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침과 분침을 잃은 시계의 뻐꾸기는 더이상 울지 않는다.
나는 이제 반오십, 스물다섯, 이제는 제법 자주 사회인으로 오해받는 나이. 그렇지만 사회인으로 나설 준비는 하나도 하지 못한 (혹은 않은) 졸업학년.
잘 하는 거라고는 주어진 걸 공부하는 것뿐이라서 대학에 다니면서 얻은 거라곤 학점뿐이다. 그거라도 챙겨서 다행이야,라기엔 다른 건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나 나름대로 알찬 학창생활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과 나란히 하기엔 나는 이력서가 텅 비어있다.
분명 다들 처음 살아보는 삶일 텐데, 어디서 그렇게 잘 배워와서 능숙한 어른이 되어버리는 건지. 나는 아직도 처음조차 경험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냈는데,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건 시간이라는데, 왜 내 삶의 시계만 너무너무 촉박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시침과 분침, 초침까지 주어진 것 같고 누군가는 시기에 맞춰 적절한 알림까지 띄워주는 디지털 시계를 갖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시계에는 제대로 된 시침, 분침이 없다.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는 건 타인의 시계가 째깍째깍 울릴 때나 이따금씩 어마어마한 굉음으로 중요한 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줄 때뿐이다. 오래되어 시간을 표기하지 못하는 내 시계의 뻐꾸기는 이제 창문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어차피 뻐꾸기의 시야를 밝힐 해는 내 하늘에 뜨지 않는다.
그나마 내 시계가 고장났다는 걸 깨달은 뒤로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애쓰는데, 이미 뒤처져버린 내 시간을 되돌리기엔 시간은 역시 공평했다. 나는 내 시간을 벌어진 간격을 따라잡는 데 쓰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그 시간을 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 데 사용한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고 갈수록 넓어지기만 하는 크레바스를 앞에 둔 채 탐험이 좌절된 모험가가 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