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탄생, 영성
2부 인간과 감정의 색
9화 보라 - 경계 위에 선 권력과 흔들림의 색
보라색은 언제나 애매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빨강과 파랑 사이,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색으로 이름 붙이기 어려웠다. 동시에 가장 많은 의미를 부여받은 색이 되었다. 우리는 이 색을 보라라고 부르기도 하고, 자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지색도 이에 속한다.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고정되지 않는다. 퍼플(purple)은 이름 사이를 오가며, 그 경계에서 머문다.
'보라'라는 색을 설명할 때, 서양에서도 우리처럼 ‘가지 같은 색(purple like an eggplant)’이라고 말한다. 가지 열매의 껍질은 빛에 따라 검게 가라앉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붉은 기운을 머금은 보라로 떠오르기도 한다. 퍼플은 단순한 보라라기보다, 자주에 가까운 깊이를 가진 보라, 혹은 보라와 자주 사이에서 흔들리는 색이다.
우리가 ‘가지색’이라고 부를 때, 그 말은 하나의 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 사이에서 계속 변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보라는 그렇게 이름으로 고정되지 않는 색이다.
서양에서는 violet, purple, lavender, tyrian purple, mauve, periwinkle 등등 많은 종류의 보라색이 있다. 이 구분은 단순한 색의 차이가 아니다. 색을 이해하는 방식, 세계를 해석하는 태도의 차이에 가깝다.
바이올렛(violet)은 빛의 끝에 가까운 색이다. 가시광선의 마지막에서 거의 사라질 듯 남아 있는 색. 차갑고 멀고, 손에 잡히지 않는 색이다. 반면 퍼플(purple)은 자연의 스펙트럼에 존재하지 않는다. 빨강과 파랑이 눈 안에서 섞이며 만들어지는 색. 퍼플은 자연의 색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이 만들어낸 색이다. 자주색은 일찍부터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자연에 없는 색이기에,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색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퍼플은 쉽게 얻을 수 있는 색이 아니었다. 바다의 작은 생물에서 극히 적은 양만 추출할 수 있었고, 그 과정은 시간과 노동을 필요로 했다. 결국 퍼플은 값비싼 색이 되었고, 권력은 그 색을 독점했다. 로마에서는 황제만이 완전한 퍼플을 입을 수 있었고, 중세의 교회와 왕권 역시 이 색을 차지했다. 퍼플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권력의 형태가 되었다. 여기서 '퍼플'은 한국인의 감성으로는 '자주'라고 할 수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보라(자주)색을 좋아했다. 자신의 배(barge)를 특별히 보라색으로 단장했다.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퍼플purple"이라는 말이 나온다.
ENOBARBUS; 에노바르부스
The barge she sat in like a burnished throne
Burned on the water. The poop was beaten gold,
Purple the sails, and so perfumed that
The winds were lovesick with them. Act2, Scene2, line230.
여왕이 타는 배는 마치 닦아놓은 왕좌같이/ 물위에 찬란했소./ 고물에는 황금을 두드려 박았고, 돛은 보랏빛./어찌나 향기롭던지/ 바람들조차 이 돛에 홀딱 반할 지경이었소. 2막2장 230행.
보라색 염색의 중심지는 페니키아의 티레(Tyre)였다. '티레의 보라색(Tyrian purple)'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이 보라색은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보라색과는 달랐다. 오히려 적갈색에 가까운,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색이었다.
BC48년 이집트를 방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기원전100-기원전44) 는 온통 보라색으로 단장한 클레오파트라를 만났다. 로마에 돌아온 그는 "보라색은 왕족에게만 허용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티리언 퍼플을 황제의 색으로 끌어올린 것은 로마였다.
얀 반 에이크 <겐트 제단화> 1432. 패널에 유채, 3.4 x 5.2m. 성 바보 겐트(Sint-Baafs Ghent), 벨기에.
이 제단화에서는 우리가 '보라'라고 하기보다는 '자주'라고 부르는 퍼플이다. 아무나 입을 수 없는 색.
같은 색이 전혀 다른 의미로 뒤집히는 순간이 있다. 신약성서에는 예수가 처형되기 전, 로마 병사들에게 조롱당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예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운 채 왕처럼 행세하게 했다(요한복음19:2). 자주 색은 왕의 색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왕을 흉내 낸 희극의 소품이 된다. 권력의 상징이었던 색은 한순간에 모욕의 색으로 뒤집힌다. 보라는 이렇게 자신이 가진 의미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색이다.
왼쪽 - 예수, 이탈리아 라벤나의 성 비탈레 성당 모자이크. 6세기.
오른쪽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이탈리아 라벤나의 성 비탈레 성당 모자이크. 6세기.
위 오른쪽 모자이크에 있는 황제의 옷은 실제보다 더 푸른빛을 띠고 있고. 왼쪽 예수의 옷은 갈색에 더 가깝다. 사진으로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모두 보라색이라 부른다.
동양에서도 보라색이나 자주색은 중심이 아니라 경계에서 이해되었다. 자주색은 오방색에 속하지 않는다. 청과 적, 두 기운이 섞여 만들어진 색. 색은 어디에 속하기보다 서로 다른 질서가 만나는 자리에 놓인다.
하늘의 중심 별자리인 자미원(紫微垣)에 ‘자(紫)’가 쓰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호메로스(기원전 8세기경) - 어둡고 깊은 색
호메로스(호머)는 피를 단순히 붉은색으로 말하지 않았다. 보라에 가까운 색으로 불렀다. 정확히는 ‘보라색’이라기보다, 어둡게 요동치는 색, 깊이와 불길함이 함께 깃든 색이었다. 같은 단어는 바다에도 쓰이고, 구름에도 쓰인다. 색을 구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놓인 상태를 말하기 위해서다. 그의 세계에서 보라는 하나의 색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이 뒤섞이는 순간의 색이다. 호메로스는 피를 붉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둡고 깊은 색으로 묘사했다.
호메로스 시대에 '포르퓌레오스(porphyreos)'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정적인 보라색보다는 훨씬 생동감 넘치는 상태를 뜻했다. '소용돌이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하여, 뿜어져 나오는 피의 일렁임이나 어둡고 진한 액체의 질감을 표현했다. 보라색 염료는 극도로 귀했기에 영웅의 죽음이나 고귀한 희생을 묘사할 때 가장 적절한 최고급의 수사였던 셈입니다.
<일리아스> 4권 140행 "검은 피"
그 즉시 상처에서 검은 피가 서서히 흘러나왔다.
마치 마이오니아나 카리아 여자가 말의 뺨을 장식할 물건을 만들기 위해 자주색 염료로 상아를 물들이는 것 같았다. 137쪽.(<일리아스> 박문재옮김. 2025. 현대지성)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 장면에서도 보랏빛 피가 등장한다.
거구 아이아스가 그렇게 명령했기에, 트로스인들과 막강한 동맹군과 다나오스인이 쓰러져 죽은 시신이 산더미를 이루었고, 검붉은 피가 대지를 적셨다. 17권 360행/위의 책 547쪽
여기서의 보라색은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와 피의 진한 농도를 상징하며, 전장의 비극적이고 무거운 분위기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호라티우스(기원전 65년-기원전8년) - 보라색 산문(Purple Prose)
글쓰기에서 지나친 수식을 경계하는 '보라색 산문(Purple Prose)'이라는 말은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로부터 시작되었다. 평범한 시구 사이에 난데없이 화려한 보라색 비단 조각을 덧댄 것 같은 문장 비판한 말이다. 당시 서양에서 보라색 염료는 황금만큼이나 귀하고 비싼 사치품이었기에 오직 황제나 귀족만이 누릴 수 있는 권위와 부의 상징이었다. 그런 연유로 결국 가장 귀한 색조차 제 자리를 찾지 못하면 전체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얼룩이 된다는 말을 "보라색"에 비유한 것이다.
<컬러 퍼플 The Color Purple>
보라는 때로 눈앞에 있으면서도 쉽게 지나쳐지는 색이다.
미국 작가 엘리스 워커(Alice Malsenior Tallulah-Kate Walker, 1944- )가 발표한 <컬러 퍼플 The Color Purple>에서 한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들판 어딘가에 있는 보라색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친다면, 그것은 신을 화나게 하는 일이라고. 그 말은 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보라는 특별한 색이 아니라, 이미 거기에 있지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색이다.
라벤더는 권력의 색이 아니다. 권력이 식은 뒤에 남는 색이다. 진한 보라가 힘과 권위를 드러낸다면, 라벤더는 그것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나타난다. 빅토리아 시대에 이 색은 상복으로도, 동시에 세련된 취향의 색으로도 쓰였다. 슬픔과 품위가 함께 머무는 색. 사라짐과 기억이 겹쳐지는 색. 라벤더는 권력의 색이 아니라 정제된 시간의 색이 된다.
라일락은 분홍빛이 도는 옅은 보라색이고, 라벤더는 회색빛이 감도는 중간 보라색인 반면, 페리윙클은 푸른빛이 도는 보라색으로 두드러진다. 페리윙클은 라일락과 라벤더보다 더 차갑고 차분한 느낌이다. 라일락과 라벤더는 각각 더 따뜻한 색감에 분홍빛과 회색빛이 더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보라색의 하위 범주인 페리윙클은 라벤더보다 약간 밝고, 라일락보다 더 푸르며, 분홍빛이 감도는 모브보다 더 투명하고, 자수정보다 더 어두운 정확한 색조를 나타낸다. 하지만 색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같은 색에서도 짙고 옅음이 있고, 보는 눈의 감각이 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마담 모네의 초상> 1872. 캔버스에 유채, 54 x 72cm. 칼루스테 굴벤키안 박물관, 리스본, 포르투갈
<마담 모네의 초상>에서 보라색은 결코 단단하게 고정된 색이 아니다.
카미유 모네의 옷에 스며든 페리윙클(periwinkle) 빛은 파랑과 보라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완전히 보라도 아니고, 파랑으로 돌아가지도 않는 그 색은, 빛이 닿는 순간마다 미묘하게 변하며 인물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감싼다. 르누아르는 페리윙클색을 통해 형태를 강조하기보다 공기의 결을 살리고, 인물과 배경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 이 그림의 보라는 색이라기보다 하나의 숨결에 가깝다. 눈으로 보는 색이 아니라, 빛과 공기가 피부 위에 남기는 아주 옅은 온기처럼 느껴지는 색이다.
폴 프리드랜더. 2010년. 런던 키네틱 아트 페어.
보라는 때로 눈에 보이는 색이 아니라, 눈이 만들어내는 색이기도 하다. 폴 프리드랜더(Paul Friedlander, 1951- )는 스스로를 ‘과학적 예술가’라 부르며, 빛의 파형과 속도를 조작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그의 크로마스트로빅 기법(Chromastrobic)에서는 색이 너무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눈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서로 다른 색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붙인다.
우리가 보는 색은 실제로 존재하는 색이 아니라, 지각이 만들어낸 연속이다. 보라도 그렇다. 빨강과 파랑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을 우리는 볼 수 없지만, 그 사이를 이어 붙이며 하나의 색으로 받아들인다. 보라는 언제나 물음처럼 남는다. 보라색은 빛 속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눈과 뇌가 만들어낸 것인가.
보라는 때로 존재하는 색이 아니라, 존재한다고 믿게 되는 색이기도 하다. 폴 프리드랜더의 작업은 그 사실을 조용히 드러낸다. 빛의 파형을 빠르게 변화시키는 그의 장치 속에서 색은 실제로 섞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눈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서로 다른 색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붙일 뿐이다. 빨강과 파랑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은 없지만, 우리는 그 사이를 메우며 하나의 색을 만들어낸다. 보라는 빛의 색이기 이전에 지각의 색이다.
모네 - 빛 속에서 흩어지는 보라
클로드 모네 <지베르니 정원> 1900. 캔버스에 유채, 81.3 x 92.6cm. 오르세미술관, 파리, 프랑스
모네의 정원에서 보라는 빛의 산물이다. 흐드러진 붓꽃(아이리스)과 나무 그림자 사이로 스며든 연보랏빛 라벤더 색조는 공기마저 보랏빛으로 물든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모네에게 보라는 그림자의 진짜 색이었다.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지 않는다. 이곳에는 바이올렛처럼 차갑게 스미는 그림자도 있고, 햇빛에 닿아 부드럽게 풀리는 라벤더, 꽃잎 가장자리에서 연하게 번지는 라일락의 기운도 함께 존재한다. 때로는 물 위의 반사 속에서 파랑에 가까운 페리윙클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색은 고정되지 않는다. 빛의 방향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로를 밀어내고 끌어당기며, 잠시 보였다가 사라진다. 모네의 보라는 물감의 이름이 아니라, 빛이 순간마다 바꾸어 놓는 상태에 가깝다. 색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냐크 - 점으로 완성되는 보라
폴 시냐크 <아비뇽의 교황궁> 1900. 캔버스에 유채, 73.5 x 92.5 cm. 오르세미술관, 파리, 프랑스
점묘법으로 찍어낸 수많은 점 속에는 분홍빛이 도는 연보라(모브)와 푸른빛이 감도는 보라(페리윙클)가 섞여 있다. 해질녘 석양이 교황궁의 벽면과 강물에 반사될 때 나타나는 그 찰나의 보랏빛 변주를 과학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표현했다
아비뇽의 교황궁에서 보라는 하나의 색으로 칠해지지 않는다. 이 그림의 보라는 캔버스 위에서 완성되지 않고, 보는 이의 눈 안에서 만들어진다. 가까이 다가가면 레드와 블루의 점들이 분리되어 있고, 그 사이에 미묘한 바이올렛과 퍼플의 기운이 흩어져 있다. 때로는 따뜻한 색이 스며들며 자주에 가까운 깊이를 만들고, 때로는 차가운 색이 밀려와 푸른빛이 강해진다. 이 보라는 물리적으로 섞인 색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색들이 긴장 상태로 공존하며 만들어내는 지각의 색이다. 시냐크의 보라는 안정된 색이 아니라, 눈이 완성해내는 하나의 과정처럼 느껴진다.
보라색은 현실의 삶과 그 너머의 세계를 잇는 경계의 색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홀로코스트 추모의 날(Holocaust Memorial Day)'이나 주요 국가적 비극을 기리는 날이면, 런던의 시청사나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은 랜드마크들이 일제히 보랏빛 조명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나치의 수많은 강제 수용소 중 가장 큰 규모였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가 해방된 날을 기념하여 지켜지고 있다.
이때의 보라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희생자들의 고통에 대한 깊은 애도이자, 다시는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인류의 '기억'을 상징한다. 화려한 금빛이나 차가운 무채색 대신 낮게 가라앉은 보라색 조명이 도시를 덮을 때, 우리는 침묵 속에서 떠난 이들을 기리며 숭고한 평화를 기도하게 된다.
옛날에는 뿔소라 수만 마리를 잡아야 겨우 소매 끝을 적실 보라색 염료를 얻을 수 있었다. 이 '희귀함'이 황제의 권위가 되었고, '보라색 산문'이라는 비유가 생겼다. 오늘날에는 소중한 이를 기리는 '추모의 빛'으로 이어진다
영국 완즈워스(Wandsworth) 시청. 2024.01.26.
매년 1월 27일 영국을 비롯한 유럽 곳곳에서 홀로코스트를 추모하는 "Light up in Purple" 캠페인이 진행된다. 어둠을 밝히는 보랏빛 기억이다.
영국 헐(Hull) 시청. 2026.01.26.
자유로운 영혼의 뮤지션 프린스(Prince Rogers Nelson, 1958-2016)를 추모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 시청이 보라색 조명으로 물들었다. 출처 - 로버트 라크만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퍼플섬의 보라는 우연히 생긴 색이 아니다. 전남 신안군의 작은 섬 반월도와 박지도는 2010년대 중반, 인구 감소와 쇠퇴를 겪고 있었다. 섬을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색’이었다. 주민들과 지자체는 섬의 정체성을 하나의 색으로 묶기로 했고, 보라가 선택되었다.
섬 주변에 자생하는 도라지꽃과 라벤더의 이미지에서 착안해 다리와 지붕, 담장과 길까지 보라로 칠해 나갔다. 2019년 ‘퍼플섬’으로 본격 조성된 이후, 이 작은 섬은 관광지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소외된 섬마을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간절한 희망의 보라색이 되었다. 이곳의 보라는 권력의 색도, 상징의 색도 아니다. 사람들이 머물기 위해, 다시 돌아오기 위해 선택한 삶의 색이다. 인위적으로 칠해졌지만 오히려 자연과 어긋나지 않는 이유는, 보라가 원래부터 경계에 있는 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보랏빛 위를 걷는 시간
사진 - 한국관광공사
퍼플교 위에 올라서면 현실의 경계는 보랏빛으로 흐릿해진다. 발밑으로 일렁이는 바다와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 사이에서, 오직 보라색만이 선명한 이정표가 되어 섬의 깊숙한 품으로 안내한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는 지나치게 화려하다 느껴졌던 보라색이 이곳의 초록빛 들판, 투명한 갯벌과 만나자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듯 편안한 조화를 이룬다. 일상을 덮어버리는 과한 장식이 아니라, 지친 마음을 다독이는 다정한 위로의 색채다.
때로는 삶에도 이런 "보라색 산문" 같은 화려한 일탈이 필요지 않을까. 그 과잉의 끝에서 비로소 우리는 마음의 안식을 찾기도 한다.
남일호 <화조서첩> 조선. 비단에 채색, 33.7 x 20.6cm. 국립중앙박물관 본관7953.
전 신사임당 <초충도/초충도 병풍>. 조선. 종이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신수3550.
서양에서 보라가 귀족의 옷감이나 빛의 환영을 상징했다면, 우리 고미술속 보라는 소박한 자연의 생명력으로
존재한다. 탐스럽게 익은 가지의 매끄러운 껍질에서 배어 나오는 짙은 보라색은 단아하면서도 건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보라색' '자주색'으로 말하기보다는 '가지색'이라는 색 이름이 더 익숙한 색이다. 땅의 기운으로 빚어낸 정직한 보라다.
보라는 때로 가장 일상적인 곳에서 가장 조용히 빛난다. 가지의 매끈한 껍질, 포도의 투명한 껍질 아래, 블루베리의 깊은 속살 속에서 이 색은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다 스며든다.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보라색’이라 부르지만, 그 안에는 빛을 받아 변하고, 시간에 따라 짙어지고 옅어지는 미묘한 흔들림이 있다. 햇빛 아래에서는 더 선명해지고, 어둠 속에서는 검붉게 잠긴다. 손에 쥐면 금세 다른 색으로 번져나가는 색, 보라는 이렇게 살아 있는 색이다. 눈에 보이는 색이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색. 언제나 겉이 아니라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익어간다.
한국어의 보라와 자주 역시 이와 비슷한 감각의 차이를 담고 있다. 푸른 기운이 남아 있는 보라는 멀어지고, 붉은 기운이 깊어진 자주는 스며든다. 같은 색이지만, 하나는 거리의 색이고 다른 하나는 체온의 색이다. 이렇게 보면 보라색은 하나가 아니다. 빛과 인식 사이에서, 권력과 모욕 사이에서, 중심과 주변 사이에서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는 색이다.
우리는 보라를 볼 때마다 단순한 색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순간을 보게 된다. 보라는 완성된 색이 아니다. 언제나 흔들리고, 언제나 경계 위에 머문다. 그 때문에 보라색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보라는 때로 권력의 색이 아니라 기다림의 색이 되기도 한다. 기독교의 수난주간 동안 성직자들이 두르는 보라색 천은 완성된 신성의 색이 아니라, 아직 도달하지 않은 시간을 위한 색이다. 대강절의 초 역시 그렇다. 보라색 초는 빛이 오기 전의 시간, 도착하지 않은 빛을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타오른다. 찬란함의 색이 아니라 찬란함에 이르기 전의 긴 머뭄을 가리킨다. 보라는 완성된 순간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가는 시간의 색이다.
성직자들이 보라색 가운을 입는 것에 대해 괴테는 그의 저서 <색채론>에서 이렇게 썼다.
고위 성직자들이 이 불안한 색을 자기 것으로 하는 데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돌진하는 상승이라는 불안한 계단에서 쉬지 않고 추기경의 자색 제복을 향해 위로 달려가고 있노라고 말이다. 791행. <색채론>255쪽. 장창희옮김. 민음사. 2003.
보라색은 하나의 이름 아래 수만 가지의 얼굴을 품고 있다. 고대 로마 황제의 어깨 위에서 빛나던 고귀한 권력의 상징이었으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빛이 빚어낸 그림자의 진짜 얼굴을 찾아가는 통로였다. 한국의 작은 섬마을에서는 지붕 위 보랏빛으로, 오늘날 우리에게는 슬픔을 나누고 기억을 박제하는 애도의 빛으로 존재한다.
가장 인공적이면서도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사치스러우면서도 가장 소박한 색. 보라색은 이 모든 극단적인 가치들을 한데 버무려 우리 삶의 문장을 더욱 풍성하게 채워준다.
보라가 공기와 빛의 색이었다면, 이제는 손에 잡히는 색, 시간이 쌓여 만들어지는 색으로 넘어간다. 브라운. 빛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색, 존재가 무게를 갖기 시작하는 색이다.
3부 시간과 존재의 색
10화 브라운 - 대지, 노화,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