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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실과 흰 장미(4)

4. 의인

         


               4. 의인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는 여호와에게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도시를 멸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아브라함처럼 내 인생의 의인들을 세어 본 적이 있었다.

그 이름이 다섯 개만 돼도 살인을 멈추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중학교 때 도시락이 교실 바닥에 떨어지며 김치뿐인 반찬통이 깨져서 국물이 쏟아졌을 때 웃지 않았던 인간이 있었나? 눈을 감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웃었고 담임은 분명히 얼굴을 찡그렸다. 어떤 아이는 나지막이 욕설을 뱉었고 여자아이들은 코를 막았다. 그 교실에 의인은 없었다. 손톱만큼의 측은지심도 없었다. 잔인한 아버지의 인생에도 단 한 명의 의인이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도둑질을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의 필통에서 연필, 지우개 나부랭이들을 슬쩍슬쩍 훔쳤다. 하지만 그 전엔 아니었다. 누구의 물건도 훔친 적이 없었다.      


내 가방 속은 늘 더러웠다. 변변한 연필 한 자루 없이 학교들 다녔다. 가족 중의 누구도 내 필통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연필이나 지우개 크레파스 등을 사기 위해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해도 엄마는 돈을 준 적이 없었다. 기본적인 문구류들이 늘 부족했다. 


물론 단지 연필이 없어서 훔쳤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알록달록 화려한 연필과 지우개가 탐이 났었던 것이 맞았을 거다. 잘 깍인 연필들과 지우개와 칼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필통을 볼 때면 필통을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아이의 엄마 또는 누군가가 연필을 깍아서 가지런하게 채워놓았을 필통을 볼 때면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부러뜨리고 싶었고 갖고 싶었다. 변명은 않겠다. 몇 번을 말해도 그건 도둑질이 맞다. 하지만 4학년 때 형석이의 돈 3만 원을 훔친 것은 절대 내가 아니었다. 그 돈은 형석이랑 가장 친한 민규가 훔쳤었다. 나는 그걸 봤다.


민규는 근방에서 제일 부자 동네에 살았고 걔 지갑엔 늘 지폐가 들어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을 끌고 문구점으로 가서 이것저것 고르라며 아이들에게 선심을 쓰던 아이였다. 그런 민규가 형석이의 가방에서 돈을 훔치는 것을 봤을 때 나는 놀랐다. 나와 눈이 마주친 민규는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지긋이 쏘아 봤다. 돈을 훔치고도 당당한 민규의 눈빛에 나는 주눅이 들었다. 


민규 무리들은 내가 형석이의 돈을 훔쳤다고 말했고 담임도 그 말을 들었다. 나는 훔치지 않았다. 훔치지 않았다고 말할 때 민규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담임은 몹시 따분하고 게으른 사람이라 이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노력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대충 묻고 넘어가려 했다. 누구라고 범인을 지목하지 않은 채 대충 넘어갔기에 내가 범인이 아닌 것도 아닌 것이 됐다. 그 사건이 유야무야 넘어가면서 나의 도둑 누명은 풀리지 않았다. 억울하다고 울부짖었을 때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억울하냐?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 니 애비 같은 놈을 만난 내가 제일 억울하다.”      


내 인생에서 엄마도 의인이 아니다. 아니 가장 악인이 바로 엄마였다. 

단 한 명의 의인의 이름도 적을 수 없었고 이것이 내가 살인을 멈출 수 없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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