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나를 안고 울던 그날
식당은 엄마의 건강악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쇠락해져 갔다. 모든 일은 공을 들여야 하건만 엄마는 몇 번의 큰 뇌수술을 했으니 체력이 떨어질 만큼 떨어져 있었다. 공을 들여야 할 것은 그녀의 건강이었는데. 젊고 체력 좋은 사람도 매일 아침부터 문을 열어 저녁까지 하루종일 불 앞에서 음식을 하고 쪼그려 앉아 설거지를 하고 재료를 다듬는 고된 일은 당해내기 힘든 노동임을 상식적인 수준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 힘든 일을 엄마는 뇌수술을 몇 번이나 하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해내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마지막 뇌 수술을 한 후에도 아빠는 당연한 듯이 엄마를 식당 주방으로 내몰았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매일 아침 주방에 서서 고된 식당 주방일을 했다. 도저히 식당일을 할 수 없었던 잠깐의 기간 동안 주방장 역할로 다른 아주머니를 채용한 적도 있지만 엄마의 손맛으로 이끌어 온 우리 식당에 그런 대안이 적중할리 없었다. 주방장 월급도 주고 우리 생계도 이어가야 하니 당연히 적자가 되었고 아빠는 엄마를 다시 주방으로 불렀고 엄마는 '당신이 예전에 하던 버스기사라도 다시 하면 안 되겠냐'라고 울면서 읍소했으나 아빠는 미동이 없었다.
이때 엄마는 기력을 잃어갔고 무엇보다 '시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노안이 되어 녹내장이나 백내장 같은 치료가 충분히 가능한 질환이었을 텐데 우리 집에서는 '아프다'라는 소리가 죄가 되는 분위기라 더 이상 어디가 아프다고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와중에 매일 눈치만 보는 여고생이었다. 지금이었다면 안 가겠다는 엄마를 데리고 어떻게 서라도 병원 진료를 받게 했을 텐데. 소용도 없는 후회와 원망이 지독히도 나를 괴롭힌다.
엄마는 식당에, 나는 식당에서 2분 거리의 집에 있던 어느 날.
"배달 가야 되는데 아빠는 아무리 전화해도 안 받고, 배달시킨 데서는 언제 오냐고 난리야. 내가 배달 갔다 올 테니 너 잠깐 내려와서 식당 좀 지키고 있어." 전화를 받고 귀찮은 마음을 부여잡고 식당에 내려갔고 엄마는 배달을 나갔다. 여고생이었던 나는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 보다는 창피함이 앞서던 터라 차마 내가 배달 쟁반을 들고 가겠노라고 하지 못했다. 그렇게 배달 간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데 엄마가 안 온다. 아빠도 당연히 안 오고.
한참이 지나서야 엄마가 돌아왔고, 나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순간 길을 잃어서 너무 무서웠다고 하며 엉엉 우는 엄마의 그 서러움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엄마는 그때부터 조금씩 인지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듯하다. 그 큰 뇌수술을 4번이나 하고도 정신력으로 버텨내던 엄마였는데, 눈이 안보이면서 엄마는 급격히 우울감에 빠지기 시작했었다. 그러다가 매일 다니던 길에서 문득 '여기가 어디지? 집에 어떻게 가는 거였더라?'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식당에 무사히 온 엄마가 다행이고 안쓰럽고 그리고 불쌍했다. 힘든 몸이었지만 그렇게 여전히 무던히도 자신과 가족을 일으키기 위해 혼신의 정신력으로 살고 있는 엄마였다.
그날 느지막이 아빠가 돌아와 왜 이렇게 전화를 하냐고 화를 냈다. 어디선가 술에 취해 와서는.
정신과에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은 정작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들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라는 말이 백번이고 만 번이고 이해가 되는 순간들이 나의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우리 가족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