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감정의 색 - 에너지, 생기, 밖으로 향하는 색
2부 인간과 감정의 색
8화 오렌지 - 익어가는 시간의 색
분홍은 우리 안으로 스며드는 색이었다. 감정을 부드럽게 다듬고, 형태를 잡지 않은 채 오래 머물게 하는 색이다. 감정은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어느 순간, 방향을 얻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경계에서 색은 바뀐다. 분홍이 아직 식지 않은 열을 품고 있다면, 오렌지는 열이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의 색이다.
오렌지는 퍼지고, 번진다. 확장되는 색이다.
해 질 녘 하늘이 붉음에서 주황으로 넘어갈 때, 노을색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동한다. 불꽃은 중심에서 가장 밝은 노랑을 지나 바깥으로 퍼지며 오렌지가 되고, 도시는 밤이 되면 네온의 빛으로 오렌지 색을 다시 만들어낸다. 오렌지는 고정된 색이 아니라, 움직임 속에서 드러나는 색이다.
괴테는 주황을 노랑이 붉어지며 도달하는 색으로 보았고, 그 안에서 강한 생명력과 따뜻한 에너지를 읽어냈다. 주황색이 건강하고 활기찬 느낌을 주는 동시에, 문명 이전의 감각에 가까운 원초적인 매력을 지닌다고 보았다. 때문에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주황색을 자주 선택하거나,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사는 이들에게서 유독 선호되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이해했다.
<색채론>에서 괴테는 색을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과 감정, 문화적 반응까지 포함한 현상으로 보았고, 색마다 심리적·상징적 성격을 부여했다. 그 맥락에서 주황색은 노란색이 점차 짙어져 붉은 기운을 띨 때, 활력과 에너지, 따뜻함이 강해진다.
순수한 황색이 주황색으로 아주 쉽게 넘어가듯이, 이 주황색이 주홍색으로 상승하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주황색이 주는 안락하고 명랑한 느낌은 선명한 주홍색에서는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것으로 상승한다.
능동적 영역은 여기에서 최대한의 에너지에 도달하며, 정열적이고 건강하며 거친 사람들이 특히 이 색을 좋아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52쪽 -<색채론> 괴테지음, 장희창 옮김, 민음사
리얼가르와 오르피멘툼은 모두 고대부터 사용되어 온 황화비소 계열의 광물 안료로, 강렬한 주황과 노랑을 만들어내는 색의 원천이었다. 리얼가르(realgar)는 붉은 기운이 도는 주홍색 광물로, 불빛처럼 따뜻하고 선명한 색을 내어 벽화나 채색화에서 강조색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오르피멘툼(orpiment)은 황금빛에 가까운 노란색을 띠며, 빛을 머금은 듯한 밝은 색감으로 신성함이나 귀함을 표현하는 데 쓰였다. 두 안료는 색의 아름다움만큼이나 독성을 지니고 있어 다루기 어려운 재료였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용될 만큼 강렬하고 매혹적인 색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렌지색의 여러 이름에 따라 약간씩 색감의 차이가 있다. 다홍색(多紅色)이 붉음에 가까운 밝은 색이라면, 주홍은 붉음과 노랑이 균형을 이룬 전통의 중심색이고, 주황은 그보다 더 가벼워져 빛에 가까워진 근대의 색이다. 이 세 색은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시간과 감각 위에서 형성된 색들이다.
다홍은 주황이 아니라, 붉음이 밝아진 색에 가깝다. 주홍은 색이라기보다, 오래 지켜온 질서에 가까운 색이다. 주황은 전통의 색이 아니라, 빛을 기준으로 나뉜 색이다.
호주 중부에 위치한 고대 사암 바위산 울루루의 전경. 촬영 안젤로 지오르다노(Angelo Giordano) 퍼블릭 도메인.
울룰루가 가장 깊은 주황으로 물드는 순간은 해가 막 기울어가는 짧은 시간이다. 낮 동안 빛을 머금고 있던 바위는 저녁이 되면 서서히 온기를 밖으로 드러내며, 붉음과 노랑 사이의 색을 천천히 풀어낸다. 이 색은 표면에 칠해진 것이 아니라, 수천만 년의 시간 속에서 축적된 빛이 잠시 드러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울룰루의 주황은 하나의 색이라기보다, 오랜 시간과 햇빛이 만나 만들어낸 순간의 깊이에 가깝다.
자코프 틴토레토 <빈첸초 모로시니의 초상> 약1518-1594. 캔버스에 유화, 85.3 × 52.2 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영국.
초상의 주인공은 베네치아의 유력 관리였던 빈첸초 모로시니(1511~1588)다. 틴토레토의 가장 섬세한 초상화 습작 중 하나인 이 작품에서 모로시니의 얼굴은 여러 겹의 물감을 세심하게 덧칠하여 표현했다. 반면, 옷은 빠르게 덧칠한 듯하다. 거친 납황색(lead-tin yellow) 줄무늬는 진홍색(crimson) 예복 위에 덧칠한 스톨의 금실을 모방한 것다. 모로시니의 예복 안감인 흰색 모피는 아직 마르지 않은 진홍색(crimson) 물감 위에 덧칠한 부분에서 분홍빛(pink)을 띤다.
이 초상화의 현재 형태는 비정상적으로 좁은데, 오른쪽 부분이 잘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 과학자 루이 보켈랭(Louis Nicolas Vauquelin, 1763-1829)은 크로코아이트 광물을 발견하여 1809년에 합성 안료 오렌지 크롬을 개발했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물감과 1841년에 발명된 금속 튜브는 화가들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에 편리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 주황색은 매우 중요한 색이었다. 1872년 클로드 모네가 그린 인상파의 대표작인 <인상, 해돋이>에서는 작은 주황색 태양이 구름과 물에 반사된 같은 색조의 빛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만한 작품이 되었다.
프레데릭 레이턴 <불타는 6월> 1895. 캔버스에 유채, 120×120cm. 폰세 미술관, 폰세, 푸에르토리코.
잠든 여인의 옷자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주황색은 마치 액체로 된 태양 같다. 이 작품에서 주황은 생명의 절정과 동시에, 곁에 놓인 독성 식물 협죽도를 통해 죽음과의 미묘한 경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불타는 6월>에서 오렌지색은 단순한 의상의 색이 아니라, 한여름의 열기 자체를 형상화한 빛에 가깝다. 얇게 몸을 감싼 드레스는 불꽃처럼 번지며, 인물의 피부와 주변 공간까지 하나의 온도로 묶어낸다. 외부에서 비추는 빛이 아니라, 마치 몸 안에서부터 서서히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보는 이로 하여금 더위 속에 잠긴 감각을 함께 경험하게 한다. 이 그림에서 오렌지는 시선을 끌기 위한 색이 아니라, 시간과 공기를 멈춘 채 응축된 열의 상태를 드러내는 색으로 작용한다.
알버트 조셉 무어 <한여름> 1887. 캔버스에 유채, 155 x 160cm. 러셀 코츠 미술관, 본머스, 영국
세 여인이 입은 주황색 드레스는 한여름의 정체된 공기와 나른한 열기를 시각화한다. 대칭적인 구도와 화려한 주황빛이 탐미주의의 정점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무어의 <한여름>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 제목이 불러오는 감각은 어딘가 닮아 있다. 셰익스피어에게 한여름은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밤의 시간이었다면, 무어에게 한여름은 모든 움직임이 느려지고 감각이 흐려지는 낮의 정적이다. 하나는 이야기로 풀어낸 꿈이고, 다른 하나는 빛과 색으로 멈춰 세운 시간이다.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두 작품은 모두 한여름이라는 계절이 만들어내는 느슨한 경계 위에 머물러 있다.
무어의 그림 속 인물들은 서사나 사건을 만들어내기보다 그저 한여름의 공기 속에 놓여 있는 존재들처럼 보인다. 가볍게 늘어진 자세와 반복되는 드레이퍼리의 리듬, 피부와 천 위에 머무는 따뜻한 색조는 긴장보다는 이완에 가까운 상태를 만든다. 화면 전체는 극적인 대비 없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하나의 온도와 시간 속에 머물게 한다. ‘한여름’은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빛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계절의 감각 자체를 천천히 펼쳐 보이는 장면이다.
흥미로운 점은, 레이턴과 무어처럼 서로 다른 화가가 모두 이 강렬한 오렌지색을 ‘잠든 인물’과 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19세기 영국 미술이 공유하고 있던 하나의 감각과 관련이 있다. 이 시기의 화가들은 색을 통해 극적인 사건을 그리기보다, 감각의 상태 - 특히 정지와 이완의 순간을 표현하려 했다. 오렌지색은 본래 매우 강하고 활동적인 색이지만, 그것이 잠든 몸 위에 놓일 때 오히려 역설적인 긴장이 만들어진다. 가장 뜨거운 색이 가장 고요한 자세와 만나는 순간, 색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화면 안에 머물게 된다.
두 화가에게 잠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감각이 가장 깊이 가라앉는 상태, 다시 말해 시간이 거의 멈춘 지점이었다. 오렌지색 드레스는 멈춤 속에서 더욱 농밀해지고, 빛은 더 이상 퍼지지 못한 채 한 점에 응축된다. 결국 그들이 그린 것은 ‘잠든 여인’이 아니라, 움직임을 멈춘 열기, 시간 속에 붙잡힌 빛의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왼쪽-에곤 쉴레 <무릎을 굽히고 앉아있는 여성> 1910. 종이에 검은색 분필, 과슈, 44.6x31cm. 레오폴드 미술관, 비엔나, 오스트리아
오른쪽-에곤 쉴레 <오렌지 자켓의 자화상> 1913. 와시종이에 수채화물감, 붓, 과슈, 연필. 48.3 x 31.7cm. 알베르티나 미술관, 비엔나, 오스트리아
에곤 쉴레의 그림에서 오렌지는 긴장으로 돌아온다. 거칠고 불안한 선 위에 얹힌 이 색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다. 피부 위에서 번지는 듯한 오렌지는 생명의 색으로 보이지 않는다. 불안과 욕망이 동시에 드러나는 색이 된다. 같은 색이지만, 그 안의 감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오렌지는 이렇게 감정의 방향에 따라 끊임없이 바뀐다. 따뜻함이 되기도 하고 불안이 되기도 하며 정지와 움직임 사이를 오간다.
<오렌지 자켓의 자화상>은 쉴레 특유의 거칠고 뒤틀린 선 속에서 선명한 오렌지색 자켓은 오히려 그의 불안과 고독을 더욱 날카롭게 부각한다. 내면의 일렁이는 에너지를 외적으로 투사한 파격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있는 여성>은 한 손과 머리를 제외하고는 온통 옷감으로 덮여 있다. 치마 자락에서 손까지 이어지는 연필선은 그녀의 몸이 비틀린 듯한 모습을 더욱 강조한다. 파란색과 초록색이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주황색과 붉은색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뉴욕의 겨울, 센트럴파크를 가로지르던 수천 개의 문. <더 게이츠 The Gates>는 오렌지가 어떻게 공간을 바꾸는지를 보여준다. 바람에 흔들리는 천은 빛을 머금고, 사람의 움직임과 함께 색을 바꾼다. 색은 더 이상 대상에 붙어 있지 않다. 길을 따라 이어지며, 걷는 사람의 속도와 시선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진다. 오렌지는 여기서 사물이 아니라 경험이 된다.
오렌지는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다. 언제나 이동하는 색, 머무르지 않고 바뀌는 색이다. 내면에 머물던 감정이 바깥으로 나와 형태를 가지기 시작할 때, 그 경계에서 오렌지색이 나타난다.
크리스토, 잔 클로드 부부 <더 게이츠> 2005. 센트럴 파크, 뉴욕, 미국
<더 게이츠>는 대규모 설치 작업으로, 총 7,500여 개의 철제 프레임에 샤프란빛의 천을 드리워 공원 산책로를 따라 이어지게 한 작품이다. 겨울의 나무들이 잎을 떨군 채 드러난 풍경 속에서, 따뜻한 주홍색의 천은 바람에 따라 가볍게 흔들리며 길 위에 흐르는 하나의 색의 리듬을 만들어냈다.
중요한 것은 ‘구조물’이 아니라, 그 사이를 걸어가는 경험이다. 관람자는 특정한 지점을 바라보는 대신, 끝없이 이어지는 문들을 통과하며 색 속을 걷게 된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반복되는 주황빛은 마치 길 위에 펼쳐진 빛의 흐름처럼 느껴지고, 익숙한 공원의 공간을 전혀 다른 감각으로 다시 경험하게 만든다.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는 언제나 영구적인 작품 대신, 일정 기간 후 사라지는 작업을 선택해왔다. <더 게이츠> 역시 16일 동안만 존재했다가 철거되었는데, 주황빛은 남겨지기 위한 색이 아니라,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시간의 색이었다. 붙잡을 수 없는 계절처럼, 지나가는 순간 속에서만 온전히 경험되는 빛이었다.
유럽에서 '오렌지'라는 단어가 색깔 이름으로 정착된 것은 15세기 말, 포르투갈 상인들이 아시아에서 과일 오렌지를 들여온 이후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노란 빨강'이라 불리던 경계의 색이었다. 유럽에서 주황색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나라는 단연 네덜란드다. 네덜란드의 상징이 오렌지색이 된 것은 독립의 아버지 빌럼 1세(오라녜 공작)의 가문 이름인 '오라녜(Oranje)'가 영어로 '오렌지(Orange)'였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압제에 맞선 독립의 상징이자 국가적 자부심인 네덜란드 역사의 오렌지색은 축제날이면 온 도시가 오렌지색 물결로 뒤덮이는 장관을 연출한다.
흐로닝언의 유로보르 광장에 있는 현대적인 오렌지색 아파트 건물, 네덜란드.
네덜란드에서 오렌지는 자연의 색이 아니라 선택된 색이다. 왕가의 이름에서 비롯된 이 색은 국가의 정체성이 되었고, 거리와 광장, 축제의 옷과 깃발 위에서 반복되며 하나의 집단적 감정으로 확장된다. 봄이 되면 튤립이 들판을 채우지만, 그 색조차도 자연의 풍경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가꾸고 선택해온 색에 가깝다. 오렌지는 여기서 풍경이 아니라 공동체가 공유하는 열의 색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튤립 파동은 단순한 투기의 사건이 아니라, 색이 욕망의 대상이 되었던 순간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더 희귀하고 더 강렬한 색을 가진 튤립을 찾아 나섰고, 그중에서도 따뜻하게 타오르는 듯한 오렌지빛은 특히 주목받았다. 훗날 네덜란드의 상징이 되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는 이미 자연 속에서 완전히 고정되지 않은, 끊임없이 변이하고 흔들리는 색이었다.
바이러스에 의해 꽃잎에 나타난 줄무늬와 색의 변화는 인간의 의도를 넘어선 우연이었고, 사람들은 그 불완전한 색에서 오히려 더 큰 가치를 발견했다. 그렇게 튤립의 오렌지는 단순한 꽃의 색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자연과 그것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욕망이 교차하던 순간의 색으로 남았다.
두브로니크 구 시가지의 오렌지색 지붕. 크로아티아.
두브로니크의 지붕들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거대한 주황빛 바다처럼 보인다. 아드리아해의 푸른 물결과 맞닿은 그 색은 단순한 건축 재료의 색을 넘어, 햇빛과 시간이 함께 만들어낸 풍경이다. 오래된 기와 위에 켜켜이 쌓인 계절과 바람,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빛이 그 표면을 따뜻하게 물들인다. 낮에는 눈부시게 밝고, 해 질 무렵에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색으로 가라앉으며 도시 전체를 하나의 온기 속에 감싸 안는다. 그곳의 주황은 눈에 띄기 위한 색이 아니라, 바다와 하늘 사이에서 오래 살아남은 시간의 색처럼 느껴진다.
유럽의 주황이 과일 오렌지에서 이름을 얻어 명랑함을 뽐낸다면, 일본의 주황은 수은이라는 독성을 품어 오히려 부정을 막고 생명을 지키는 '수호의 빛깔'이었다
차갑고 단단한 수은에서 피어난 뜨거운 주황색이 수만 개의 토리이(관문)가 되어 서 있는 풍경은 강렬한 종교적 숭고함을 더해준다.
일본 이나리 타이샤 신사 센본토리이의 등불이 걸린 도리이 길. 사진 Wikipedia CC BY-SA4.0
일본의 이나리 타이샤 신사에 끝없이 이어진 센본토리이의 오렌지빛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믿음의 색이다. 이 색은 사실 우리가 ‘주홍’이라 부르는 빛으로, 붉은색에 약간의 노란 기운이 섞인 따뜻한 색조다. 일본에서는 주홍빛이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신성한 공간을 지켜준다고 여겼고, 동시에 쌀과 생명의 신인 이나리에게 바치는 풍요와 햇빛의 색으로도 받아들여졌다. 나무로 만든 토리이에 이 색을 입히는 일은 단순한 채색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이어주는 문을 밝히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단순히 문 사이를 지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이루어진 경계 속을 천천히 통과하고 있는 듯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주황색은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녀왔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신화에 나오는 바쿠스나 디오니소스를 묘사한 그림에서 그들은 종종 주황색 옷을 입고 있는데, 이는 쾌락주의와 경박함을 강조하는 데 사용된 색이다. 동양문화와는 정반대다.
동양으로 시선을 돌리면 "샤프란 색"이라 불리는 짙은 주황은 불교나 힌두교에서 불의 순수함과 세속을 떠난 수행자의 정신을 상징한다.
힌두교도들에게 주황은 곧 신에게 닿으려는 염원이며, 불교에서 승려들이 입는 가사는 탐욕과 집착을 태워버린 뒤 남은 '지혜의 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화려한 장식보다는 가장 낮은 곳에서 구도를 실천하는 이들의 옷자락에 깃든 주황색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겸허하면서도 뜨거운 신앙심을 대변한다.
또한, 가사에 주황색을 사용한 데에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는데, 사프란이나 강황 같은 염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복궁 자경전의 꽃담.
서구의 주황이 강렬한 자기주장을 한다면, 한국의 주황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따스함에 가깝다. 붉은 전돌과 황토가 어우러진 궁궐의 꽃담은 인위적이지 않은 주황빛을 띤다. 해 질 녘 노을이 담장에 내려앉을 때, 흙과 벽돌이 뿜어내는 온화한 색감은 마음을 편안하게 감싸준다.
경복궁 자경전의 꽃담에 스며 있는 주황빛은 단순한 색채라기보다, 궁궐 안에 깃든 따뜻한 숨결처럼 느껴진다. 흙과 불이 만나 만들어낸 그 빛은 오랜 시간 조용히 쌓인 삶의 온기를 머금고 있다. 담장 위에 새겨진 꽃과 길상 문양들은 단지 장식이 아니라, 건강과 장수,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의 형상들이다. 꽃담의 주황빛은 눈에 띄기 위해 존재하기보다, 햇빛과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번지며 궁궐의 시간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그 앞에 서면 어떤 권위나 장엄함보다도, 오래된 집이 지니는 따뜻한 보호와 안락함을 먼저 느끼게 된다.
주황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흙'을 통해 구현되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정서는 사뭇 다르다.
서양의 테라코타 벽돌 - 툴루즈나 두브로브니크에서 볼 수 있는 주황은 뜨거운 가마에서 단단하게 구워진 결정체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명료하며, 푸른 하늘이나 바다와 대비될 때 화려함이 극대화된다. 그것은 문명의 승리이자, 태양에 맞서는 강인한 색이다.
한국의 꽃담 - 우리 궁궐과 사찰에서 만나는 꽃담의 주황은 훨씬 은근하고 부드럽다. 붉은 전돌과 황토를 섞어 쌓은 담장은 인위적으로 색을 입힌 것이 아니다. 흙 자체가 지닌 본연의 온기를 드러낸다. 해 질 녘 꽃담 앞에 서면 흙의 주황빛은 눈을 자극하지 않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준다. 서양의 주황이 '외치고' 있다면, 한국의 주황은 '속삭이고' 있는 셈이다. 서양의 벽돌이 햇빛을 튕겨낸다면, 한국의 꽃담은 햇빛을 품어 안는다.
한국의 고미술에서 주황은 쉽게 드러나는 색이 아니다. 화원이 그린 그림에 많이 쓰이던 색은 아니었다. 주황색이 테마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화훼도에서 꽃 색으로 사용하는 정도였다. 눈에 띄도록 칠하기보다, 불 속에서 스쳐 지나가거나 시간 속에서 천천히 배어 나오는 색에 가깝다. 도자기의 가마 속에서 잠시 피어오르는 불빛, 오래된 기와와 흙벽에 스며든 햇빛, 금빛 뒤에 숨어 다른 색을 떠받치는 단청의 바탕, 천연 염색에서 노랑과 붉음 사이를 머무는 중간의 색. 이 모든 것은 주황이 하나의 완성된 색이라기보다,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과정 속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색은 드러남보다 스며듦에 가까웠고, 주황 역시 그렇게 조용히 시간을 통과해온 색이었다.
조선 후기에 민화가 발달하면서 화초병풍에는 주황의 색이 많아졌다.
필자 미상 <화훼초충도> 조선. 비단에 채색, 26.3X25.2cm. 국립중앙박물관 동원2320.
필자미상 <민화화조도10폭> 한국. 비단에 채색, 한폭 94X32cm. 국립중앙박물관 증7507.
감은 처음부터 주황이 아니었다. 단단하고 푸른 색을 품고 있던 열매가 햇빛과 바람을 견디며 서서히 물들어 갈 때, 비로소 그 안에 따뜻한 빛이 차오른다. 떫은 맛이 사라지고 부드러운 단맛이 번져 나오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익었다’고 부른다. 주황은 완성된 색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천천히 만들어진 색이다. 손에 쥐면 쉽게 무너질 듯 물러진 홍시의 질감, 처마 밑에 매달려 바람을 견디며 깊어지는 곶감의 빛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한국의 주황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는 색이 아니라, 이렇게 오래 머물며 스스로를 바꾸어가는 시간의 흔적에 가깝다.
가운데 - 봉숭아 물들인 손톱.
여름날 마당에서 딴 봉숭아 꽃잎을 백반과 함께 찧어 손톱에 올리던 기억은 한국인만이 아는 주황의 정서다.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설화는, 이 투명한 주황빛을 단순한 염료가 아닌 '간절한 마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궁궐의 단청에 남아 있는 주홍빛은 나무를 지키고 시간을 견디기 위해 입혀진 색이었고, 부엌의 아궁이에서 타오르던 불빛은 삶을 이어가기 위해 꺼지지 않아야 했던 색이었다. 한옥의 창호지를 통과한 햇빛은 그 색을 더 부드럽게 풀어 방 안으로 스며들었고, 저녁이 되면 하늘은 같은 빛으로 천천히 하루를 닫아갔다. 한국에서 주황은 화려하게 드러나기보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오래 머물며, 사라지지 않기 위해 반복되던 색이다. 어떤 순간의 강조가 아니라, 시간과 함께 지속되며 삶의 온도를 유지해온 빛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주황색은 '생명을 구하는 색'이라는 실용적인 임무를 부여받았다. 자연 상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가시성을 자랑하기에, 주황은 망망대해의 구명조끼나 안개 자욱한 도로 위 공사 현장의 안전 표지판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는 예술가들이 열광했던 매혹적인 주황과는 또 다른 모습이지만, 가장 위험하고 긴박한 순간에 인간의 시선을 붙잡아 사고를 막고 생명을 보호하는 '친절한 경고'로서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주황이 시간 속에서 익어가는 색이라면, 이제 우리는 그 시간이 닿는 경계에 서 있는 색을 마주하게 된다. 다음엔 보라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2부 인간과 감정의 색
9화 보라색 - 죽음, 탄생,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