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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Mar 12. 2024

감히 글쓰기에 대해 논하다.

누구에게서도 글쓰기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배우지 않았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쓴다. 어려서부터 쓰던 말에 사투리가 많아 사전을 찾아서 확인해야 한다. 이건 참 좋은 습관인 것 같다. 지금도 사용하는 나의 언어가 사투리인 것이 많다. 옛날에 엄마에게서 가족에게서 익힌 단어들에 많은 사투리가 섞여있다. 글쓰기에 동원되는 나의 단어들은 어디서 익힌 것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평소의 대화에서, 그동안 읽은 책에서 왔을 것이다. 이건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내 안에 쌓였다. 단어만 알면 글을 쓸 수 있나? 아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단어들을 엮어야 글이 된다. 엮는 솜씨가 좋으면 좋은 글이, 그게 좀 서툴면 별것도 아닌 글이 된다.

 

나의 글은 간결하지 않다. 너울너울 치렁치렁하다. 한없이 늘어진다. 글쓰기를 못배워서 그런가, 왜 그럴까 생각을 더듬어 본다. 해마다 쌓인 나이대로 글도 옛날 스타일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구식 글이다. 청소년기에 읽을 것이 흔치 않아 학교 도서관에 보물처럼 진열된 ‘세계문학전집’을 읽었다. 아마 50권쯤 되는 폼나는(?) 하드커버 책들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면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소설도 많이 끼어있었다. 19금 소설들이 세계문학전집에 들어있어서 가리지않고 읽었다. 뭔지도 모를 묘사들이 꽤 많이 있었겠지만 나는 19금 유해소설을 읽었어도 탈선하지 않았다. 학교 도서관에서 굳이 ‘금서’라고 감춰둔 것이 없었다.


이광수의 장편 소설을 좋아했다. ‘친일파 문인’으로 찍히기 전이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어서 친일이 아니었는데 친일로 변한 것도 아니다. 내가 그의 책을 접할 때는 그저 대단한 작가였을 뿐이다. 사회가 ‘친일’을 분류하고 정의하기 전의 일이다. 손에 잡히면 밤새 읽었다. 거금(?)을 주고 12권짜리 이광수 전집 한 질을 샀다. 서른 두 살에 난 막내아들도 내가 읽은 이광수의 장편소설을 읽었다(아들 고1 때). 필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유장한 문체에 익숙해졌다.(그의 글재주를 닮기라도 했다면 오죽 좋으랴만…)

잠깐 얘기가 빗나가는데, '친일파 작가의 작품'에 이어서 한 가지 추가한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저자 안톤 슈낙 (Anton Schnack, 1892∼1973)을 좋아한다. “가장 충실한 충성서약”을 통해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다. 그래도 나는 그의 작품이 좋다.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의 <별, 한 프로방스 목동의 회고>만큼 아름답고 애잔하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별> <소나기>(황순원) <마지막 수업>, 이 얼마나 소녀의 감성을 살랑살랑 건드리는 감성적인 글이란 말인가! 소녀 뿐이랴, 소년까지도 촉촉히 젖어드는 감성적 글이 아닌가.


글을 쓰다보니 가끔 인터넷에 흘러다니는 ‘글쓰기’에 대한 글이 눈에 띠면 멈춰서 보게된다. 내 글은 참담할 정도로 그 여러 충고들에게서 한참 벗어나있다. 간결하게 쓰란다. 부사를 많이 사용하지 말란다. 접속사도 쓰지 말고. 문장을 쉼표로 끊어서 길게 연장하지 말란다. 지시어(그, 이, 저...)를 남발하지 말란다. 이거 참, 나 들으라고, 나 읽으라고 쓴 글 아닌가. 앞서 구식 문장을 언급했다. 유장한 문장의 매력을 언급했다. 늙은이라 옛날식의 길고 긴, 멋지게 굽이치는 문장을 좋아하는 것일까? 글쓰기 트랜드가 세월따라 변하는 모양인데 나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까?

글쓰기 강사들이 가르치는 대로 따르자면 작가의 개성은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을 것이다. 때로는 간결체가 어울릴 때가 있고, 만연체가 글맛을 더할 때가 있다. 요즘 트랜드는 ‘만연체 금지’ 같다. 작가마다 특성이 있고, 글마다 그 맛이 다 달라야 읽는 사람도 재미가 있다. 취향에 맞게 골라 읽으면 될 테니까. 아무리 신선하다 하여 생선회만 취하겠는가, 푹 곰삭은 젓갈도 맛을 내는데 말이다. 생레몬 조각을 입에 댔을 때 느끼는 짜릿한 신맛이 옳고, 발효되어 혀에 댄 후 서서히 느껴지는 신맛은 그르다는 의미가 아니기를 바란다.


어쩌다보니 독일문학 책을 여러 권 읽었다. 사실 독일 책 읽을 것이 많잖은가. 괴테, 헤르만 헤세, 토마스 만, 니체, 실러 등등. 책을 쫙 펴놓고 문장부호 찾기 놀이를 해보자. 쉼표 찾기 놀이, 쉽다. 여기저기 흔하다. ‘나는’ ‘내가’를 찾아보자. 그것도 쉽게 눈에 띤다. 어떻게 나를 빼고 얘기를 한단 말이냐, 나 여기 있다고 고개를 불쑥불쑥 내민다. ‘그리고’ ‘그래서’ ‘그런데’ 등등 접속사를 꼽아보자. 그걸 빼면 독자가 길을 잃을까봐 노파심에서 그랬는지 문장의 연결부위에 콕 콕 어김없이 박아놨다. 찾기 어렵지 않다. 그럼 이제 마침표를 찾아보자. 짜증날 지경으로 찾기 어렵다. 어떤 글은 몇 줄 씩이나 길게 길게 이어지며 마침표를 저 멀리 유배시켜 놓았다. 요즘 글쓰기 강사들이 기절할 노릇이다. 수식어는 얼마나 섬세한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회화를 감상하는 것 같다. 갖은 형용사에 부사에 쉼표까지 여러 번 동원하며 설명한다. 한 문장이 마치 기차를 여러 량 연결해놓은 것 같다. 문단도 어마어마하게 길다. 책 페이지를 넘기기 일쑤다.


한국에서 글쓰기의 현대적 트랜드(이런 말이 맞는지는 모르지만)를 이해한다. 유튜브 15분을 못견뎌 숏츠나 짤을 보는 시대니 말이다. 문장은 간결해야 한다. 축 처지지 않고 읽기 편해야 한다. 간단명료! 6하원칙에 맞추는 언론 기사가 아닌 문학작품에도 간결한 문체를 내세워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독일어 소설의 번역본 2가지 문장을 비교해본다.

로베르트 무질(오스트리아 출신, 독일어 사용)작 <특성없는 남자>의 번역이다. 나는 독일어 번역의 비읍(ㅂ)자도 모르는 사람이므로 문장이 어떻게 취급되었는지 예를 들기만 할 뿐, 번역이 잘됐네 못됐네 비평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그는 시대의 변화니 진보니 하는 것들도, 결국 어떤 형태의 시대적 실험도 모두가 합의하는 지점, 달리 말하자면 전체를 아우르는 확신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상황을 지칭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3권 326쪽(문학동네)

“그래서 그에게는 시대의 변화 또는 심지어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 그저 어떤 시도도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그 지점에는 오지 못하고, 전체를 포괄하는 확신에 이르는 그리고 이로써 비로소 끊임없는 발전, 지속적 향락, 위대한 아름다움의 진지함의 가능성에 이르는 도정에 있음을 나타내는 단어일 뿐인 듯했다.” 5권 82쪽(나남)

유감스럽게도 독일어 원문은 없다. 있어도 못 읽지만.

내가 선택해서 읽는 것은 아래 번역본(나남)이다. 작가의 문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쓴 시대가 100년전 200년전이라면 현대문법과 문체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독자들의 선호도도 많이 다를 것이다. 어쨌든 나는 작가의 원문을 그대로 느끼는 것이 좋다. 맞다 틀리다가 아니라 내 취향이다. 도대체 마침표가 어디에 찍힌 건지 한참을 더듬어야 나타나는 길고 긴 만연체 문장을 읽는 맛이 좋다. 그러다보니 내가 이렇게 멋대로 늘어지는 문장을 쓰게 된 것인지…


글쓰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 작가 한강에게 맨부커 상을 안겨준 <채식주의자>의 번역에 대한 논란은 뜨겁고 요란했다. 번역이 잘됐다거나 번역이 원작을 훼손시켰다거나 다들 한 마디 씩 거들었다. 원작 왜곡을 용인할 수 있는 것은 독자도 아니고 평론가도 아니고 작가다. 번역한 나라의 문화에 맞게 옮긴 것을 수긍하는 것도, 이건 내 글이 아니다 나의 문체를 그대로 살려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작가의 몫이다. 정답도 모범답안도 없다. 여러 번역이 있으면 독자가 자기 취향대로 골라서 읽으면 된다.  


영미문학도 몇 백년 전에 쓴 것과, 자체 국가에서 현대어로 번안飜案한 것이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셰익스피어 작 <맥베스> Act 1 Scene 1

ALL OriginalText

"Fair is foul, and foul is fair. Hover through the fog and filthy air."

ALL ModernText

"Fair is foul, and foul is fair. Let’s fly away through the fog and filthy air."

"아름다운 것은 더러운 것, 더러운 것은 아름다운 것. 안개와 더불어 더러운 공기 속으로 날아가라." (도서출판 전예원. 1994)

"고운 건 더럽고 더러운 건 고웁다. 탁한 대기. 안개 뚫고 날아가라."(민음사 2004.)


봄을 기다리는 배나무. 이슬비 내리는 날 카페 야외, 북적거림이 없는 데크가 평화롭다. 이 카페에서 이 글을 썼다.


현대, 현재 요구하는 문장에 맞추지 못하는 변辯이 너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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