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만식 Jan 23. 2024

믿음의 공식은 없다

어느 때부턴지 '공식'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마음이 불편하다. 특히 신앙과 관련해선 더욱 그렇다. 성공주의를 부추기는 자기 계발 용어 같아서다. 그래서 가끔 무슨 신앙의 공식이나 믿음의 공식을 말할 때면 불편한 마음이 든다. 그러면서 내 속에 질문이 인다. '선생님, 궁금해서 그런데요. 신앙에 공식이 있는 건가요?' '선생님, 믿음에 공식이 있나요?'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요, 선생님이 알고 계신 신앙의 공식, 믿음의 공식은 무엇인가요? 혹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라고 말이다.



사실 공식을 말하는 분들의 구체적인 설명을 들어봐야 그 의도와 말하려는 바를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정답을 떠나 이런 류의 표현 그  자체가 불편하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여러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해들 가운데 첫 번째는 신앙이나 믿음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신앙에 정답이 있는  것일까?'' 또 '믿음의 정답이 있는 것인가?' 설령 있다 해도 우리가 정의하는 그 신앙과 믿음이 정답이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



내가 또는 타인이 아무리 정답이라고 인정해 준들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앞에 마지막 날 서봐야 알 수 있지 않는가? 사실 우리는 은혜로 사는 이들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날마다 살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삶도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순간을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기에 어떤 믿음, 어떤 신앙의 공식을 말하게 되면 그 공식이 우선하는 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신앙의 공식, 믿음의 공식은 이원론 공식을 양산한다. 믿음의 공식이 있다면 역으로 세상의 공식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양비론에 빠지고 만다. 사실 세상은 죄로 오염되었다. 하지만 그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세상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곳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도, 세상을 사랑하신 이유에서였다.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의 공식, 신앙의 공식이라는 말보다는 삶의 방식이라는 표현이 낫지 않을까?



공식이라는 말은 언제나 예외의 사건이 발생할 때 그 한계를 드러낸다. 사실 신앙의 공식, 믿음의 공식도 그러하다. 이런저런 공식이 있다고 확신하고 붙드는 이상, 그 공식에서 벗어난 날 것, 야생의 그 무엇, 신앙과 믿음의 틀로 포획하지 않은 근본적 결핍에 부딪힐 때 그 공식은 무너지고 만다. 그러기에 공식이라는 표현은 올바르지 않다.  성경적인 표현도 아니다. 신앙에 공식은 없다. 믿음도 공식은 없다. 우리는 그저 은혜로 살뿐이다. 신명기법(신 28장)이 있음에도 욥기가 있는 이유이다.



말씀묵상도 믿음의 공식, 신앙의 공식일 수 없다.

작가의 이전글 팝콘에 기대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