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냐옹 May 30. 2023

크로바레코드 13

13. 노래하는 짐승-J


그는 전보다 더 땀을 흘린다. 초여름 날씨 탓이겠지만, 몸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여전히 피곤에 지친 얼굴. 손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닦고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자꾸 오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의 일도 아닌 일에 신경을 쓰게 해서 내가 더 미안하다. 

다시 볶음밥이 나왔다. 그가 바삐 숟가락을 놀린다. 일단 포도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봄봄 화실이 나갔습니다.”

“잘됐네요.”

“세입자가 밀린 월세를 대신해서 그림을 구입하고 싶다는데 괜찮으실까요?”

“화실에 남아있는 그림이요? 그걸 산대요?”

식사예절을 제대로 배웠는지, 입안에 밥을 삼킨 다음에 말을 잇는다. 

“봄 쌤의 옛날 제자에요. 그래서 그 그림들에 애착이 있나 봐요.”

“고모한테 물어보겠지만, 아마 좋아하실 거에요. 화실을 닫지 못한 것도 그림들 때문이었으니까요.”

그가 다시 식사를 시작한다. 각진 얼굴에 짧은 머리칼이 다소 강한 인상이지만, 눈매만은 선해 보인다. 무엇보다 노동자의 손가락이 아니다. 길고 섬세한 것이 예술가의 손인데. 시선을 눈치 챈 그가 씁쓸하게 웃는다.

“저도 한 땐 그림을 그렸어요. 사실 우리 집은 예술가 집안이에요. 고모도 그렇지만,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그림을 그리셨거든요. 엄마는 동양화, 아빠는 서양화. 근데 다들 가난했어요. 그림밖에는 모르는 바보라서 그런가, 보증을 잘 못 설 때도 있고, 사기를 당할 때도 있고, 암튼 단칸방을 벗어난 적이 없어요. 그게 지긋지긋해서 미술을 그만 두고, 자동차정비공이 됐어요. 근데도 이 손가락을 어쩔 수 없나봐요. 그렇게 기름때를 묻혀도, 여전히 그림을 꿈꾸니까요.” 

그도 언젠가 다시 붓을 들 날이 오겠지. 지금은 그 시간을 위한 과정. 내가 곰 씨를 따라 노래하듯, 그도 언젠가 다시. 


노인들이 옹기종이 모여앉아 바둑을 두는 벤치를 지나, 5월의 테니스장을 지나, 시원스레 물줄기를 뿜는 분수대를 지나,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려는 데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린다. 나도 모르게 소리에 끌려 쓰레기분리수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비원 유니폼을 입은 사내가 페인트 깡통에 걸터앉아 무심히 기타를 연주한다. 아무렇지 않게 가방이 놓여있는 걸 보니, 애지중지하는 기타는 아닌 것 같고, 소리도 어딘가 조율이 안된 것처럼 불안정하지만, 기타 솜씨만은 끝내준다. 이거 무슨 노래더라. 그래, 퀸 노래다. “Somebody to love” 목소리가 없어도, 가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섬세한 연주, 그냥 깡통에 앉아 치는데, 콘서트장에 와 있는 것 같다. 멀리서 들려오는 테니스 공 소리도, 함성도, 새들의 지저귐도 기타연주에 묘하게 뒤섞인다. 홀린 것처럼 박수를 쳤다. 연주를 마친 그가 멋쩍게 웃는다. 


“듣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네.”

“진짜 잘 치시네요.”

“쓸만한가 쳐본 거야. 누가 버렸거든.”

“좋은 거 같은데.”

그가 어깨를 으쓱한다. 경비원치고는 조금 젊은 것 같기도 하고. 나이 가늠이 좀 힘든 인상이다. 머리는 희지만, 주름살은 별로 없다. 타고난 한량의, 아니 예술가의 얼굴인데.

“그러게. 좀만 조율하면 꽤 좋은 녀석인데.”

그가 아쉬운 듯 기타를 가방에 넣는다. 

“괜찮으면 아가씨가 가질래?”

“아저씨는요?”

엉겁결에 기타를 받아들고 그에게 묻는다.

“난 칠 시간이 없어. 칠 공간도 없고. 사는 데가 요 앞 고시원이거든.”

저편에서 누군가 그를 부른다. 그가 손을 흔들고는 경비원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린다. 가벼운 인사만큼이나 가벼운 미련. 하지만 역시 오늘은 뭔가에 홀린 게 틀림없다.


“저, 괜찮으시면, 저희 가게에 놀러 오세요. 중학교 뒤에 있는 크로바 레코드거든요. 이 기타, 제가 조율해 놓을게요.”

그가 대답 대신 웃고는, 동료를 향해 바삐 걸음을 옮긴다. 고시원 침대 밑에 꽁꽁 숨겨놓은 저 재능도 누군가는 간절히 원하는 재주일텐데. 기타를 맨 채 쓸쓸한 마음으로 돌아선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은 얼마나 복 된 삶일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부디 이 행복이 오래갈 수 있길


한참 기타를 조율 중인데, 종소리가 들린다. 눈을 들어보니, 낯선 청년이 머뭇대며 서 있다. 뭐지, 어디서 꽃가루가 흩날리는데? 손가락이 홀린 것처럼 들장미 소녀 캔디를 연주한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중저음으로 부르는 캔디도 무척 매력적이구나. 감탄을 하며 기타를 내려놓는다. 이만하면 조율은 끝난 것 같네. 기타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그도 한 발 다가온다.


“곰 아저씨가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 아빠를 아세요?”

이젠 나도 자연스럽게 아빠라고 하네. 

“아, 따님이시구나. 그래서 그런가,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네요.”

테리우스가 사근사근 말을 붙인다. 이러면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요. 여성분들 도망가세요. 캔디처럼 불행해지기 전에. 

“음반 사러 오셨나요?”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아무 말이나 해 본다. 

“여기 있는 건 거의 소장용 아닌가요?”

“그걸 아시는 걸 보니 옛 단골이신가 보네요.”

“뭐, 그렇죠.”

테리우스가 사근사근 웃으며 의자에 털썩 앉는다. 엄청 사교적인 성격이구나.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역시 위험해. 

“일단은 기타 줄을 산다는 핑계로 오긴 했는데, 사실은 음악을 찾고 있어요. ‘네 속눈썹에 내린 비를 잊을 수 없어. 그 머리칼에 내린 별을 지울 수 없어’ 이런, 노랜데, 혹시 아세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멜로디에 처음 듣는 가사다. 그래도 음은 복잡하지 않아 금방 귀에 익는다. 


그가 가게를 둘러보는 동안 얼음 동동 레모네이드를 만든다. 엊그저께 슈퍼에서 사온 레몬도 얇게 썰어서 띄운다. 보기에도 상큼하다. 테리우스는 조율한 기타를 튕겨대고 있다. 제법 치는 걸. 그래도 그 중저음의 목소리를 지울 만큼은 아니다. 밤새 꿀에 재웠어요? 어쩜 그리 달아요. 

“노래 잘 하시던데.”

그가 치던 기타를 든 채 레모네이드를 마신다. 폼이 그냥 화보집이네. 

“버스킹을 해요. 본업은 약사구요.”

이 목소리로 약을 판다구요? 감기약이나 회충약이 맞는 거죠. 뭔가 위험한 약은 아니죠? 

“약사시구나. 음악을 하실 줄 알았는데.”

“관심이 있긴 했는데, 엄마가 많이 반대를 했어요. 그래서 대신 약사가 된 거죠. 근데 요즘은 후회가 되시는지.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하라고 하세요. 뭐든 늦은 일은 없다면서.”

“위안이 되는 말이네요.”

“네.”


그가 익숙한 곡을 연주한다. 다섯 손가락의 ‘풍선’ 그의 목소리에 맞춰 나도 화음을 넣어본다.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이 초콜릿 분수에 풍덩 빠졌을까. 하지만 내겐 하니가 있다구요. 튼튼한 튜브같은 우리 하니. 

“아저씬 이제 여기 안 오시나 봐요.”

“아프셨거든요. 지금은 요양 중이세요.”

뚝, 기타를 치던 손을 멈췄다.

“우리 엄마도 아파요. 곰 아저씨처럼 낫는 병이면 좋겠는데, 지금은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좋겠어요.”

위로할 말이 없어서, 기타를 건네받고, 노래를 부른다. 잠깐 들었던 그 노래. 


네 속눈썹에 내린 비를 잊을 수 없어 

그 머리칼에 내린 별을 지울 수 없어      


“한 번 듣고 바로 따라 부르시네요. 역시.”

“노래가 좋아서 그럴 거에요.”

“그런가, 그래서 엄마도 이 소절만 부르는 걸까요? 무슨 노랜지 가르쳐 달라고 해도, 웃으시기만 하고.”

“아빠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저씨도 별 수 없었을 거에요. 어쩐지 미발표곡 같거든요.”

찾다 찾다, 이곳까지 왔겠지. 인터넷의 바다에서도, 대중의 기억 속에서도 없는 곡이라면, 역시 미발표곡이거나, 발표가 되었지만 긴 시간 속에서 먼지처럼 흩어졌거나. 

무지하게 설레는 외모지만, 어쩐지 남동생 같은 느낌이라, 오늘 만난 사이인데도, 쉽게 편해졌다. 그도 그런가, 연달아 노래를 부른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이런 거겠지. 버스킹을 하고 나서도, 또 기타를 집어드는 거. 


“목소리에 비해, 기타가 약한데?”

아, 아저씨! 경비 옷을 벗은 아저씨는 정말이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혹시 뱀파이어세요? 

“한 번 와보래서,”

“잘 오셨어요. 이 기타, 소리가 정말 끝내줘요.”

눈치 빠른 테리우스가 기타를 아저씨한테 건넨다. 첫음절부터 다르다. 같은 기타인데, 어쩜 저런 소리가 나는 것일까. 기타가 아니라, 아름다운 짐승 한 마리를 조련하는 것 같다. 더 앉아서 듣고 싶지만, 손님을 그냥 둘 수는 없는 법, 얼음을 띄운 홍초를 대령한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약과도 내온다. 


“조율 잘 했는데?”

“감사합니다. 근데 정말 잘 치시네요.”

“음악으로 밥을 먹고 살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이제는 늙어서 아무도 안 불러.”

“거짓말, 천 년 먹은 뼈다귀여도 이 정도 실력이면 제발 같이 하자고, 쫒아다닐 걸요?”

흥분한 테리우스가 열성적으로 들이댄다. 

“그러면 좋겠지만, 이제는 친구들이 다 은퇴했어. 그래서 나도 기타 대신 빗자루를 들고 있는 거고.”

말하는 내내 손에서 기타를 놓지 않는다. ‘피아노맨’이 손끝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아저씨, 저랑 다녀요. 돈도 별로 안되는 버스킹이지만, 엄청 재밌어요.”

“나랑 다니면 청년이 구려질 텐데?”

“아저씨 외모가 어때서요. 완전 꽃중년이구만, 분명 사람들도 좋아할 거에요.”

모자란 기타 소리를 이렇게 메우는 구나. 이렇게되면, 어딘가 경연을 나가도 좋은 조합인데? 

“대신 제가 영양제 챙겨드릴게요. 상비약도 드리구요. 뭐 필요한 약 있으면 말씀하세요.”

“약?”

“약사랍니다.”

흰 가운을 입고, 초코 퐁듀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손님들을 홀리죠. 벌써부터 둘이 시간을 조율한다. 음악은 역시 신비한 힘을 가졌다. 불과 몇 분 전까지도 우린 완벽한 타인이었는데, 이제 머리를 맞대고,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아저씨는 금요일에 쉬어서 테리우스가 그 날 아르바이트를 쓰기로 했다.

“은퇴한 약사님이 계시거든요. 부탁하면 들어주실 거에요.”

보아하니 오늘도 그분께 의탁하고 온 것 같은데? 


잠잠히 듣고 있자니, 두 사람의 목소리가 참 비슷하다. 중저음의 보이스도 그렇고, 부드럽게 울리는 소리도 그렇고, 깊은 숲속에 있는 나뭇꾼의 오두막, 막 불을 피운 아궁이처럼 따뜻하면서도 은근하고, 마음이 자꾸만 끌린다. 

“기타도 좋지만, 하모니도 좋을 것 같은데?”

더 넛츠의 ‘사랑의 바보’를 쳐본다. 테리우스가 속삭이듯 노래를 시작한다. 머뭇대던 아저씨도 곧이어 음을 얹는다. 역시 어울려.      


언제든 필요할 땐 편히 날 쓰도록 

늘 닿는 곳에 있어 줄 거야

어느 날 말 없이 떠나간대도

그 뒷모습까지도 사랑할래     


어쩐지 가슴이 찡해졌다. 이 가사가 이렇게 슬픈 가사였나? 나 뿐만이 아니라, 테리우스도, 아저씨도 공연히 눈물을 글썽인다.

“노래를 불러본 지 십 년은 된 것 같다.”

아저씨가 어색하게 웃는다. 

“노래도 엄청 잘하시네요.”

“비행기 그만 태워. 괜히 마음만 들뜨니깐.”

아저씨가 홍초를 비우고 일어선다. 새벽부터 나오셔서 일을 하셨을 테니. 피곤하실 거다. 

“오늘은 이만 가야겠다. 괜찮으면 약국 위치 알려줘. 가까우면 내가 퇴근 후에 갈게. 공연할 곡도 정해야 하고.”

“그거 좋겠네요.”

그가 명함을 건넨다. 응? 이름은 만복이여? 만복을 받은 얼굴이긴 하지만, 이미지와는 좀 안 맞는 이름 같다. 아저씨도 눈썹을 치켜올린다. 저만 그런 게 아니군요. 명함 뒷장에 친절하게도 약도가 나와 있다. 만복약국. 복 받으러 가야겠네.

“이 정도면 가깝네. 그럼, 내일 갈게.”

아저씨를 배웅하고, 만복이도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노래는 못 찾았지만, 온 보람은 있네요.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좋은 동료를 만났어요.”

“별 말씀을요. 참, 이 기타 가져가세요. 아저씬 둘 데가 없으시대요. 약국에 두면, 연습할 때 더 좋을 거에요.”

“아, 그래도 돼요?”

“네. 본래 아저씨 거거든요. 뭐, 주우신 거긴 하지만.” 

“아차차, 멤버를 찾은 것에 기뻐서 진짜 목적을 까먹고 있었네. 저 정말 기타 줄 사러 온 거 맞거든요.”

기타 줄이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여기저기 서랍은 뒤져본다. 아, 여깄다. 이 가격대로 받으면 되는 건가? 

“옛날 악보들도 어딘가 쌓여있을 거에요.”

“보물찾기를 해야겠네요.”

“방진마스크 쓰고 해요. 구석구석 먼지가 엄청 날 테니까.”

그가 기타 줄을 챙겨 들고 문을 나선다. 골목 끝에서 그가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맘에 맞는 사람을 둘이나 만났다. 이 크로바레코드에서. 아빠도 이런 우연들이 좋아서, 가게를 닫지 못한 거겠지. 


그릇들을 헹구고, 테이블을 닦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아까 문에 어른대던 그림자가 하니였을까. 손님이 있는 걸 알고, 그답게 조용히 피해줬을 것이다. 오늘이 아니어도 좋다. 내일이 있고, 모레가 있으니까. 지나가다 만날 수 있는 잦은 우연들 속에 우리가 있으니까. 가게는 아빠가 나갔던 그대로.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늘 감도는 복숭아 향과, 삼총사가 두고 가는 양식들. 그리고 나의 노래. 


넌 나여도 좋니? 곰씨가 아닌 나여도, 괜찮니. 오래된 음반들과 격자무늬 천장과 낡은 테이블과 누렇게 바란 건반에 묻는다. 난 너희라서 좋은데, 너넨 어때? 조명을 끄고,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오래된 추억들에 인사를 건넨다. 내일 또 보자. 그리도 또 내일도.     


몸이 축축 가라앉아서 늦잠을 잘까 했는데, 위층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결국 깼다. 배 밑창에 있는 것처럼 습하고 캄캄하다. 음악 듣기에 좋은 날이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악기 삼아 잔잔한 노래부터 튼다. 노래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간간히 묻히지만, 뭐 그래도 괜찮다. 오늘부터 봄봄의 리모델링. 많은 곳을 고칠 게 아니라서, 일주일 정도면 끝날 것 같다고 했다.


 소고기뭇국을 끓인다. 다진마늘과 함께 볶은 소고기에 물을 넣고, 무, 다시마, 파를 넣고 푹푹 끓인다. 국 간장을 조금 넣고, 후추는 듬뿍, 흰 밥을 말아 깍두기랑 먹는다. 이렇게 몸이 으스스한 날은 뭇국이 제일 좋다.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가게 문을 열 마음이 생긴다.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닦고, 빗물 덕에 미끄러울 입구에 매트를 깔고, 차양도 더 깊게 내린다. 얼마 전부터 가게 앞에 내놓은 화분들이 빗물을 머금고 반짝반짝 빛난다. 매직이가 손을 흔들며 지나간다. 학교에 가는 날이구나. 

“지각 아니야?”

“아직은, 이제부터 뛸 거거든.”

그가 싱그럽게 웃으며 달려간다. 바짓단이 벌써부터 빗물에 젖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게 젊음이겠지. 어딘가 젖어와도 전혀 아무렇지 않게. 

“일찍 일어났네?”

검정 우산을 든 준이 형이 맘모스 빵을 건네며 웃는다.

“그거 농담이에요. 먹을 거 안 사와도 돼요.”

“알아. 그래도, 폐를 끼치니까. 많이 시끄럽지?”

“견딜 만큼요. 차 한잔 하실래요?”

“그럼, 좋겠지만, 오후에 강의가 있어.”

“강의요? 대학에서요?”

“응, 초청 강의 같은 거야. 2학기 땐 임시로 자리가 날지도 모르고.”

“와, 대단하시네요.”

“운이 좋았어!” 

준이 형이 계단으로 뛰어 올라간다. 어디 그게 운으로 될 일인가요?  죽어라 노력한 결과겠죠. 그럼, 나도 노력을 해야지. 


청소를 마치고, 차분히 앉아 기타를 친다. 어설프게 만든 노래를 다듬고, 흠흠, 멘트도 챙겨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크로바에 와서 1인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새벽 1시. 방구석에 조용히 앉아 라디오를 시작한다. 가끔은 술에 취해서 나른한 목소리를 낼 때도 있고, 가끔은 졸음에 겨운 목소리를 낼 때도 있고, 그래도 몇 안되는 청자들이 좋아해줘서 꾸준히 하고 있다. 


비오는 월요일입니다. 항아리 뚜껑은 다들 닫으셨나요? 빨래가 밤새 젖어있는 건 아니죠. 아, 너무 낡고 진부한 멘트다. 요즘 항아리 뚜껑을 여닫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라디오를 듣고 자란 나는, DJ를 꿈꾸었다. 엄마와 살게 되면서, 기타를 치게 되면서 라디오를 끼고 살게 됐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가게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가 늘 흘러나온다. 시간이 날 때마다 멘트를 적고, 종종 사연도 받아서 읽어주고, 옛날에 써두었던 어설픈 자작곡도 불러본다. 가끔은 투고된 사연에 맞춰 개사를 하기도 한다. 오늘은 무슨 사연들이 들어올까. 오늘은 무슨 노래를 부를까 궁리하는 것도 큰 기쁨이다. 


비가 그친 거리는 잘 닦인 유리처럼 선명해서, 누군가 덧칠해 놓은 그림처럼 생생하다. 크림색 스니커즈에 빗물이 튀기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자꾸만 들뜬다. 풀밭에 클로버야, 화단에 패랭이야, 사뿐대는 이 마음을 잡아주렴. 


그가 입구에서 손을 흔든다. 정갈해 보이는 한식집이다. 며칠 안 본 새에, 더 잘생겨진 것 같기도 하고. 

“멀지 않았어?”

고개를 젓는다. 마음은 벌써 달려왔는걸. 예약해둔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기다린다. 그는 검은 슬랙스에 상아색 남방을 입고 있다. 머리가 벌써 이렇게 자랐구나. 이마를 가린 머리칼이 귀엽다. 더 어려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많이 보고 싶었구나? 눈을 떼지 못하네.”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하니

“삼 일째인가? 근데 오래된 것 같아.”

“나도. 그래서 불렀어. 점심이라도 꼭 같이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요즘 계속 야근이거든.”

소담스럽게 담긴 반찬들이 나온다. 돌솥에 지은 밥도 한 쪽에 놓인다. 그가 주걱으로 밥을 퍼서 내민다. 두 손으로 따뜻한 공기를 받는다. 네 심장처럼 따뜻하다. 눌어붙은 솥엔 물을 부어놓는다. 구수한 누룽지로 변해라. 얍.


“공사 시작됐겠네?”

“웅.”

시금치가 달다. 들기름에 구운 김이 바삭하다. 보글보글 된장찌개가 칼칼하니 좋다. 부침개도 따끈따끈 맛있다. 

“봄쌤이 수락하셔서 다행이야.”

그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턱을 괸 채 나를 본다. 밥은 핑계였나보다. 배는 나만 고픈 거고. 

“언제 들리고 싶으시대. 목소리는 처음 들어봤는데, 고우시더라.”


조카를 만나고 나서, 다음 날 직접 전화가 왔다. 성우처럼 고운 목소리라, 혹시 스팸인가 했는데, 봄쌤이어서 놀랐다. 오랫동안 방치를 해둬서 미안하다는 사죄와 함께 준이 형의 제안을 수락하겠다고 하셨다. 

“곰 씨한테 안부 전해줘요. 면목이 없어서 직접 연락은 못 하겠어요. 저, 언제 들려도 될까요? 두고 간 그림도 그렇고, 애들도 보고 싶네요.”

수화기 너머에서 그리움이 묻어나서, 나조차 먹먹해졌다. 언제든 오세요. 봄봄화실은 그대로니까요. 

“얼굴도 목소리만큼 고우셨어. 뭐랄까, 목련 같은 느낌이 드는 분이야.”

막 피기 전에 목련이 떠오른다. 청초하고 고운 느낌의 사람이겠구나. 

포근포근 계란찜을 떠먹는다. 집에서 한 거랑 다르구나. 심지가 없는 것이 체에 한 번 걸렀나. 부드럽고 짭조롬해서 맛있다. 


“늦은 밤도 괜찮아. 손님이 있어도 괜찮고, 보고 싶을 땐 언제든 들려.”

그건 아마도 내 마음. 그가 늦은 밤이라도 오길, 손님이 있는 아무 때라도 오길. 

“응. 그러려고.”

그가 싱긋 웃는다. 밥 먹을 때 이러기 있기야. 지금 나만 돼지처럼 먹고 있잖아. 님은 이슬만 드시나요?

“입맛이 없어?”

“아니.”

“근데 왜 안 먹어?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너 먹는 거 보느라. 밥 먹는 거도 예쁘네.”

눈을 흘긴다. 이건 반칙이야. 나도 그만큼 보고 싶었는데, 깻잎을 떼어 그의 밥그릇에 얹는다. 

“빨리 먹어. 나만 먹으니까 부끄럽잖아.”

그가 그제야 밥을 떠넣는다. 너 먹는 거도 예뻐. 총각무를 먹는 아삭 소리도, 후루룩 국을 마시는 소리도, 젓가락이 그릇을 부딪치는 소리도, 앙 하고 숟가락을 무는 소리도 다 예뻐.

 

새가 가지에 앉을 때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아이스아메리카노, 나는 자몽에이드. 분수대에서 튄 물방울들이 눈부시게 빛난다. 

“보통 실력이 아닌 것 같았어. 그래서 선뜻 못 들어갔어.”

기타에 몰두한 아저씨는 정말 멋있어 보였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런 에너지를 내뿜는구나 싶게. 심야 약국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연습하겠지. 어쩐지 부럽다. 나도 밴드를 했었다. 피아노를 치던 그 애와 기타를 치던 나, 그 애는 높고 청량한 음색이어서 내 목소리와도 어울렸다. 미애, 우리가 같이 부르던 그 곡을 훔쳐서 데뷔한 후엔 소식이 끊겼다. 그냥 달라고 해도 줬을 텐데, 어째서 그 애는 내가 만든 그 곡을 자신의 곡으로 속여서 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절박했을까. 그만큼 나를 버리고 싶었을까. 아이에게 쫓긴 비둘기들이 화르르 날아오른다. 노랑 모자를 쓴 아이가 꺄르르 웃는다. 우리도 저렇게 웃었었어. 세상물정 모르고, 음악만 좋아서.   

“언제 같이 보자. 금요일마다 버스킹을 한다고 했어.”

“좋아. 곧 밤 근무도 끝나니까.”


도서관 앞에서 헤어졌다. 같이 들어갔다간, 늦은 밤까지 그를 기다릴 것 같다. 그래도 좋겠지만, 약속이 있다. 미련은 호주머니에 접어서 넣어두고, 엄마네 미용실로 향했다. 평일 오후의 전철은 한산하다. 빈자리에 짐짝처럼 앉아 맞은편 창문에 눈을 둔다.

 우리가 만난 건, 고등학교 축제 때, 개인 참가자로 노래를 불렀었다. 청아하고 맑은 그 애의 목소리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마이크도 나빴고, 장내도 소란스러웠는데도, 그 애 목소리는 맑은 시냇물처럼 흘러 우리들을 적셨다. 덕분에 다음 순서였던 나도, 수월하게 무대를 마쳤다. 상 같은 건 없었지만, 분명 그 애가 1등이었다. 

다음 날, 미애가 교실로 찾아왔다. 막 급식실로 가는 참이어서 같이 점심을 먹게 됐다. 늘 붙어 다니던 안나도 함께. 

“같이 밴드 하자. 너 같은 목소리를 찾고 있었어.”

“선배, 기타가 필요해서 온 거 아니에요? 피아노로는 좀 부족하니까? 선배 목소리면 제이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선배였구나. 작고 아담해서, 동급생인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명찰 색깔이 다르다.

“기타는 주변에도 있어. 그리고 네 말대로, 내 목소리면 충분할지도 몰라. 하지만 심심해. 같이 얘기를 나누고 마음을 나눌 멤버가 필요해. 그리고, 제이의 음색이라면, 내 노래도 더 풍부해질 거고. 사람이 물만 마시고 살 순 없잖아. 빵도 먹어야 하고, 새콤한 쨈도 있어야 하고.”

머뭇대는 사이에 안나가 나섰구나. 나는 선배가 나를 눈여겨 봐준 게 고맙고 신기할 뿐인데. 안나는 밥 먹을 생각도 없이 선배를 쏘아본다. 

“네 생각은 어때?”

국을 휘젓던 손을 멈추고, 선배를 바라본다. 주근깨가 앙증맞은 코에 덮여있다. 동그란 단발머리가 귀엽다. 조금 치켜 올라간 눈엔 고집이 보이지만, 도톰하고 작은 입술이 그 이미지를 상쇄한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목이 흔들리는 목각인형. 시외버스에 붙어있었던가. 친구네 거실장에 세워져 있었던가. 딱 그 인형 느낌인데.

“좋아요.”

나도 음악을 얘기할 친구가 필요했으니까. 어쩜 내가 더 절실했을 거야. 음악은 나의 전부였으니까. 


“머리가 많이 자랐네?”

엄마가 돌아보고 웃는다. 고개를 끄덕이고 앉았다. 내 마음이 불행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보인다. 볕이 든 방에 먼지랑 머리카락들이 세세히 보이는 것처럼. 내가 행복으로 충만해서야 보이는 것이 있다. 엄만, 아팠던 거구나. 마음이 많이 아팠던 거였어. 그래서, 나를 대하는 눈빛도 마음도 텅 비어 있었나보다. 아빠와 있는 엄마는 어느 때보다 다정해 보여서 더 마음이 아프다. 나조차도 위안이 되지 않았을 거야. 

화려한 보자기를 쓴 손님이 가게를 나선다. 장을 보고 잠시 집안일도 하다가 시간에 맞춰 돌아오겠지. 손님이 나간 빈 자리에 앉는다. 사각사각 가위소리. 


엄마가 가위질하는 게 싫어서, 오래오래 거기 있는 게 싫어서, 나 말고 손님들이랑 웃는 게 싫어서, 그리고 엄마가 힘든게 싫어서, 항상 짧게 머리를 잘랐다. 안나가 허리까지 찰랑이며 머리를 기를 때 나는 늘 숏커트였다. 그게 나의 첫 반항이었는지도 모른다.  

“길러도 예쁠 것 같은데?”

아빠가 손님 머리에 능숙하게 중화제를 뿌리며 참견한다. 

“제이는 늘 이 머리야. 어릴 적엔 길러보라고, 그렇게 꼬셨는데, 통 말을 들어야지.”

“그야, 누나가 힘들까봐 그랬겠지. 여자애들은 아침마다 엄마가 빗겨주잖아. 땋아주기도 하고, 말아주기도 하고, 누난 그럴 시간이 없으니까.”

엄마의 눈이 동그래진다. 눈이 마주치는 게 싫어서 텔레비전을 보는 척했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에요. 곰씨는. 


“저녁 먹고 가지?”

“가게를 오래 비웠어. 올 손님도 있고.”

“잘 되나보네?”

“사람은 와. 돈은 안되지만.”

손님이 뜸한 틈에 엄마랑 짧은 대화. 곧 곰 씨도 합류한다. 

“봄봄은?”

“준이 형이 들어오기로 했어요. 밀린 월세도 형이 내준대요.”

“내가 아는 김 준?”

“네. 대신 화실에 있는 그림을 받기로 하구요.”

“잘됐네.”

“네. 그래서 그럭저럭 세금 내고 살 수 있게 됐어요. 그래서, 저도 이제부터 꿈을 꾸려구요. 노래도 부르고, 데뷔도 하고, 방송도 해보려고 해요. 먹고 사는 거 말고, 다른 것도 해보려고 해요.”

결국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왔나 보다. 공연히 울컥해서 잠깐 숨을 골랐다. 너무 어리광 같잖아. 나.

“이젠 좀 놀아도 되지.”

“노는 게 아니야, 꿈꾸는 거지. 오랫동안 밀려있던 꿈을 꾸는 거지. 제이는 충분히 그 자격이 있어.”

곰 씨가 어깨를 다독여준다. 빚쟁이 주제에 친절하긴. 쳇,

“참, 고등학교 친구가 찾아왔더라. 엄청 유명해졌는지 매니저까지 데리고 왔어. 근데 이름이 기억 안나네. ”

“소연, 텔레비전에 많이 나오잖아.”

그래, 소연, 내 마음이 소란스러워지는 그 이름. 그 앤 그 이름으로 데뷔했다. 

“꼭 널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

엄마가 거울 아래 서랍에서 명함을 꺼내 건넨다. 그 애의 명함은 아니고, 같이 일하는 매니저의 명함 같다. 

“네 연락처는 안 알려줬어. 인연이 끊긴 것도 이유가 있는 거니까.”

“응.”

“제이야,”

이렇게 은근하게 부르면, 죄지은 사람처럼 위축되는데, 곰 씨가 다정하게 나를 내려다본다.

“인간관계에도 유통기한이 있어. 아무리 친했던 사이라도, 언젠가는 다른 길을 가게 되어있어. 추억은 추억으로 묻어두고, 너는, 너의 길을 가도록 해.”

곁에 앉은 엄마가 고개를 주억인다. 다 말했구나. 그 애가 내 곡을 훔쳐서 달아난걸. 


마침 외출했던 손님이 돌아왔다.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또 놀러 올게요.”

고작 3cm를 잘랐다고 이렇게 가벼울까. 더 많은 걸 잘라낸 것처럼 마음이 가볍다. 산들산들 치맛자락을 흔들며 걷는다. 

터미널 앞 분식집에서 핫도그를 먹는데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인데?
  “제이 씬가요? 소연 씨 매니저입니다.”

이 집 핫도그는 저주가 씌였나. 먹을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네. 

“잠깐 시간 좀 내 줄 수 있을까요?”

아니, 그러고 싶지 않은데.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또, 또 문제의 빵집으로 들어갔다. 젠장. 저번이랑 똑같아! 앞으로 이 동네 올 땐 핫도그 가게를 피해서 다른 길로 가야겠다. 불안과 초조에 쫓겨 크림빵에 팥빵을 먹어치우고, 모카빵을 뜯고 있는데 매니저가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셨죠?”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굉장히 강한 인상의 사람이네. 눈썹도 진하고 턱도 다부지다. 

“제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나요?”

“아, 안나 씨라고 했나? 그분이 알려주셨어요.”

짜증이 확 밀려온다. 안나도 그렇고, 미애도 그렇고, 다 제멋대로야.

“용건만 간단히 하시죠. 곧 버스가 와서요.”

그가 당황스런 표정을 짓는다. 유명한 가수의 매니저가 이런 취급을 받는 건 처음이려나. 

“소연 씨가 제이 씨 곡을 듣고싶어 해요. 제이 씨한테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고. 예전에 밴드도 같이 했었다면서요. ”

속살이 포근포근한데다 건포도가 많이 들어있어서 맛있다. 그래, 나는 빵순이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었어. 엄마도 이 모카빵을 엄청 좋아한다. 

“서정적이고 시적인 노래가 많다고 들었어요. ”

이 맛있는 빵에 나쁜 추억을 심고 싶지는 않다. 그럴 바엔 기억을 바꾸겠다. 

“전, 함께 하고 싶지 않아요.”

“제이 씨한테도 분명 좋은 기회에요. 데뷔할 수도 있고. 소속사가 생길 수도 있고. 제이 씨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닌데, 평생 버스킹만 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뜯고 있던 빵을 내려놓았다.

“데뷔를 한다면, 제 힘으로 해요. 누구의 빽으로 하지 않아요. 남의 이름을 등에 업고 데뷔할 거면, 안 하는 게 나아요. 그건 진짜 실력이 아니니까.”

“하지만,”

“제가 나온 건, 혹시 그 애가 사과를 할까 싶어 나온 거에요. 그 애에 대한 나쁜 기억이 나만의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 근데, 아니었네요.”

빵가루를 탈탈 털고 일어섰다. 선불로 계산해서 다행이다. 이로써 모카빵의 추억은 지켰다. 


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매니저인지도, 미애인지도 모른다. 아빠의 말대로 인간관계엔 유통기한이 있다. 우리의 기한은 너무나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할 만큼 상한 내용물로 무슨 요리를 만들 수 있을까. 모두 엉망이 되고 말 거야. 

앱에 접속하고, 전화번호 바꾸기를 눌렀다. 십 년 넘게 써왔던 전화번호를 단 몇 분 만에 바꿨다. 몇몇 사람에게 바뀐 연락처를 문자로 남겼다. 잘린 머리카락만큼이나 개운하구나. 

‘갑자기 번호는 왜?’

하니의 문자. 

‘인간관계 좀 정리하려고’

‘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네? 휴,’

‘영광으로 알아.’

‘네, 네, 아직 밖이야?’

‘응, 이제 귀가 중.’

‘이따 들릴게.’

‘응’

안나는 보류 중이다. 비극과 치정은 끝까지 봐야 재밌을 것 같아서. 

핸드폰을 만지작대는 동안 버스가 정차했다. 밤의 터미널은 낮보다 더 활기 있다. 고향에서 바리바리 싸 온 짐들이 부려지고, 노모가 아들을 만나고, 먼 데서 온 지인이 손을 흔든다. 이제 나도 집으로 돌아간다. 달팽이 집처럼 나한테 꼭 맞는 그 집을 향해. 


“제이 혼자 술 사는 건 처음 봤네?”

순이 언니가 바코드를 찍으며 놀란다. 저 굉장한 술꾼이라구요.

“아주머니는요?”

“요즘 푹 빠진 드라마가 있거든. 그거 보러 들어갔지.”

“언니는 요즘 괜찮아요?”

“응, 인테리어 문제로 준이랑 옥신각신 하는 거 말곤 괜찮아. 고칠 거면 싹 고치지, 왜 창고만 손 본다고 하는 건지. 애초부터 난, 거기가 방이 되는 게 싫다고. 창고에서 자는 기분이 들 거 아니야.”

“아늑하고 좋을 것 같은데. 좀 어둡긴 할까요?”

“그래, 거기서 지낼 거면,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나아.”

허허, 이참에 데릴사위로 들일 작정 같은데.

“참, 맛있는 오징어 들어 왔는데, 서비스로 줄 테니까 하나 먹어봐.”

누구 맘대로 서비스인가요. 정말이지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맡겼네.

“감사합니다. 이따 심심하면 들리세요.”

“아니, 안 들릴 거야. 인테리어 끝날 때까지 거긴 안 가기로 했어.”

단단히 토라지셨네. 말은 저렇게 해도, 결국 호기심에 올 거면서. 손을 흔들고 가게를 나왔다. 


오늘은 오랫동안 가게를 비웠구나. 삼총사 아주머니들도 나땜에 심심했겠다. 내일은 준이 형에게 받은 맘모스 빵으로 선처를 구해야겠네. 세탁기를 돌리고, 방을 훔친다. 쿠션을 팡팡 털고, 소세지 야채 볶음을 만든다. 피망이랑 양파는 네모 모양. 같은 크기로 썰고, 당근은 맛없으니깐 조금만, 소세지에 칼집을 내고, 기름을 두른 팬에 달달 볶다가, 케찹과 고추장을 넣는다. 저민 마늘을 넣어도 맛있다. 마늘 대신 오늘은 파채를 올렸다. 반질반질 맛있는 소야 완성! 다음은 계란말이다. 돌돌 계란을 말고 있는데, 하니가 왔다. 마음이 통했는지, 그도 캔 맥주를 들고 왔다.

“맛있는 냄새.”

“세팅 부탁해.”

“네.”

마지막으로 오징어를 굽는다. 마요네즈와 간장, 청양고추를 종종 썰어서 섞는다. 찍어 먹을 소스까지 완성. 한쪽에 고추장도 조금. 전, 취향을 존중하니까요.  

소박한 술상이 완성됐다. 그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캔을 딴다. 

“몇 명이나 청산 한 거야?”

“백 명쯤?”

“아, 단두대의 이슬로 그 많은 인연이 날아갔구나.”

그의 허풍에 웃는다. 소세지가 뽀득뽀득 씹힌다. 피망이 아삭아삭 씹힌다. 내 마음도 따라서 가벼워진다. 

“매직이는 요즘 미친 듯이 공부해. 이번 시험에 꼭 붙으려고, 작정을 했어.”

“공무원시험? 9급이랬나?”

“응, 세월아, 네월아 공부하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근로장학생도 그만 둘거래. 정말 공부에만 매진할 건 가봐.”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던 몽이 언니가 발걸음을 끊은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취직할 때가 되긴 했지.”

“응,”

그가 오징어를 찢는다. 그럼, 난 땅콩이나 깔까. 


“어, 손님이 있었네요?”

만복이가 기타를 들고 등장한다. 그 뒤엔 아저씨. 

“제이의 조언이 필요해서 말이지. 밤이 늦었는데도 염치불구하고 왔어.”

“괜찮아요. 앉으세요.”

둘이 있는 게 더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괜찮다. 하니와 함께라면, 다 좋다. 그는 좀 어색한 표정이지만.

“여긴 제 남자친구. 하니에요.”

그제야 표정이 풀린다. 

“앗, 남친이 있었어요!”

“네.”

하니가 뽐내는 표정을 짓는다. 100m 달리기에서 일등이라도 한 표정인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건넨다. 한 모금씩 들어가니깐 금세 친해진다. 역시 한국인은 술로 대동단결인가.


“맥스가 자꾸 기타만 친다고 하잖아요.”

맥스? 그게 아저씨 이름인가?    

“나 같은 노땅은 뒤에서 받쳐주기만 해도 돼.”

“노땅이 어딨어요. 음악에!”

“억지로 하모니를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메인은 만복 씨가, 아저씬 혼자 채우기에 부족한 부분에 힘을 실어주세요. 코러스도 좋고, 기타 솔로도 좋아요. 그러다 보면, 두 분에게 꼭 맞는 노래를 찾을 수 있을 거에요.” 

“흠, 무조건, 같이 부를 필욘 없다는 거구나.”

“메인은 있되, 하모니가 자연스러워야 해.”

“역시 제이에게 오길 잘했어.”

맥스 아저씨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계란말이를 먹는다.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지 않아서, 자신감이 떨어지셨을 거다. 예전만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도 모르고, 처음부터 너무 몰아붙이진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시작하는 것만큼, 결심해야 할 것도, 넘어서야 할 것도 많을 테지. 


“첫 공연은 어디서 하나요?”

“음, 요 앞 그린공원에서 하려고. 구청에 물어봤더니, 해도 괜찮대.”

“꼭 구경 갈게요.”

“이거 벌써 부끄러운걸.”

“무슨 말씀을, 전, 벌써 기대되는걸요.”

두 사람의 첫 공연을 꼭 보고 싶다. 어쩐지 닮은 듯 하면서도, 다른 두 사람의 하모니가 듣고 싶다.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게 분명한 듯, 목소리가 조금씩 허스키해졌다. 눈빛은 더 생생해졌고. 


“밴드 이름은 정했어요?”

“반창고클럽이라고 하려구요. 다친 마음에 반창고를 발라준다는 의미에요.”

“약사랑 딱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맥스의 아이디어에요.”

맥스 아저씨가 쑥스럽게 웃는다. 어디가 닮았나 했더니, 두 사람은 웃는 모습이 똑 같구나. 입꼬리가 내려가면서 수줍게 웃는게 닮았다.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믿겠네.

“괜찮다 싶으면 경연도 나가보려고 해요. 저야 초짜지만 맥스는 경험이 있으니까, 분명 도움이 될 거에요.”

“강산이 몇 번 변했는데. 내가 무슨 도움이 돼.”

또 둘이 옥신각신. 하니도 즐겁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다. 그도 나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괜찮을까. 공연히 마음이 설레인다. 


앗, 이렇게 떠들고 놀다보니 라디오 방송을 할 때다. 어쩌지. 달뜬 목소리는 감출 수 있을 것 같은데, 반창고 밴드도 그렇고, 하니도 그렇고 헤어지기 싫은데. 

“안녕하세요. 크로바 봄봄입니다. 오늘은 느닷없이 게스트가 있네요. 이 고요한 밤에 불편하시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외모도 노래도 너무 출중한 분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카메라 필터로 거른 우리들의 얼굴은 다행히 뽀얗고 예쁘다. 만복이의 외모를 알아본 시청자들의 반응도 꽤 괜찮은 편. 종종 보이는 라디오를 해야겠다. 그닥 좋은 장비들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쓸 만하네. 

나 대신 하니가 사연을 읽어준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그 목소리가 마음에 스며든다. 가끔 초대손님으로 불러야 겠다. 


댓글 창에 신청곡이 올라온다. 이 느닷없는 게스트에 금세 적응한 시청자들이 나 대신 반창고 밴드에게 곡을 신청한다. 

흠흠, 목을 가다듬고, 만복이가 노래를 부른다. 맥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타. 정말 환상의 짝궁이라니까.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혼자 하는 것보다 역시 게스트가 있는 게 좋구나. 댓글창의 반응도 뜨겁다. 

“언제부터 시작한 거야? 1인 방송은?”

얼굴이 상기된 하니가 묻는다. 아무래도 오글거렸나보다. 

“크로바 와서 얼마 안 됐을 때. 지금은 구독자가 많이 늘었어. 처음엔 나 혼자 중얼거렸거든.”

“엄청 재밌네요! 다음에 또 불러줘요!”

만복이가 흥분해서 외친다. 정말 그래야겠다. 벌써 팬이 생긴 것 같으니까. 이로써 나의 작은 비밀이 들통났네. 아무에게도 얘기 안 할 작정이었는데.  

 “난 그만 가야겠다. 내일 일찍 근무거든.”

남은 술을 마저 들이키고 맥스가 일어난다. 만복이는 좀 더 있고 싶은 눈치. 다 같이 맥스를 배웅한다.

“내일은 쉬고, 모레 들려요. 이러다 둘 다 목이 갈 것 같으니깐.”

“그래, 에반스나 잘 지키고 있어.”

에반스? 그건 또 누구냐?

“아, 기타 이름이에요. 이름을 붙여줘야, 더 잘 쳐진대요.”

맥스가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고맙다는 얘기하려구요. 맥스 앞에서는 좀 쑥스러워서. 제이 덕분에 소울메이트를 만난 것 같아요.”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인연 때문일거에요. 제가 한 일은 그저 크로바를 지킨 것 뿐. 

“벌써 소울메이트에요?”

“네. 어떨 땐 아버지 같고, 어떨 땐 형 같고, 어떨 땐 친구 같고, 정말 좋아요. 노래를 안 부르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만 빼면요.”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시간이 필요할 거에요. 그간 음악을 놓고 사셨으니까.”

“네, 그러려구요.”

그가 씩씩하게 말하고 하니 쪽을 흘긋 봤다. 

“데이트 방해해서 미안해요. 근데 좀 억울하네요. 남친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그건 좀 위험한 발언인데? 하니가 맥주를 마시다 말고 콜록콜록 기침을 한다. 

“산더미 같은 소녀팬들을 두고 그런, 바람둥이 멘트는 그만 두시죠.”

“넵! 산더미처럼 생길 소녀팬들을 생각하면서 이 마음을 접을게요. 그럼, 즐기세요!”

만복이가 하니를 향해 씩 웃고는 가게를 뛰쳐나갔다. 참으로 극적인 퇴장이다.


“며칠 안 온 사이에, 이상한 동물을 들였네?”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이 질투가 분명한데?

“좀 귀여운 짐승이긴 하지.”

“내 허락 없이 아무거나 들이지 마.”

그게 마음대로 돼야 말이죠. 장사가 아무리 안된다 해도, 가게는 가게니까요.

“조심하겠습니다.”

그제야 그가 웃는다. 마지막 남은 계란말이를 먹고 그가 일어섰다. 그도 내일은 이른 출근. 내일이 지나야 야근도 끝이 난다. 바로 가도 될 텐데, 접시를 옮기고, 설거지를 한다. 그 다정함이 좋아서 나도 어리광을 부린다. 설거지하는 그의 등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는다. 따뜻하고, 두근거려서 좋다.

“잘자.”

“응.”

그가 가볍게 나를 안았다 놓아준다. 지금은 이 거리가 딱 좋다. 두근거리고 설레는 이 거리. 그를 배웅하고 가게 문을 닫았다. 

나쁜 일도 있었지만, 좋은 일이 더 많았으니까. 오늘은 좋은 날. 분명 내일은 더 좋을 거야. 꿈꾸는 내가 있어서. 하니, 네가 있어서.    


한밤, 매직이가 문자했다. 

‘안나가 네 번호 묻던데? 가르쳐줄까?’

‘아니, 내가 나중에 알려줄게.’

‘그럴 줄 알고, 나도 모른다고 했어. 잘자.’

그는 이 시간까지 열공 중인가 보다. 참으로 사랑의 힘은 위대하구나. 한량 기질이 다분한 매직이까지 저리 변하게 만들다니. 그래도 그가 없으니까 좀 허전하긴 하다. 시험에 찹쌀떡처럼 처억 붙어서 빨리 놀러 왔으면 좋겠다. 


내일은 노래 교실에 가는 날, 지금 나의 직업은 이것. 아빠가 물려준 이 일을 열심히 해야지. 할머니들이 좋아하실 노래들을 몇 곡 추가로 골라놓고 기타로 쳐본다. 음, 어려운데, 내일은 아무래도 반주기의 힘을 빌어야겠다. 신나는 곡이니까, 댄스 타임도 좀 갖도록 하고. 할머니들도 좋아하시지만, 나도 노래하는 그 시간이 너무 좋다. 가끔은 트로트로 전향해야 하나 싶게. 은근 이 목소리가 잘 어울린단 말이야.      


#크로바레코드 #달달로맨스 #순정소설 #웹소설 #완결소설연재중 #첫사랑 #봄봄화실 #하니와제이

작가의 이전글 크로바레코드 1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