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냐옹 May 27. 2023

크로바레코드 9

9. 봄봄화실- J


방앗간 아주머니가 가져가 주신 말랑한 떡볶이 떡과 슈퍼 아주머니가 가져다주신 양배추랑 어묵, 그리고 세탁소 아주머니가 가져다주신 수제 고추장을 넣고 떡볶이를 만든다. 설탕 한 스푼에 마법의 가루도 조금 넣고 졸이면 완성. 너무 졸이면 양배추가 흐물거려서 맛이 없다. 

“달짝지근한 게 맛있네!”

남은 어묵으로 끓인 어묵탕도 내놓는다. 숭숭 썰어 넣은 대파가 풍미를 더 한다. 

“분식집 차려도 되겠는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헤헷. 분명 점심을 먹고 오셨다고 했는데, 벌써 떡볶이가 동났다. 호로록호로록 어묵 국물을 마시며 아주머니들이 담소를 나누신다. 눌은 냄비에 물을 부어놓고 얼음 동동 아이스티를 입가심으로 내온다. 

“우리 제이 덕에 내가 살이 올랐다니까.”

“자긴 좀 쪄도 돼. 보기 딱 좋구만.”

“그래?”

“맞아, 얼굴에 살이 붙으니까 열 살은 어려 보인다.”

열 살은 아니고, 다섯 살 정도는 어려 보여요. 어려 보인다는 말에 세탁소 아주머니가 신이 났다. 

“어제 매직이한테 재밌는 말을 들었지. 하니가 2년 동안 짝사랑하던 아가씨가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는 거야.”

앗, 얼굴이 빨개진다. 

“준이네 집에 이사 왔다는 그 아가씨? 거긴 좀 뚱뚱하던데?”

“거기 말고.”

“거기 말고 이사 온 집이 있나?”

아,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세탁소집 아주머니도 참 짓궂으셔.

“에이그, 그렇게 눈치를 줘도 몰라? 여기 제이잖아.”

세 명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에게 모인다. 쥐구멍 어디 없나요. 

“어제 데이트도 했다며.”

끙, 오늘은 레코드 가게를 열지 말 걸 그랬다. 종일 얼굴이 화닥거리게 생겼네. 묻는 말에 꼬박꼬박 성심성의껏 답하고 삼총사를 돌려보냈다. 뺨이 너무 뜨겁다. 찬물로 어푸어푸 세수를 해도 마찬가지다. 이러다 아예 찐 고구마가 되겠네.   


신호가 간다. 앞에 놓인 서류를 공연히 뒤척인다.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봄봄 화실 조카 분 되시나요?”

그는 몹시 바쁜 것 같았다. 아주 잠깐 통화를 하는 사이에도 자꾸만 호명을 당해서 결국 퇴근 후에 보는 걸로 했다. 

봄 선생님의 조카는 청색 작업복을 입은 그대로 카페에 나타났다.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 키는 작지만 몹시 다부진 체격이다. 

“아, 아직 일이 안 끝나서, 옷도 못 갈아입고 나왔네요.”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아뇨. 제가 더 죄송하죠. 여기까지 오시라고 하고,”

저녁 시간을 빼서 나온 것인지. 그는 차 대신 볶음밥을 시켰다. 오래된 카페라 식사와 함께 후식으로 차도 제공된다. 

“월세가 많이 밀렸죠?”

“보증금 빼고 나면 오백 쯤요.”

잘 익은 계란이 먹음직스럽다. 싱싱한 계란을 쓰는구나. 노른자도 선명하고. 

“고모는 지금 요양병원에 계세요. 밀린 월세를 낼 여력은 없으실 것 같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그럴 것 같았다. 고모의 빚을 조카가 갚을 의무도 없고, 쓰지도 않은 건물의 월세를 억지로 받을 수도 없다. 그저, 확인차 왔을 뿐이다. 

“먼저 화실 상태를 확인해봐도 될까요? 계약은 만료된 것으로 해두고요. 월세가 자꾸 나가니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발알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접시를 비운 그가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후룩 들이키고는 일어선다. 그가 떠난 자리에 조금 더 앉아 있었다. 밀린 월세보다는 타인의 공간을 들어가기 위한 절차였다. 뭐, 말하지 않고 들어갔다 해도 개의치 않았을 것 같지만. 


나간 김에 생필품을 사 들고 들어왔다. 하나하나 짐이 는다. 그만큼 적응해가고 있는 것일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몽이 언니가 뒤따라 들어온다.

“뭐 사 왔어?”

수세미나 세제, 뭐 이런 거요. 간식으로 사온 쿠키를 홍차와 함께 내온다. 홍차도 역시 슈퍼 아주머니가 가져다 준 거다. 덕분에 점점 사랑방의 면모를 갖춰간다. 

“너가 걔라며?”

멍멍, 네. 개가 맞습니다. 보세요. 꼬리도 흔들잖아요. 

“세상에. 어쩜 이런 우연이 다 있니?”

네. 저도 높으신 그분께 감사하고 있어요. 

“난 찬성이야!”

뭘요? 지금 저를 국회로 보내시는 건 아니시죠?

“웃기만 하지 말고 말 좀 해봐.”

무슨 말이요. 가만히 있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어떻게 만난 거야?”

“버스킹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 도서관에 들렸거든요. 근데 거기 서가가 너무 좋았어요. 외진 곳에 있어서 조용하고. 너무 크지도 않고, 그래서 자주 들렀는데.”

“거기서 우리 하니를 봤어?”

“처음엔 못 봤어요. 일 년쯤 다녔는데, 언제부턴가 너무 귀엽게 생긴 사서가 있어서.”

안 봐도 알겠다. 분명 귀까지 빨개졌을 거야.

 “네 눈엔 하니가 너무 귀엽구나. 아이고, 나까지 간지러워 죽겠네.”

이래서 말하기 싫었다구요.

“그럼, 하니가 먼저네.”

“네?”

“음, 아니야. 그나저나 이 쿠키 맛있다.”

몽이 언니는 오늘 긴 머리를 반 묶음 해서 커다란 스카프로 묶었다. 그 덕에 굉장히 청순해보인다. 

“언니, 오늘 어디 가세요?”

“어, 그래 보여?”

“네. 굉장히 예뻐요.”

화장도 은은하게 하고, 그냥 퇴근하는 사람의 복장이 아닌데?

“방방이 타러 가.”

“아,”

“넌 어제 갔다며, 재밌었지?”

“네.”

엄청요. 거기가 문을 닫는 게 아쉬워요, 이제 막 알았는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기 온다.”


종이 울리고, 훤칠한 남자가 들어온다. 이 동네는 선남선녀만 사나. 순해 보이는 인상의 청년이 생긋 웃는다. 

“인사해. 매직이야. 세탁소 아주머니가 자랑 엄청 했지?”

“안녕하세요. 제이입니다.”

“실감이 안 나네요, 제이 씨를 여기서 보다니.”

저도 그렇습니다. 말로만 듣던 매직 씨네요. 아주머님 말처럼 훈남이십니다. 

“제이 씨가 뭐냐? 동갑이잖아. 말 놔.”

“어떻게 초면에 말을 놔.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놔야지.”

그가 비스킷을 입에 넣으며 눈을 찡긋댄다.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데. 이거

“끼 부리지 말고, 하니는?”

“하니는 좀 늦어요. 회의하고 온댔거든요.”

“결국 우리끼리 가는 거냐?”

내심 좋으면서, 눈빛이 벌써 흔들리는 구만, 몽이 언니와 매직이를 배웅하고 그릇들을 치웠다. 낮에 안 한 설거지까지 한다. 눌어붙은 냄비가 물에 불어서 말끔하게 닦인다. 그나저나 이 밤에 저길 어떻게 올라가지. 좀 무서울 것 같은데. 조카가 허락을 했다지만, 꽤 오래 사람의 출입이 없던 곳이라 불쑥 들어가기가 꺼려진다. 역시 내일 아침에 가는 게 나을까. 혼자 가긴 싫은데. 


앞섶이 젖은 옷을 갈아입고, 빗자루로 방을 쓴다. 날마다 쓸어도 날마다 그만큼의 먼지가 나온다. 그만큼 내가 바깥의 먼지를 실어나르는 거겠지. 종소리가 나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하니다. 멋쩍은 듯 서 있는 그다. 

“안녕?”

“안녕.”

“밥은 먹었어요?”

어색 할 땐 끼니를 묻는 게 최고다.

“난 회의하면서, 제이 씨는 밥 먹었어요?”

네, 봄봄 화실 조카를 만나러 가기 전에 먹었어요. 참, 봄봄화실! 

“저 부탁이 있는데.”

그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사서로서의 그도 좋지만, 이렇게 다양한 표정을 짓는 그도 좋다. 팔불출 같은 웃음을 참고, 옷소매를 잡아끈다. 

“아무래도 혼자 들어가기가 무서워서요.”


계단을 올라가서 화실 문 앞에 섰다. 고즈넉한 공간에 단둘이 있자니 심장이 심히 뛴다. 제발 침착해. 뻑뻑해서 안 돌아가는 열쇠를 그가 가만히 쥐고 돌린다. 심장아, 제발. 이러다가 죽는다고.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던 문이 그의 손길에 스르륵 열린다. 너도, 여자로구나! 그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는다. 반짝 불이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의 숨소리도 괜찮았는데. 

“발밑 조심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동이를 걷어찼다. 깡 하는 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은 고요를 깨뜨린다. 불빛이 불안하게 깜빡대는 것이 어째 불안하다. 그래도 하니가 곁에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화실은 먼지가 뿌옇게 앉았을 뿐이지, 그 옛날 그 모습 그대로 정지한 것 같다. 막 뺀 것 같은 의자나, 그리다 만 그림, 붓이 꽂혀있는 물통까지 그대로다. 물감이 묻은 채로 말라붙어버렸지만, 후, 하고 온기를 불어넣으면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갈 것처럼 생생하다. 

이젤이 창가에 나란히 세워져있고, 곁에 있는 작은 테이블엔 물감이며 붓이 흩어져 있다. 벽면엔 이 화실을 거쳐간 예비 화가들의 그림들로 빼곡하다. 인물화도 있고, 구상화도 있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초 현실풍의 그림도 있어서 몹시 다양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조화롭다. 아마도 화실 주인의 취향을 잘 반영한 느낌이랄까. 좌우로 문이 하나씩 있는데, 왼쪽은 화장실, 오른쪽은 창고다. 물을 틀어보니, 다행히 그간의 겨울을 견뎠는지, 잘 나온다. 창고엔 벽에 걸리지 않은 그림들과 화구박스로 혼잡하다. 쓰지 않는 이젤들이 한쪽 벽에 세워져있고, 그림은 그 반대편 벽에, 화구박스는 선반에 정리되어 있지만, 구석구석 비어져 나오는 미술용품들로 어지럽기 짝이 없다.  


“봄봄의 역사가 여기 쌓여 있네요.”

그가 캔버스를 뒤적이다 말고, 그림 하나를 뽑아 든다. 크로바 레코드를 그린 풍경화다. 어디선가 벚꽃이 흩날리는 것이 조금 앞서간 계절인가 보다.  

“매직이 그림이에요.”

“와, 그림 잘 그리시는구나.”

“네. 본인은 어설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매직이, 손재주가 있어요.”

크로바 레코드를 그린 그림도 그렇지만, 아마추어치고는 놀라운 그림들이 많아, 감탄이 나왔다. 엄청난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갔구나.

“버리기엔 너무 아깝죠. 그래서 봄 선생님도 버리지 못했을 거에요.”


검은 천으로 씌워놓은 그림이 있어서 끙끙대며 꺼내는데, 불이 한층 깜빡인다. 아무래도, 이 그림 보는 걸 싫어하는 모양인데. 근데 누가? 힘들여 꺼낸 그림은 성모마리아 상을 그린 그림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그렸는데, 성스럽고 자비로운 여신상의 눈이 검은 색이다. 흰자가 없는 검은 색, 소름이 오싹 끼쳐서 주춤 물러났다. 밤에 보기에 무서운 그림들도 있구나. 가만, 이게 무슨 소리지? 콩콩콩,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도 뭔가를 알아챘는지 뒤적이던 그림을 놓고는 내 쪽으로 다가온다.

“무슨 소리 안 들려요?”

들려요. 계단 올라오는 소리. 삐그덕 문 열리는 소리. 그리고 스산한 바람 소리. 설마 내가, 저주받은 그림이라도 건드린 걸까. 


발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깜빡대던 불이 나가버렸다. 어둠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누군가 훅, 입김을 끼쳤다. 아악!

뭔가 크게 나동그라지는 소리, 이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소리, 누군가 끙끙대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지나가고 난 후 그가 어깨를 끌어안는다. 

“이젠 괜찮아요.” 

깜빡대던 불이 다시 불이 들어왔다. 산란하는 빛 속에서 웅크린 사내의 등이 보였다.  

“준이 형?”

사내가 정강이를 붙들고 끙끙댄다. 하니의 일격에 당한 모양이다. 

“불이 켜져 있어서 들어왔는데, 그 불이 천국 가는 불이었나보다.”

“아, 미안. 형인 줄 몰랐어.”

“그럼, 뭔 줄 알았냐?”

뭐, 귀신? 

“아, 그야…”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가 씩 웃으며 손을 잡는다.

“크로바의 새 주인인가 보네요. 김 준입니다. 첫인상이 엉망이네요.”

하필 불이 나가서. 폐를 끼쳤습니다. 다시 불이 깜빡대서 서둘러 화실을 나왔다. 

“귀국했다고는 들었어.”

“연락하고 왔어야 하는 데, 어쩐지 내 집 같아서 불쑥 와버렸다.”

그래서 그 화를 당하신 거에요. 아직도 놀란 심장이 벌렁거린다구요. 

“고향이니까 그렇지. 정말 오랜만이네.”


불을 밝힌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간 옛 음악과 함께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대화를 나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아득해지는 것이 그 옛날로 돌아간 모양이다. 우유를 넣은 코코아를 내놓고 자분자분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둠 속에서 나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날린, 용맹무쌍한 당신의 목소리에 마음을 뺏긴다. 다정하고, 용감하구나. 그리고 그 품은 든든하고 따뜻하구나. 에잇, 대화에 집중해야 하는데. 


“찾는 그림이 있어.”

“봄봄화실에요?”

“응, 누가 가져간 게 아니라면, 아직 여기 있을 거야.”

“성모마리아 그림은 아니죠?”

그 꺼름찍한 그림을 그린 분이 당신은 아니시겠죠?

“그건 장난으로 그린 거고, 찾는 건 그게 아니에요.”

헐, 이 양반이 그린 게 맞네. 왜 그런 그림을 그렸어요. 꿈에 나오면 어쩌려고.

“오늘은 안될 것 같은데? 등이 저 모양이라.”

“그러게. 낮에 다시 와야겠다. 그래도 되죠?”

물론입니다. 더불어 마리아님도 가져가주시구요. 쿠키가 떨어져서 토스트를 만든다. 달구어진 후라이팬에 마가린을 넣고, 계란을 입힌 식빵을 노릇노릇 굽는다. 다 굽고 나선 설탕을 듬뿍 뿌려야 맛있다. 먹기 좋게 사 등분을 해서 내놓았다. 끼니를 건너뛰었는지 준이 형이 포크를 바삐 놀린다.      

“몽이는 잘 있어?”

“좀 일찍 왔으면 방방이를 탔을텐데.”

“방방이? 다리 밑에 그 방방이? 아직도 있어?”

“이번 주까지는. 곧 철거돼.”

“그럼 꼭 타야겠네.”

아는 노래가 나왔는지 하니가 후렴부분을 따라부른다. 준이 형도 설탕 묻은 입술을 닦고 동참한다. 


“여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좋네. 노래도 그렇고 이 소파도 그렇고.”

“아예 귀국한 거야?”

“그렇다고 해야하나.”

“뭐가 그리 아리송한데?”

잔뜩 머리가 헝클어진 몽이언니가 문가에 서서 생글생글 웃는다. 얼마나 요란하게 탔는지 매직이의 머리도 봉두난발이다. 

“우주까지 갔다 왔나 보네.”

“뭐 그랬지. 김 준! 오랜만이다!”

몽이언니가 손을 내민다. 준이 형도 기쁘게 그 손을 맞잡는다. 

“여전히 예쁘네. 넌.”

“그러는 너도 여전히 멋있네.”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언제 오신 거에요?” 

“아까. 화실에 불이 켜져 있어서 올라갔는데, 된통 당했지 뭐.”

그가 바지를 걷고 시커멓게 멍든 정강이를 보여준다. 어째 매직이가 쌤통이라는 듯이 웃는다. 뭔가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데?

“이 정도 박력을 보아하니 이건 하니인데? 태권도 검은 띠의 하니 밖에는 이럴 놈이 없는데?”

딩동댕! 잘도 맞추시네요. 태권도 검은 띠라, 어쩐지 더 멋있어 보여요.

“마리아님이 날 인도하는 줄 알았다니까.”

“그 흉물스런 그림은 대체 왜 그린 거에요. 그 그림 땜에 이 동네 꼬맹이들 다 오줌을 지렸다구요.”

“학교 축제 때 귀신의 집에 걸어둔다고, 부탁받은 그림이야. 나도 그렇게 무서울 줄은 몰랐다.”

나만 무서운 게 아니었구나. 휴. 

“이참에 그 그림이나 처리하고 가요.”

“알았어.”

참으려고 해도, 하품이 나온다. 이분들은 죄다 야행성인가 보네. 나는 새 나라의 착한 어른이라 포근한 이불이 그립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집에서 한잔하자.”

“지하철 끊겨.”

“자고 가면 되지.”

몽이 누나의 당당한 초대에 매직이가 벌떡 일어선다. 

“우리 집에 가요. 선물로 들어온 등심도 있고, 형이 쟁여둔 양주도 있어요. 빈방도 있고.”

“형? 유진이?”

“셋 다 동창이잖아요. 몽이 누나랑, 형이랑 우리 형. 이참에 다 같이 보면 되겠네.”

“부모님이 싫어하실 텐데.”

남매만 있는 자유로운 집이 나을 듯한데, 매직이가 한사코 우긴다. 

“저희 부모님이 얼마나 개방적인 분이신데요. 걱정말고, 가요!”

매직이의 인도에 따라 몽이언니와 준이 형이 졸졸 따라나선다. 빈 접시와 머그 컵을 하니가 같이 들어준다. 

“잠깐만요.”

뭔가를 잊은 듯, 그가 집으로 달려간다. 몇 개 안 되는 그릇을 다 헹궜을 때 다시 그가 나타났다. 좀 낡은 듯한 곰 인형을 들고 그가 웃는다.

“이거 안고 자면, 무서운 꿈 안 꿔요.” 

포근한 곰 인형에선 포송포송한 햇살 냄새와 아련한 그의 향기. 대답 대신 곰 인형을 꼬옥 끌어 안는다.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문을 나선다. 

“잘 자요.”

피곤해 보이는 그도, 집으로 향할 것이다. 이 말랑한 녀석이 없어서 그가 악몽을 꾸면 어쩌지. 그러기 전에 빨리 그를 찾아야겠다. 우리의 꿈속에서.      


캠핑 의자에 곰 인형을 앉혀놓고 나란히 앉아 노래를 부른다. 이사를 하고 나선 통 버스킹을 하지 못했다. 오늘은 마음먹고 나왔다. 도서관 옆에 작은 공원. 내가 처음으로 노래를 부른 공원이다. 요즘은 다른 공원에서 부른다. 아무래도 인적이 너무 적으면 안 되니까. 그래도 자작곡은 이곳에서 먼저 부르고 싶다. 너도 응원해줄 거지? 곰 인형에 눈을 맞추고, 입술을 열었다. 봄에 맞는 노래를 몇 곡 부르고, 드디어 내 노래다.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아

공책 모퉁이에 낙서를 하고

아무데나 뒹구는 낙엽을 햇살에 비춰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아     


글씨가 전부인 모퉁이를 달려도 해는 지지 않고

고백할 마음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고

보리차라도 마실래차게 아니면 뜨겁게

반짝 불이 들어오는 크로바 레코드      


다정한 거짓말은 보약

억지로 웃지 않아 크로바 크로바

엉킨 실타래 같은 니 마음

끌러봐 끌러봐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

철 지난 달력을 찢고 

이슬이 맺힌 맥주 캔을 찌그러뜨릴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래도 들리고 싶다면 언제든지 와

들어는 줄게 네 마음 크로바 크로바 

가끔은 한눈을 팔아도 용서해주실 거야

크로바 레코드 끌러봐 네 마음       


소금도 좋고 설탕도 좋아 

반짝이는 가루를 뿌리고 

나지막이 불러봐 포실포실 찐 감자 같은 네 목소리      


다정한 거짓말은 보약

억지로 웃지 않아 크로바 크러바

엉킨 실타래 같은 니 마음

끌러봐 끌러봐      


여느 때와 마찬가지인 반응이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기타 케이스에 담긴 소박한 마음들을 주머니에 담고, 앰프를 정리했다.  


“이렇게 가까운 공원에서 노래를 부르는 줄 몰랐어요.” 

그가 캔커피를 들고 활짝 웃는다. 아 부끄럽다. 자작곡을 들었을 텐데.

“여긴 오랜만이에요.”

“그럼, 더 영광이네요.”

점심을 먹고 가는 길이었는지 곁에 선 동료들이 고개를 까딱인다. 

“노래 정말 잘 부르시네요.”

도서관에서 많이 봤던 얼굴들이라 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하니 사서는 좀 더 있다 와.”

“넵!”


그와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신다. 차고 달다. 

“이 녀석도 데리고 왔네요.”

그가 가방에 앉혀놓은 곰 인형을 끌어안는다. 다 큰 성인 남자가 곰 인형을 안고 있는 게 별로 이상하지 않다. 역시 주인이라 그런 걸까. 

“알려줬으면 처음부터 들었을 텐데. 마지막 곡 밖에 못 들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이 녀석이 다 들었으니까요. 

“전등은 아직 못 고쳤죠? 한참 서고 정리 중이라 가보지 못했네요.”

우리가 본 건 삼일 만이다. 그 사이에 주말이 지났다. 근데 왜 이렇게 오래된 것 같지.

“전등은 다음 날 고쳤어요. 뭐, 전구만 갈면 되는 일이라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전구도 못 갈 정도로 연약한 아가씨는 아니랍니다. 사다리도 있겠다. 그 정돈 금방 뚝딱이라구요. 

“준이 형은 아직이죠?”

“네.”

그날 얼마나 마셨는지, 매직이는 학교에 가지 못했고, 몽이 언니와 매직이의 형은 오전을 날리고 오후에야 출근을 했다고 한다. 그나마 몸을 사렸다는 준이 형 역시 오후 늦게야 일어나 해장으로 라면을 먹고, 집을 나섰다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저, 내일 쉬는 날이에요. 2층 정리 같이 해요.”

전구만 갈아 끼웠을 뿐이지, 아직 아무것도 하지를 못했다. 마리아 그림이 준 공포 덕에 함부로 그림을 만지기도 꺼려진다.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모처럼 휴일인데?”

“모처럼 휴일이니까 같이 있어야죠.”

이 사람은 말도 참 예쁘게 하는구나. 

“어떤 노래 좋아해요?”

“방금 그 노래. 제이가 만든 노래.”

아까보다는 작게, 하니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다정한 거짓말은 보약

억지로 웃지 않아 크로바 클러바

엉킨 실타래 같은 니 마음

크로바 클러로바     


눈밑에 있는 보조개가 피어난다. 커피 향이 나는 그의 숨결이 좋다. 내 노래에 귀 기울여주는 그가 좋다. 하니가 좋다. 

“내일 봐요.”

네. 내일 봐요. 대답 대신 곰 인형을 꼭 끌어안는다. 아직 그의 온기가 남은 곰 인형을. 


#달달구리로맨스 #혈당높이는로맨스 #힐링로맨스 #웹소설 #크로바레코드 #봄봄화실 #하니와제이 #첫사랑 #짝사랑

작가의 이전글 크로바레코드 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