨까?

by 글벗

남편과 25년이 넘게 함께 살다 보니 그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안다고 자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속속들이" 안다는 건 좋은 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보인다는 말이기도 하다. 재채기를 크게 하고, 방귀를 많이 뀌고, 오늘 저녁 뭐야 몇 번씩 묻고, 영화 보면서 초점이 없는 질문을 해댄다는, 그런 사소하고 놀림의 소재가 되는 단점부터 이 남자와 계속 살아야 하나 회의가 들게 하는 문제까지 남편의 단점을 꿰뚫고 있다. 남편의 단점 가운데 몇 가지는 나름대로 통찰력 있는 분석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중 하나는 당장의 귀찮음을 피하려고 나중에 문제가 될 일을 막지 않는 것이다. 지난달 딸이 어금니가 아프다고 했다. 아무래도 매복 사랑니가 나오는 것 같다고 하여 치과에 가서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다행히 사랑니가 나오는 징후는 없고, 교정 후 착용해야 하는 리테이너를 하지 않아서 생긴 악관절장애여서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았다. 치료 후 일주일쯤 지나자 엑스레이 촬영비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큼지막한 병원비 청구서가 도착했다. 헛웃음을 웃으면서 곧장 수표를 써서 청구서에 동봉된 봉투에 넣었다. 병원비를 기한까지 지불하지 않으면 추심업체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단, 병원비가 든 봉투를 병원까지 우편으로 보내는 데 한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우체통이 도보 15분 거리, 또는 차로 1.5분 거리에 있다는 거다. 우리 집에서 골목을 두 번 돌아나가면 큰 길이 나오고 그 큰길과 교차하는 다른 큰길을 십분 쯤 걸어가야 한다. 다음 날 아침 볼일이 있어서 남편과 외출하는 길에 수표가 든 봉투를 챙겨서 우체통에 들리자고 했다. 우회에 걸리는 시간은 약 1.5분. 남편은 1.5분을 우회하여 병원비를 우체통에 넣자는 제안을 일축했다.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딨어? 우체통으로 가려면 우회전을 했다가 다시 유턴해서 나와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 내가 나중에 할게."

참 익숙한 대사이다. 나의 합리적 제안이 일언지하에 묵살당했지만 싸우기 싫어서 난 꼬리를 내렸다.

"흠, 이런 일은 곧바로 해치우는 게 나을 텐데. 어쨌든 병원비 봉투를 우체통에 넣는 건 남편이 담당하기로 해."

"걱정하지 마. 내가 내일 넣을 거야."

그럼 그러든지.


그리고 며칠 전 봉투에 "Friendly Reminder(독촉장)"이라는 선명한 도장이 찍힌 우편물이 도착했다. 한 달 동안 병원비 우체통에 넣는 걸 까맣게 잊어버린 거다. 그제야 남편은 황급히 집안 곳곳을 뒤적여 봉투를 찾아서 우체통까지 운전을 해서 보내고 왔다.


그동안 수없이 반복 상영된 드라마를 다시 보니 짜증이 밀려왔다. "귀찮은 걸 피하는 것도 게으름"이라는 니르 이얄의 주장이 떠올랐고 마음속으로 날카로운 통찰력이 돋보이는 보고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골자는 당장의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하여 이제껏 치렀던 기회비용의 사례 분석 및 수량적 연구였다. 곧이어 피의자를 신문하는 검사가 되어 혐의 사실을 읊조리다가 정신이 들었다.


그러면 나는?

나에겐 당장의 귀찮음을 피하려다가 나중에 더 큰 대가를 치르거나 기회를 놓쳐버린 일이 한 번도 없었을까? 그런 굵직한 일이 아니더라도 당장의 귀찮음을 피하는 일이 나의 일상습관이 되어버려 내 눈으로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미루는 습관은 남편이 가진 장점과 짝을 이루어 함께 오는지도 모른다.

모건 하우젤은 <불변의 법칙(Same As Ever)>에서 사람의 장점과 단점이 같은 성격의 양면임을 지적했다. 엘론 머스크의 비저너리로서 추진력은 그의 또라이 기질과 분리될 수 없다는 걸 예로 들었다. 그러고 보면 미루기는 굵직한 일들을 뚝심 있게 해내는 남편의 장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단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들여 쓰던 마음속 보고서, 아니 고소장을 조용히 찢어버렸다.

진실의 바다에서 내가 습득한 지식은 물방울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텐데, 그걸로 비판적 분석을 하느라 머릿속이 바빴던 내 모습이 우스웠다. 남편뿐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애초에 연구 주제가 잘못되었다.

내가 가장 깊이 들여다보고 분석해야 할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오랜만에 내 생일을 남편과 단둘이 보냈다. 올해 4월에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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