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피스 Apr 14. 2020

입학생 대표

성장기

중3 사춘기인 학생들의 시선이 온통 교실 앞으로 쏠렸다. 교생 선생님이 처음 교실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단발머리셨는데, 키가 상당히 작았다. 걸을 때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음에도 교탁 위로 얼굴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교생 선생님이 자기소개를 한 후 반 아이들에게 질문하라고 했다. 다들 처음 보는 선생님이 쑥스러운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이 나를 가리키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 뒤쪽에 앉은 학생, 손을 들어줘서 고마워.” 

“선생님 키가 몇이세요” 


선생님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계셨다. 아이들이 수군거리고,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나는 선생님을 놀리면 아이들이 재밌어할 거 같았는데 반응이 내 기대와 달랐다. 나는 무안했다.


나는 반에서 주목받고 싶었다. 엄마와 같이 학교 다니던 초등학교 때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반에서 인기투표를 하면 언제나 최상위였다. 중학생이 되자 나는 평범한 아이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 내 멋대로 하는 습관이 남아 있어서 좀 재수 없는 아이였다. 


그런 내가 반 아이들에게 인정받는 방법은 반에서 1등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때는 중학생이 요즘처럼 공부를 많이 하는 때가 아니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 기간이 되면 열흘 전부터 벼락치기로 공부했고, 그 정도만으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학급에서는 원하는 결과가 나왔지만, 전교 등수는 별로 좋지 않았다. 중3 때 전국 모의고사의 등수는 몇천 등이었다.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는데 좋은 성적이 나올 리 없었다.


그래도 그건 나에겐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반에서 매일 보는 아이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우리 반 이외의 아이들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어느덧 중학교 졸업 때가 되었다. 당시에는 서울과학고 빼고는 특수학교가 없는 고교 평준화 시대였다. 과학고는 과학 영재들을 위한 곳이고, 막 설립되던 외고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나는 그냥 배치되는 고등학교에 가기로 했다. 추첨 결과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집 근처 학교에 가게 되었다. 동네 쌀집 아들인 준서는 강남의 영동고가 됐다며 좋아해 좀 부럽기도 했다. 


입학할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달리 남학교인데, 군인처럼 머리를 박박 깎고, 교복을 입어야 했다. 나도 미리 동네 이발소에서 ‘스포츠’ 머리로 깎고, 학교에서 준 흰 와이셔츠에 자주색 넥타이를 매고 칙칙한 색깔의 줄무늬 교복을 미리 입어보았다. 정말 암울했다. 


부모님은 고등학교는 잠시 거치는 곳이고, 대학이 중요하다며 이제 진짜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이 지하철을 타고 시내 교보문고에 가 ‘수학의 정석’, ‘맨투맨 기본영어’ 등 책을 잔뜩 샀다. 그때 처음 대학 배치표란 것도 보았다. 수많은 대학과 학과가 있고, 맨 꼭대기에 서울대 법대, 정치학과 등이 나와 있었다.


나는 대학입시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반에서만 인정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부모님이나 아이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교, 전국의 아이들과 대결을 해야 했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반에서 인기를 얻기 위해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시절은 끝났다. 이제는 아이가 아닌 어른이 되었고, 갑자기 인생이 심각해졌다. 나는 마치 고등학교가 감옥처럼 느껴져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입학식 며칠 전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고등학교에 입학하려면 고입 연합고사를 봐야 했는데, 내가 전과목에서 한 개를 틀려 입학생 수석이니 입학식에서 대표로 선서를 하라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가문의 영광이라며 이제 좋은 일의 시작이라 했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 입학도 하기 싫은데 대표로 나서서 뭘 하는 게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었다. 


긴장되던 입학식은 별 기억이 없다. 그냥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맨 앞에 나와 선서문을 읽고 들어간 게 전부였다. 나는 강당 스피커로 들리는 내 목소리가 평소와 달라 신기했을 뿐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근데 진짜 괴로운 건 다음부터였다. 각 과목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나를 알아보고 “네가 선서한 애니”하고 아는 척을 했다. 고1 담임선생님은 투표도 생략하고 나를 반장으로 임명했다. 모두의 기대가 너무 컸다. 나는 숨이 막혔다. 


고등학교 첫 시험을 봤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전교 등수는 10등 밖이었다. 나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중학교 때와는 다른 각오로 시험 준비를 했지만, 등수는 비슷했다. 선생님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입학생 대표에 어울리는 성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담임선생님이 시킨 반장 노릇도 해야 했다. 다른 반과 달리 투표도 없이 임명된 나는 뭔가 떳떳하지 않았고, 반 아이들도 나를 인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선생님이 교실에 없으면 학생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엉망인 반 분위기에 담임선생님은 반장이 그렇게 통솔력이 없고, 소심하냐며 나를 나무랐다. 


나는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지만, 점점 실망과 무시만 당하는 것 같았다. 점차 자신감이 사라지고 상처 받을까 무서워 타인에 대한 관심을 없앴다. 그러면서 성격도 내성적이고,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이때 형성된 성격이 그 후 나를 계속 지배해갔다.

작가의 이전글 돌마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