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것
1층에 사는 건 장단점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주민들이 1층에 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하는 얘기가 다 들린다. 빵 터지게 웃긴 애들 대화도 들리고 전화기에 대고 지르는 일방적인 소리도 다 들린다.
오늘의 소리, 엄마와 아이의 대화였다.
-너 유치원에서 애들이 블록 쌓은 거 막 무너트리고 그러지 마. 싸워서 이기는 건 이기는 게 아니야.
-......(유치원생이겠다. 보나 마나 남자아이가 그려지는 건 나의 편견)
-너 진짜 이기는 게 뭔지 알아?
-......(나도 기대됐다. 뭐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은 안 할 거라 생각했다. 유치원 생이니까.)
-진짜 이기는 거는 유치원에서는 착하게 굴고 집에서는 공부 열심히 하는 거야.
-......
띵! 2초 정도의 긴 시간 동안 두근두근 기대했는데 들려오는 답이라니....... 순간 마음이 복잡했다. 아 그렇지. 우리 어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이긴다는 말이 누군가를 내려다보고 누군가를 움직이고 또 무언가를 최대한 많이 가졌을 때 주로 사용되긴 한다. 승리를 하려면, 이기려면 일단 공부는 기본이고 게다가 착해야 한다. 그러니까 어른들 기준으로는 얼핏 들으면 아주 올바르고 예쁜 정답 같다. 아이가 저렇게 해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상상만 해보는 것이지만 하루 정도는 참 기분 좋을 것 같다.
아이들의 세상에서는 어떨까.
아이들의 세상에서는 승패가 없어 보인다. 방금 죽도록 울던 아이가 곧장 폭소를 터트리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보였던 아이가 작은 티끌 때문에 슬퍼한다. 이기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른들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이기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있으니까. 계속 살기 위해서. 친구가 되는 과정은 싸움의 연속인 것 같다. 배려하고 생각해주고 양보하는 과정에서만 친구가 생길 수 있을까. 서로 이토록 다른 환경에서 가치관에서 자란 아이들이 한 곳에 모여 안 싸운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일 텐데. 끝없는 배려로 얻어낸 '친구'는 언제까지 '친구'로 남을 수 있을까. 친구가 하나도 없다면 우리는 살 수 있을까.
높이 블록을 쌓았다. 누가 무너트려준다면, 그 누구와 아이는 꼭 친구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내 아이가 블록을 무너트렸다면
'너 걔랑 놀고 싶었구나?'
'너 걔가 미웠구나?'
'너 이기고 싶었구나?'
'너 장난꾸러기구나?'
이런 생각들은 맑은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며 쓱싹쓱싹 차근차근 지운 다음
이렇게 물었으면 좋겠다.
"블록 무너졌을 때 무슨 생각 들었어?"
아이들의 저마다 다른 대답은 분명 엄마 마음을 쿵...... 울리고 말 거다.
우리는 그 대답에 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