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ion Essay
인생은 당연히 태어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세상의 여러 갈래 길을 가다가 마지막은 죽음으로 인생이 끝난다. 시작과 끝은 누구나 다 똑같다. 그 걸어온 길이 다를 뿐이다.
<그림으로 본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왜 <요람>으로 출발했는가? 인생이 태어나고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님을 암시했다. 생명이 잉태됨<희망II>을 중간에 둠으로써 인생의 순환을 알리고자 했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신생아 시기인 <1. 요람>의 시절은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그림 감상의 출발을 편안하게 시작하자는 의도이다.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인상주의 작품을 앞 순서에 두어 미술에 대한 접근을 쉽게 했다. 인상파에 대한 사랑은 고흐의 <2. 첫 걸음>으로 이어진다.
태어난 아기가 첫 발짝을 뗄 때까지, ‘부모’로 새롭게 태어난 부모도 엎치락뒤치락하는 시간을 보낸다. 태어난 아기처럼 서툴기는 마찬가지다. 아기가 제 발로 서고 첫 발짝을 뗄 즈음, 그제서야 제법 능숙한 부모가 된다. 아이는 놀면서 큰다. <3. 놀고있는 클로드 르노와르>는 육아에 지친 부모에게 잠시 쉼의 시간을 준다. 놀이에 열중하여 발그레한 뺨은 ‘뽀뽀’를 부른다. 지그시 끌어안아주고싶다. 아이가 걸어가야할 다음 길은 <4. 마을 학교>다. 여럿이 함께 노는 법을 터득하고, 앞으로 가야할 길에 든든한 길잡이가 될 지식을 긁어모은다.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고 다진다. 엄마 아빠 형 누나 동생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5. 모임>이 이루어진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모임은 길 없는 곳에 징검다리가 돼주기도 하고, 가는 길을 가로 막기도 하고, 손을 맞잡고 함께 걷기도 한다.
여린 싹이 쑥쑥 자라 반목질화되면 더 많은 햇빛이 필요하다. 좋은 영양소를 공급해줘야 한다. <6. 아테네 학당>은 가장 질 좋은 영양소이다. 세칭 “스카이 SKY” 보다 한발 더 앞선 전세계 랭킹 1위의 학교다.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다. 천년 넘는 세월을 지나왔어도 녹슬지 않은 지혜가 그곳에 다 모여있다.
지식을 캐내고자, 지혜를 익히고자 밤을 밝히던 시절을 보내며 <7. 젊은 커플>이 되었다. 가장 멋진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오브제는 역시 가장 멋지게 보인다. 다채로운 색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마법의 안경을 쓰고 있는 동안은 말이다. <8. 더 이상 묻지 말아요>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답을 요구하고 있다. 답을 선뜻 내놓기엔 자신이 없다. 정답인지 오답인지 알 수가 없다. 운명의 여신이 손을 내민다. 슬그머니 손을 잡는다. 어느 길로 가려는지…
<9. 결혼식>에서 기념 촬영을 한다. 운명의 여신이 이끄는 대로 갔더니 그 자리에 서게 됐다. 땅에 발을 붙인 것도, 하늘에 매어있는 것도 아닌 어색한 자세로 결혼 사진을 찍었다.
우주를 품은 사람이 되었다. <10. 희망II>이다. 소우주 안에 또 하나의 소우주가 들어앉았다. 축복의 신은 저주의 신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마법의 안경이 벗겨진 <11. 결혼 생활>은 그 시대의 통념을 깨트리지 못했다. 밖에 나가 일하는 남자와 안에서 살림하는 여자를 확실히 구분한다. 그림에서조차 남성 우월성이 표출된다. 결혼 생활은 살림이다. 의식주를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 가장은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12. 괭이를 든 남자>는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한다. 허리를 펼 수 없는 노동의 강도를 이겨내야 한다. 행복할 것만 같았던 결혼 생활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많이 도사리고 있다. 사랑의 다양한 모습이 <13. 사랑의 네 가지 알레고리>에서 펼쳐진다. 사랑의 열정과 실연의 고통이, 죽음의 공포가 밤의 해변에서 <14. 삶의 춤>을 춘다. 뭉크의 우울이 무거운 밤공기 속에서 흐느적거리며 춤을 춘다. 삶의 무게는 왜 그리도 무거운가? 하루 세 끼, 아니면 두 끼, 한 끼만 먹으면 되는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15. 삼등 열차>에 몸을 싣고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젖먹이는 앞으로 펼쳐질 세상을 모른 채 젖만 빨고 있다.
인생 먼 여행길엔 밤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햇살 가득한 길도 있다. 생에 어찌 눈물만 있겠는가. 기쁨과 환희의 날도 있다. 봄날의 흐드러진 꽃처럼 <16. 삶의 기쁨>은 화려한 색깔로 채색되어있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흘러 태생지로 돌아가는 것. 노트를 펼치고 걸어온 여정을 기록한다. <17. 촛불 아래 글쓰는 노인>은 자신이 마지막까지 품위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촛불은 창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살며시 흔들린다. 바람결에 하얀 날개의 천사가 따라 들어왔다. 매혹적인 <18. 죽음의 잔>을 권한다. 잔을 받아 마신다. 몽환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19. 쇼팽의 죽음>은 피아노 건반을 조심스럽게 한 칸 씩 디디며 멀고 먼 길을 떠난다. 얼마큼 갔을까. 마지막 문을 열기 전에 물음표를 몇 개 던진다. <20.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답을 하고, 문을 열고 나가면 인생 모든 여정은 끝난다. "온 곳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며, 갈 곳도 없다."는 흔한 답이 평균의 깊이를 넘은 심오한 것인지, 즉흥적인 가벼운 답인지 골똘히 생각해본다.
작가의 편지
브런치 북 <그림으로 본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그림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글 모음입니다. 남이 그린 그림을 몇 발짝 앞에서 훑어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게 다가가 살펴보고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할까요. 제목 “요람에서 무덤까지" 는 사회보장제도의 목표로 나온 구호인데 “일생 동안”이라는 의미로 차용했습니다.
이 글은 작품을 본 후의 주관적인 감상(感想), 작품 사진, 도슨트 설명, 작가 알기, 미술사 맛보기로 구성된 글입니다. “도슨트 설명”은 왜곡과 오류를 피하고자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 현장의 레이블, 작가 홈페이지의 작가노트,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작가가 직접 말한 부분을 참고하였습니다. “미술사 맛보기”는 문자 그대로 살짝 맛보기입니다. 이해를 돕는 미술 용어를 곁들였습니다.
프랑스의 미술 평론가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iaud)가 일찍이 그의 저서 <관계의 미학>에서 예술에서의 관계적 형태를 설파했습니다. 현대 미술은 많은 예술가들이 인간관계를 작품에 담아내고, 작품에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합니다. 관람객의 참여로 작품이 완성된다고 말하죠.
이 글에서 ‘그림과 관계 맺기’라는 말은 미술 이론가들과 창작 작가들이 말하는 “관계” 개념과는 다릅니다. 학문적 이론도 아니고 보편화된 개념도 아닙니다. ‘작품과 함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작품 관람자로서 감상의 즐거움을 찾기 위한 방법입니다. 작품을 보며 그 작품 어느 구석엔가 담겨있을 이야기를 찾아, 그것을 나와 연결시키는 것이지요. 작품의 표면을 거쳐 내면으로 들어가고, 그 이면까지 도달해보려는 행보입니다. 그렇게 나와 작품, 여기서는 그림(회화)과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그림과 나를 연결시키는 것이니 자연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그림의 의미와도, 작가의 의도와도 전혀 상관없는 나의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제시된 그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은 당황할 정도로 개인적인 감상을 씁니다.
<그림으로 본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인생행로를 걸어가는 중 어느 길목에서나 만나는 장면들을 모았습니다. 통과의례가 똑같은 절차를 거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기획에서는 단순히 알려진 코스로 걸어갑니다. 성소수자, 비혼, 무자식, 성 평등, 그런 면들을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머지않아 앞으로 그런 그림들이 많이 등장할 것입니다. 그 즈음에 작성하리라고 미루었습니다.
그림 선택은 원화를 직접 만난 감동이 생생한 것을 우선 골랐습니다. 실제로 못 본 그림들도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같은 주제의 다양한 그림들 중에서는 가능하면 미술사조를 고르게 소개할 수 있는 그림을 선택했습니다. 좋은 작품이라도 화가가 중복되는 일은 피했습니다.
순서는 태어나서 사랑 받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며, 인생을 알아가는 과정, 그 이후로 늙고, 생을 마감하는 장면들을 배열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기획한 것은 내 나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인생을 논하기엔 많이 어설프지만, 그런대로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머문 작품들을 골라봤습니다.
유,아동기에서 출발한 글이 풋풋한 사춘기를 건너뛰어 청년기로 넘어갔습니다. 이미 눈치 채고 의아해 하셨나요? 현재의 우리 시대에 있는 ‘소년기’ ‘청소년기’라는 개념이 근대까지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십대에 조혼이 이뤄졌으니까요. 아이가 결혼을 하면 그냥 어른이 됐던 것입니다.
이 가벼운 미술 산책 길에서 반짝이는 작은 돌멩이 몇 개, 빛 고운 나뭇잎 몇 장은 주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