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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Jun 02. 2023

크로바레코드 18

18. 유통기한이 임박한 그녀-H


어, 지원이다. 아는 체를 하려다 말았다. 지원이 가족은 막 패밀리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먼저 들어간 엄마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라있다. 지원이는 한 뼘 더 자랐고, 더불어 여드름도 송글송글 돋아나 있었다. 불안해 보였던 눈빛도, 주눅 들은 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아, 안심이다. 다행이야. 이제 내가 필요하지 않아서. 그래도 언제든 들러. 가끔은 너랑 목욕을 했던 그때가 그리우니까.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전화가 왔다. 시험을 끝낸 매직이는 옛날로 돌아가 걸핏하면 술자리를 만들어낸다. 너 그러다가 우리 누나한테 맞는다.

“왜?”

“여기 병원인데, 빨리 와봐.”

병원?

“누가 다쳤어?”

“안나가,”

“안 가.”

“널 찾아.”

“그래서 더 안 가.”

“자살하려고 했어.”

“나 때문이야?”

“그건 모르겠어. 근데 널 찾아.”

수런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병실인가 보다. 아마도 안나와, 그녀의 부모님이겠지. 대체 매직이는 무슨 생각으로 전화를 한 걸까. 시킨다고 그냥? 그럼 내가 난처해지는 걸 모르는 걸까. 병원 앞 공원에서 매직이를 만났다. 


“여기까지 왔으면 들어오지.”

“네가 마당발인 건 알겠는데, 자꾸 나까지 끌어들이지 마. 난 걔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

“하니야. 이번만 봐줘라. 죽었다가 깨어난 애야. 그렇게 널 보고 싶어하는데. 한 번 가봐.”

너는 너무 정에 약해. 

“이번만이 아니면.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날마다 손목을 그으면. 그건 누가 책임지는데.”

“너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는 몰라.”

“그 딴 거 상관없어. 이렇게 자살소동 일으킬 때마다 불려와야 하는 게 싫을 뿐이야.”

“너, 정말 다른 사람 같다.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러는데, 안나한테는 왜 이렇게 냉정해.”

그건 나도 모르겠다. 목소리만 싫다면, 귀를 막으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 본능적으로 싫은 건지. 전생에 엄청 난 악연이라도 됐나. 

“어, 안나네 어머니시다.”

매직이를 따라 엉거주춤 일어났다.

“미안해요. 대화하는 데 방해해서. 그래도 한 번 보고 가면 안 되겠어요? 안나가 너무 기대하고 있어요. 부탁할게요.”

이런 건 반칙이다. 매직이가 쩔쩔매며 따라나선다. 

“너, 인간관계 정리 못 하면, 매형이고 자시고, 다 된 줄 알아.”

나지막한 협박에 매직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얼굴이 파리한 안나가 침대에 앉아있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데, 도무지 웃어주지를 못하겠다. 

“와줬구나.”

아무 대답 없이 그 앨 바라본다. 네가 사랑하는 건, 정말 내가 맞을까. 소유할 수 없어서, 더 갖고 싶은 환상 같은 내가 아닐까. 

“이렇게 오라고 해서, 화났지. 그래도 너무 보고 싶어서.”

아무런 화답을 해줄 수 없어서, 멍청히 서 있었다. 정말 네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꼭두각시 같은 내 모습에 매직이가 되려 당황한다. 

“하니가 많이 놀랐나 봐.”

나 대신 조잘조잘 말을 하는 녀석,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제발 끌려다니지 좀 마.

“그럼, 얘기들 나눠요.”


안나의 어머니가 음료수를 나눠주고 나갔다. 안나는 내 얼굴만 바라볼 뿐 숨을 죽인 채다. 혼자 떠들어대던 매직이도 지친 듯이 말을 멈춘다. 그래, 내가 기다려온 침묵이다. 시계바늘이 느리게 지나가고, 나무들 그림자는 점점 길어진다. 공원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 점등한다. 제이는 뭐하고 있을까.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포프린 향이 나는 빨래를 널고 있을까. 

“예전처럼, 얼굴 보내고 지냈으면 좋겠어. 밥도 같이 먹고, 영화도 같이 보고, 여행도 같이 가고.”

바늘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든다. 같은 동아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절대 만날 일이 없었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졸업한 이상 더는 널 만날 일이 없어. 

“제이랑 함께 다녀도 좋아. 우리 셋 다 친구잖아.”

나랑 제이 사이에 끼지 마. 네가 제이 친구인건 어쩔 수 없지만, 우리 둘이 있을 땐 제발 나타나지 마.


“안나야, 이제 더는 하니를 괴롭히지 마. 오늘도 내가 끌고 온 거지. 하니는 여길 올 생각이 없었어. 다음번엔 네가 무슨 짓을 해도 하니는 안 올 거야. 하니는 널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 네 목소리가 송곳처럼 들린대. 네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겁대. 그래서 널 만나는 게 싫대.”

매직이의 말에 안나의 눈이 커진다. 시트를 잡은 손이 떨리고, 가녀린 어깨도 떨린다. 

“난, 하니를 놔줄 수 없어.”

“그건 어리광이야. 하니의 마음이 다른 데 있다는 거 너도 알잖아. 그렇지 않다해도, 하니가 널 좋아할 일은 없어.”

“왜! 난 돈도 많아, 그리고 예뻐! 하니가 원한다면, 집도, 빌딩도 사줄 수 있어. 제이가 못 해주는 것들, 내가 다 해 줄 수 있어.”

“그게 네 진심이야?”

“아니야! 아니야! 난 정말 하니를 사랑해!”

더는 매직이를 볼 수가 없다. 이렇게 흥분한 매직이를 처음 본다. 

“그만 됐어. 잠깐만 나가 있어. 나도 금방 갈게.”

매직이가 씩씩대며 나간다. 안나는 여전히 나만 바라본다. 누구도 그런 집착은 견뎌내지 못해. 그건 사랑이 아닐 거야. 네 욕심이면 모를까.


“네가 이러면 이럴수록 난, 더 꽁꽁 숨을 거야. 매직이도 안 만날 거고, 동창회도, 동아리 모임도 다시는 안 나갈 거야. 사서 일도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버릴 거야. 영영 네가 찾지 못할 곳으로 숨어버릴 거야. 제이랑 함께.”

“하니!”

“넌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해. 이렇게 덧없고 허무한 사랑 말고, 널 정말로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 그게 아니라면, 네 돈이라도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 난 너와 관계된 그 무엇도 필요 없으니까.”

“하니야!”

“우연히 만난다면, 인사할게. 이렇게 억지로는 말고. 그러니까, 잘 지내.”


울부짖는 안나를 두고, 병실을 나왔다. 링겔을 빼어 던지고, 슬리퍼도 신지 않은 안나가 정신없이 달려와 안긴다. 정말이지 무섭고, 징그럽다. 안나의 어머니가 안나를 말리고, 의사가운을 입은 중년의 사내도 안나를 말린다. 주치의인가. 아니, 안나랑 많이 닮은 모습이 가족임이 분명하다. 

“얘가 대체 왜 이래!”

“하니야, 내 하니라고, 제이 따위한테 안 줄 거야!”

“제이? 너 아직도 제이랑 다니니?”

“제이라면, 각막을 이식한 그 애 말하는 거냐?”

“아빤 몰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빠였구나. 그리고 제이는 각막을 이식한 적이 있구나. 


가족의 만류 덕분에 안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쪽도 이쪽도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지만, 이대로 헤어지는 게 맞다.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매직이가 초조하게 공원을 서성대는 모습이 보인다. 

“미안, 나도 이렇게 불러내긴 싫었는데, 안나네 아빠랑 엄마가 간청을 하는 바람에.”

“아빠가 의사네?”

“의사기만 하냐? 이 병원, 병원장이야.”

어마어마하네. 

“안나가 저렇게 어리광쟁이인 것도 이해할 만하지. 무남독녀라더라. 어찌나 귀하게 자랐는지, 해달라는 거 다 해줬나 봐.”

그래서 날 그리 소유하고 싶어했나 보네.

“나도 이제 슬슬 관계를 정리할까 싶어서. 네 말대로 인간관계 정리해야지. 학교 동아리도 좀 접고. 그래야 결혼생활도 순탄할 것 같고.”

“매형. 이제야 그걸 깨달으셨군요.”

녀석의 표정이 달덩이처럼 환해진다. 윽, 얄미워. 

마음의 짐을 털어버릴 겸, 역 앞 호프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전화가 왔다. 매직이의 전화였지만, 결국 내가 받았다. 안나의 아빠. 잠깐 볼 수 있냐는 말에, 호프집 위치를 알려 주었다.

한 잔을 다 먹기도 전에 안나의 아빠가 왔다. 


“좋은 시간 보내고 있는데 미안하군.”

“아닙니다.”

아무리 안나가 싫은들, 그녀의 부모까지 싫어할 필요는 없겠지.

“자네는 안나를 어떻게 생각하나? 좋은 감정이 맞긴 한가?”

한숨이 나온다. 아까의 사투를 봐도 나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을 텐데.

“안나는 응석받이야. 우리가 그 앨 그렇게 키웠지. 다 우리 잘못이네. 좋아하는 남자를 볼 수 없다고, 목숨을 버릴 생각까지 하다니. 정말이지, 황당하네.”

가장 마음이 아팠을 사람은 결국 부모겠지. 그토록 애지중지 키운 딸이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죽으려고 했다니. 가슴이 분명 미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어리광으로 되는 게 아니지. 우리 안나를 다시 키워 볼 생각이네. 몸이 낫는데로 유학을 보낼 거야.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꿈을 갖고 살게 된다면, 그 애도 바뀔지 모르지.”

“좋은 생각이시네요.”

“역시 자넨 미련이 없군.”

“네, 죄송합니다.”

“그럴 거 없어. 미안한 건 우리니까.”

시킨 맥주엔 입도 대지 않고 그가 일어선다.

“저…제이를 아시나요?”

“제이? 자네도 그 애를 아나?”

“네.”

“제이는 안나의 제일 친한 친구였어. 안나가 정말 좋아했지. 아마, 자네를 좋아하는 것처럼 좋아했을 거야. 그 애가 다른 친구를 사귀는 걸 시샘할 정도로. 우리 애 참 못 됐지.”

매직이는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고, 나는 안주를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술은 진작에 미지근해졌다. 


“그 애가 각막을 이식한 것도 아마, 우리 딸이랑 관련이 있을 거야.”

“그래서 눈 색깔이 다르구나.”

“아마도 이상 반응이 좀 있었거나. 이식받은 쪽 각막이 좀 혼탁해졌거나, 그랬을 거야.”

“제이는 어쩌다가 각막을 다친 겁니까?”

“누군가 육교에서 밀었네. 가로수 가지치기를 한 뒤였는지, 바닥에 잔가지들이 많았다고 하네. 제이는 그 가지에 한 쪽 눈이 찔렸어.” 

“안나가, 제이를 민 건가요?”

“그건 아니야. 그 시간에 안나는 피아노 학원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건의 배후일 것 같은 느낌은 있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는데, 안나가 먼저, 제이를 살려주라고 했거든. 아무래도 제이가 죽으면 너무 심심할 것 같다면서. 그 땐 나도 제이가 병원에 실려 왔다는 건 몰랐을 때야.”

정말이지 지독한 이야기다. 어째서 이 사람은 안나의 치부를 이렇게 드러내는 것일까. 있지도 않은 정마저 떼어내서, 접근을 못 하게 하려는 건가. 그렇다면 아주 잘하고 있는 거에요.

“난, 안나가 아주 외로워졌으면 좋겠어. 엄마도 아빠도 없고, 친한 친구도 없고, 의지할 건 아무것도 없는 세상으로 가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했으면 하네. 돈도, 인맥도 소용없는 곳으로 가서 말이야.”

“가려고 할까요?”

“갈 거야. 여기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경제적 지원을 끊을 테니.”

돈이 없는 안나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건 근두운 없는 손오공이나, 머리 밀린 삼손과도 같다. 

“지금은 안나의 엄마를 설득 중이야. 혼자 못 보낸다고 하면, 엄마라도 같이 보낼 거네. 영어라곤 땡큐 밖에 모르는 여자라,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지만.”

안나하고 말하는 건, 지독하게 피곤했지만, 그 애의 아빠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대체 누구를 닮은 것일까. 아직 떼를 쓰는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그가 술값을 계산하고 나갔다. 내내 침묵하던 매직이가 한숨을 내쉰다. 잘 참았다. 


“뭔가, 엄청난 걸 들어버렸네.”

“그러게.”

미지근한 맥주를 물리고, 소주를 시켰다. 오늘은 독주가 필요해. 내 팽팽한 신경을 느슨하게 해줄.

“정말 안나가 유학을 갈까?”

“버티겠지. 하지만, 결국 갈 거야. 그 애를 키운 게 8할이 돈인데, 그거 없이 어떻게 견디겠어.” 

매직이가 큭큭큭 웃는다. 나도 너처럼 가볍게 웃고 싶다. 안주로 시킨 부대찌개가 나왔다. 매직이가 라면사리를 뽀개서 넣는다. 

제이는 안나의 그런 점들을 알면서도, 지금껏 견뎌온 걸까. 전화번호를 송두리째 바꾼 것도 다 안나 때문이었겠지. 제이는 크로바에서 다시 시작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인간관계도 마저 정리하고 싶었을 거야. 어제 봤는데도, 너무 너무 제이가 보고 싶다. 그래도 술 취한 모습은 보여주지 말아야지. 

“제이 생각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

“어?”

“그렇게 멍 때릴 땐, 제이 생각하는 거잖아!”

넌,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그만, 사라져줘야겠어. 녀석에게 펄펄 끓는 두부를 덜어준다. 매직이가 성급하게 두부를 삼키다가 가슴을 쥐어뜯는다. 지금 식도를 점령 중이니? 펄펄 두부야? 


길거리에서 블레싱의 노래가 들린다. 블레싱과 하모니를 맞추는 제이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그렇게 고생해서 경연에 나갔으면서, 이렇게 변방으로 밀려나다니. 정말 욕심도 없다. 뭐, 그래도, 저작권이 있으니까, 괜찮은 걸까. 

“블레싱이랑 같이 밴드를 했으면 네 가슴도 찢어졌을걸?”

내 심정을 눈치 챈 매직이가 한 마디한다. 그래, 나도 알아! 고작 여름 한 철을 못 봤는데도 가슴이 아팠으니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야. 제이도 꿈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제이는 제이만의 속도가 있으니까. 열심히 응원이나 해줘.”

다 안다고! 공연히 심술이 나서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크로바 레코드는 어둠에 잠겨있다. 일찍 잠이 든 것일까. 늦게 어디로 간 것일까. 얄미운 누나와 매직이는 가로등 앞에서 부둥켜 안고 서있다. 어디 뜨거운 물 한 양동이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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