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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Oct 25. 2023

차 한잔의 힘

차 한 잔의 힘 


함께 마시는 차는 대립의 자세를 대좌의 자세로 바꿔놓습니다. 대립으로 달궈진 열기를 식히는 데는 뜨거운 차가 알맞게 식는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마주 서서 쏟아내는 말들의 강하고 날카로움이 마주 앉으면 연하고 부드럽게 바뀝니다. 손까지 휘저으며 뱉어내는 대립의 언어는 마주 앉아 찻잔을 들면 고요히 가라앉습니다. 차를 마시는 동안 언어는 입안에 갇히고 귀는 크게 열리죠. 귀를 열고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됩니다. 

함께 차를 마시면 이야기를 풀어놓고, 이야기를 이어가게 되죠. 빈 찻잔에 다시 차를 따르며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거나, 화재를 바꾸거나. 거듭 빈 찻잔을 채울수록 이야기는 무르익고, 시간은 저만큼 도망갑니다. 

현실을 거칠게 굴러다니던 이야기는 차 향기와 섞여 꿈 이야기로 바뀝니다. 손에 잡히는 꿈을 더듬고, 잡힐 수 없는 꿈을 향해 발돋움합니다. 함께 차를 마시면 마주한 사람의 꿈속을 들여다볼 수 있고, 나의 꿈도 살짝 내비칩니다. 함께 차를 마신다는 것, 차 한 잔이 변화시킨 대립과 대좌의 차이. 차 한 잔의 힘은 가늠할 수 없이 큽니다.


차 한 잔의 큰 힘, 함께 마시거나 홀로 마시거나 차 한 잔의 힘은 큽니다. 따끈따끈한 차 한 잔은 추위에 언 몸을 녹여줍니다. 차갑게 언 마음을 녹여주는 것은 뜨겁지 않아도 되지요. 따뜻한 온도면 충분합니다. 차 한 잔이 녹여주는 것은 언 마음 뿐이 아닙니다. 굳은 것도 보드랍게 녹여줍니다. 마음 속에 굳은 옹이로 박혀있던 상처가 차를 마시는 동안 말랑말랑하게 녹아버립니다. 

아, 또 하나! 따뜻한 차는 무심히 박혀있던 씨앗 하나를 적셔 단단한 겉껍질을 녹이고, 드디어 씨앗은 발아합니다. 거듭 차를 마시는 동안 발아한 씨앗은 쑥쑥 자라서 꽃을 피웁니다. 꽃이 지면 열매를 맺지요. 내 가슴에 박혀있던, 숨어있어 보이지 않던 작은 씨앗이 차를 마실 때마다 조금씩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떤 꽃으로 피어나든, 어떤 열매로 맺어지든. 꽃이 있고 열매가 있는 가슴은 외롭지 않습니다. 


혼자 차를 마시는 사람은 외로워 보입니다. 외로워 보일 뿐, 외롭지 않습니다.  외로움을 즐기는 사람이죠. 혼자 차를 마시는 사람은 생각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꿈을 꾸고 설계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보물을 찾으러 지하 탐험도 하고, 별을 따러 우주로 날아가기도 합니다. 무한의 공간 속을 유영합니다. 

혼자 차를 마시는 시간은 거울 앞의 시간입니다.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지요. 뿌옇고 모호하던 마음을 찻물로 닦아 또렷한 나를 봅니다. 거울에 투영된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봅니다. 숨어있던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혼자 차를 마시는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습니다. 다시 찾은 나, 차 한 잔이 주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혼자 차를 마시는 시간,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경험을 합니다. 그림 속 모네(Claude Monet)의 정원을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고, 모네의 수련 잎에 맺힌 작은 이슬방울이 되기도 하지요. 빈센트(Vincent van Gogh)가 하늘 위에 뿌려놓은 별을 헤며 차를 마시는 시간, 차 한 모금 부드럽게 삼키면 어느새 남부 프랑스의 노란 해바라기 밭에 가 있기도 합니다. 그림 앞에서 혼자 차를 마시는 시간은 시름을 잊는 행복한 시간입니다.

사실주의 그림의 정교함에 어울리는 차, 인상파 그림의 자유로움에 어울리는 차는 다릅니다. 신기하게도 이런 것은 공부하지 않아도 그냥 압니다. 그냥 알아요. 미각이, 후각이, 시각이 그림과 어울리는 차를 잘 찾아냅니다. 공부로 알아지는 수동적인 지식이 아닌, 감각으로 아는 지혜로 차를 고릅니다. 차 한 잔, 굳이 행복이란 단어가 필요할까요.

멜로디는 또 어떤가요! 혼자 차를 마시는 시간, 방안 가득히 넘실대는 멜로디는 나를 끌어안고 춤을 춥니다. 조용히 흐르는 첼로음도 좋고, 귀엽게 간지럽히는 피아노음도 좋지요. 리듬을 따라, 차 향기를 따라 파리의 세느강으로, 런던의 코벤트가든으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바로 차 한 잔의 힘입니다. 

찻물을 불 위에 얹고, 끓은 물을 찻잔에 붓고, 우려낸 차를 우아한 자세로 마시는 시간은 참 짧지요. 긴 인생에 비하면 순간일 뿐인 그 시간의 차 한 잔은 치유의 묘약, 꿈의 영양제, 행복으로 이끄는 이정표입니다. 혼자 마시거나, 함께 마시거나.


(이 글은 Mㅇㅇㅇ블랜딩하우스 브로슈어 게재 의뢰받고 쓴 글입니다. 의뢰는 브런치 제안하기를 통하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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