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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봄 Jan 07. 2021

007 아저씨와 목도리

   어지간하면 나가고 싶지 않네요. 뉴스도 신문도 하도 춥다 춥다 하니 현관문을 나서기가 무섭습니다. 이런 날은 하루쯤 학원을 빠져도 될 것 같지만 아이에게 먼저 그런 얘기를 꺼내면 안 되지 싶어 겹겹이 옷을 챙겨 입습니다. 아이도 저도 바람 한 점 들어올 틈이 없도록 옷을 여며 입고 집을 나섭니다.      



  한민족은 다시는 패딩 없이 겨울을 날 수 없을 거라던 우스갯소리가 마냥 흘려들을 이야기는 아닌 가 봅니다. 패딩 덕에 칼바람이 살에 닿지 않으니 영하 십몇 도라던 날씨도 견딜만하네요. 얼어붙어 밟을 때마다 빠드득빠드득 소리를 내는 눈 위를 골라 걸으며 아이와 한참을 웃습니다. 호기롭게 출발은 했지만 오늘 같은 날씨에 20분 거리를 왕복하는 건 역시 너무 추워요. 마스크 위로 드러난 이마와 광대 주위가 따가워지고, 장갑 사이로 스미는 바람에 손끝이 아려옵니다.   


  

  이런 날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요. 가슴 아릿한 추억이면 좋으련만 그런 건 아니고요, 어느 노숙자 아저씨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 시골 마을에서 몇 년을 살았어요. 읍내 인구를 모두 합해봐야 만 명이 될까 말까 한  정말 작은 동네였어요. 초등학교와 가장 번화한 오거리 주변은 손바닥만 해서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지나가는 사람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요. 당시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길에 가끔 마주치는 노숙자 아저씨가 한 분 있었는데, 항상 양복을 입고 있었어요. 시골마을에서 양복은 결혼식이나 장례식장에서나 입을 법한 복장이니 아저씨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지요. 게다가 어딜 가든 항상 검은색 007 가방을 들고 다녀 아이들은 그 아저씨를 007이라고 불렀습니다. 먼 산 보고 혼잣말을 자주 하고, 가끔은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해서 다들 아저씨를 무서워했어요. 저도 멀리 걸어오는 아저씨가 보이면 일부러 길을 건너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007 아저씨는 낮이면 읍내를 돌아다니고, 밤이면 기차역 대합실에서 잠을 잤어요. 부모님과 서울 나들이를 가려고 밤기차를 기다릴 때면, 대합실 난로 가장 가까운 나무의자에 누워 잠을 자는 아저씨를 보았어요. 다른 노숙자들은 짐 보따리도 꽤 크던데 아저씨는 단벌 양복에 007 가방이 전부였지요. 단출한 아저씨 짐은 겨울이 와도 마찬가지였어요. 보기만 해도 추운 회색 양복을 입고 달달 떨며 지나가는 아저씨가 어린 눈에도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며 집에 왔는데 엄마가 묻고 나서야 목도리가 없어진 걸 알게 됐어요. 7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프로스펙스 목도리 모자 세트였는데 몇 번 쓰지도 않은 새 것이라 무척 아까웠어요. 그런데 얼마 뒤 학교 가는 길에 마주친 007 아저씨가 내 목도리를 둘둘 감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내 목도리는 분명 하얀색에 양끝으로 빨간 무늬가 있는 것이었는데, 아저씨 것은 때가 타서 거무스름했지만 제 것이 틀림없었어요. 딴에는 좋은 것으로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에 엄마가 일부러 옆 도시에 있는 프로스펙스에 가서 사 오신 거였거든요. 차마 달라는 말은 못 하고 쳐다만 보았습니다. 사실 준다 해도 다시 두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요.


 

  아저씨는 그 겨울 내내 목도리가 시커멓게 될 때까지 하고 다녔어요. 가끔 아저씨를 볼 때마다 양복만 입은 것보다는 따뜻해 보여 다행이다 싶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을 마지막으로 다시 아저씨를 보지 못했어요. 어떤 아이는 007 아저씨가 다른 도시로 갔다고 했고, 어떤 아이는 아저씨가 죽었다고 했어요. 특별한 인연도, 가슴 아픈 기억도 아닌데 007 가방을 옆구리에 차고, 내 목도리를 두른 그 모습이 왜 지금까지 남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문득 그때 생각이 났어요. 오늘처럼 추운 날이면 이상하게 그 아저씨와 목도리가 떠오르거든요. 아마 너무 추워서 그랬을 거예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운 날이면 머릿속이 정지됩니다. 1분 1초라도 빨리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절박함 외에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지요. 현관문을 열고 우리 집 특유의 냄새와 훈훈한 공기가 코에 와 닿으면 그제야 마음이 풀어집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 엄마는 항상 같은 말을 하셨어요. 이렇게 추운 날이면 집 없는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누추해도 내 몸 하나 뉘일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게 참 좋네. 엄마 이야기를 듣고 자라 그런 가 지독하게 추운 날이면 엄마와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저를 발견합니다. 말끝에는 종종 내 목도리를 두른 그 아저씨가 있고요.     



  집에 들어와 따뜻한 물로 손을 씻고, 담요를 덮고 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면 얼었던 손가락과 귓바퀴가 녹으며 저릿해져 옵니다. 그런 순간에는 누구네 집 몇 억짜리 차도, 연예인 누가 산다는 수십억짜리 집도 부럽지 않아요. 편안히 앉아 몸을 녹일 수 있는 내 공간이 있음이 그저 다행스럽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 거리의 아이들과 집 없는 짐승들은 어디에서 잠을 청할 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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