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길이가 낮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
밤공기가 시려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껏 세시 반이었다. 밤을 기다리다 저녁에 잠이 든 탓이다. 휴대폰을 키니 부재중 전화 두 통이 와있다. 그 애였다. 나는 비몽사몽 한 채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블루라이트가 두 눈을 찔러 전화가 올바르게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뚜르... 뚜르... 여보세요. 전화했었네. 오늘 하루의 첫마디였다. 목이 푹 잠겨 쉰 목소리가 났다. 그 애가 큭큭 웃었다. 놀림거리가 되는 건 별로지만 그 애가 웃는 것은 좋다. 그래서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나는 여태 잠을 자지 않은 것이냐고 물었다. 그 애는 그렇다고 했다. 그 애는 자꾸 잠을 안 잔다. 나는 조금 걱정이 된다.
침대에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어 머리맡이 푹신했다. 꼭 그 애를 베고 누워있는 것 같다. 두두둑. 둑. 비 내리는 소리가 방으로 꼼짝없이 넘어왔다. 계절을 구분 짓기라도 하듯 가을장마가 오고 있다. 긴 장마가 끝이 나면 여름이 사라진 채 가을이 올 것이다. 나는 그 애에게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 애는 좋아했다. 나보다 세 살이 어린 그 애는 황급히 나이를 먹고 싶어 한다. 그것은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아닌, 그 애의 고유한 속성이었다. 그 애는 보기에 어리다. 짙은 화장이라든지 가슴 파인 옷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 애는 그런 게 스트레스라고 하였다.
나는 그 애의 이야기를 들으며 엊저녁에 빨아놓은 가을이불과 베개피를 갈아꼈다. 그리고 머리맡에 먹다 남은 생수를 꿀꺽꿀꺽 들이키고, 기다란 밤을 이불 삼아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 그 애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잠을 자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그 애는 술을 적당히 마셨다고 했다. 나는 그 애를 싫어하진 않지만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친구와 소주 두 병을 마셨고 기억이 나진 않지만 집에 무사히 돌아왔다고 하였다. 나는 잘됐다고 했다. 잘했다고 했었나, 기억이 희미하지만 '잘'이라는 말을 하긴 했던 것 같다. 같이 술을 마신 친구는 동갑내기 남자인데 그 애는 그냥 친구일 뿐이고, 때문에 섹스를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나는 굳이 그런 걸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 애는 오늘 무얼 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 애는 그걸 부러워했다. 자신은 하고 싶은 걸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하루를 어떻게 채울지 잘 모른다고 했다. 나는 스무 살에 그런 걸 찾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 애는 좋아했다. 좋아했나,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꿈을 찾지 않고 하루를 낭비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얘기했다. 그것은 겨울의 새벽에 해가 뜨기를 바라는 것과도 같다며 알게 모르게 그 애를 꾸짖었다.
어언간 비가 서서히 그쳤다. 날이 추워졌다. 나는 가을과 절기를 설명했다. 이맘때는 밤이 낮보다 길어져 하루가 어쩌구저쩌구. 이야기는 몹시 지루해졌다. 그래서 고등어, 호박고지, 깻잎과도 같은 제철음식을 이야기했다. 그 애는 먹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또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어릴 적 몸이 아파 입원한 이야기, 전 애인과의 불화, 좋아하는 계절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 대화의 온도가 좋다. 그건 꼭 가을과도 같아.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춥기에, 가을의 온화는 일종의 도피처가 된다. 그 이유로 가을은 보편의 취향이 된다.
아침이 되자 해가 떴다. 문장의 인터벌이 늘어졌다. 그 애는 잠에 들었다. 나는 나갈 준비를 했다. 세수를 하고 옷을 껴입었다. 오전에는 일을 했고 점심으로는 닭가슴살을 먹었다. 다를 게 없는 뻔한 일상이었다. 단지 모든 날이 유독 가을의 새벽이었으면 좋겠다고 남몰래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