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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피스 Apr 02. 2020

겨울나그네

성장기

나는 중2 때 사춘기를 시작했다. 나는 당시 짝사랑 중이었다. 한창 은수를 웃게 만들려는 궁리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변성기가 시작되고 몸 곳곳에 털이 나기 시작했다. 


난 크는 게 싫었다. 지금이 좋거나 아니면 더 어린 쪽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 몸은 그와 반대였다. 시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되면 어린 시절과는 영원히 이별이라 생각하니 두려웠다. 


나는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수학여행에서 애들과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를 토론했다. 당시 나는 종교가 없었다. 그래도 내 몸이 죽는다고 영혼까지 없는 건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몸이 죽어도 영혼은 다른 태아 속으로 들어가 새 삶을 시작한다고 믿었다. 나는 처음 간 곳인데 때로 전에 간 적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냐고 말했다. 그게 바로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며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영원히 살 수 없다. 어른이 되면 어린 나의 순수한 마음은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일부러 산타가 있다고 믿으려 했고, 엄마 아빠도 늙지 않고 그대로 있기를 바랐다. 나는 중2 학생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나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 가운데 추석이 되었다. 추석 때 차례를 지내고 할 일이 없어 삼촌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독일이 통일된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나는 별로 흥미가 없어 채널을 돌렸다. 7번에서 KBS 미니시리즈 ‘겨울나그네’가 방송되고 있었다. 


나는 민우와 다혜가 대학교 교정에서 우연히 자전거 사고로 만나는 모습이 좋았다. 남녀가 운명처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수줍게 바라보기만 해도 좋고, 서로 존댓말을 하며 손만 잡아도 행복하다. 나는 둘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그냥 현실이 저렇게 아픔 없이 유지됐으면 했다.


낙원은 오래가지 않았다. 민우는 술집 여자인 제니와 동거를 하고 애까지 낳는다. 다혜도 민우를 기다리다 지쳐 민우의 친구 현태와 결혼한다. 결혼한 다혜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다. 그냥 하루하루 애정 없는 남편과 사는 모습. 그것이 정말 어른의 모습이란 말인가. 나는 그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또 민우는 어떠한가. 술과 담배에 중독되어 살고, 거기에 마약 거래까지. 그는 경찰에 단속되자 이를 피하려다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 정말 어른이 되는 것은 저렇게 추하고, 비극적이어야 하는가.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게 사춘기 나의 모습이었다. 또래 여느 남학생처럼 음란물을 보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중학교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고3 때의 일이다. 집 앞 독서실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연극영화과 지망생이었는데 모범생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혼자 보라며 검은 비닐봉지를 주고 갔다. 그 안에는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다. 순간 나는 음란물임을 직감했다. 고민하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내가 현명한 결정을 해 다행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난 왜 이럴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나는 항상 대학생 민우를 생각했다. 다혜의 집 가로등 밑에 서서 다혜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가곡 ‘보리수’를 읊조리던 민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성문 앞 그늘 아래,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꾸었네’


책상에는 항상 한자로 순수(純粹)라고 쓰면서 어른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마치 어딜 가던 카메라가 나를 바라보며 내가 어른의 행동을 하는지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왜 그랬나 싶다. 이해가 안 가기도 한다. 나는 지금도 가끔 ‘보리수’를 흥얼거린다. 나름 순수했던 나의 사춘기로 돌아간다. 마치 열병같이 몸이 뜨겁고 마음이 간절하던 그때로 말이다. 드라마 ‘겨울나그네’는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다.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그나마 영화에 밀려 더 사라진 작품이지만.


커가면서 점점 사춘기 때의 그 다짐은 잊혀 갔다. 나도 어른이 되어 버렸다. 마치 민우가 술집 생활에 젖어 들어 각종 나쁜 짓을 한 것처럼. 이제는 너무 멀리 와 버려 돌아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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