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밤엔 무작정 음악을 틀어놓습니다. 그리고 연소시간이 길게 남지 않은 양키캔들을 켭니다. 푸른 향이 비스듬한 주변을 가득 채웁니다. 음악은 잡념과 함께 연소합니다. 침묵은 하나의 언어가, 여백은 드넓은 공간이 됩니다. 기억이 서서히 연쇄 작용을 펼칩니다. 생각은 종착이 아닌 이전을 거듭합니다. 허투루 적은 문장이 완성됩니다. 제목 없는 글이 늘어 갑니다.
문장을 지은 후엔 단어를 한 땀 한 땀 음미합니다. 서걱서걱 형태소를 토막내어 그 의미를 골똘히 마주합니다. 이렇게 단어 하나를 오래 붙잡고 있다 보면 고약스레 상한 냄새를 종종 맡을 수 있는데, 그 기원은 결국 사전적 의미로 종착합니다. 단어의 의미를 온전히 헤아릴 수 있다는 사실은 저술이 지닌 아주 큰 장점입니다. 문장과 함께 고스란히 완성되는 나의 마음을 발견합니다.
그 과정에서 원형과의 괴리를 파악합니다. 본연의 형체를 잃어 또 다른 본연을 갖추어 가는 모습을 외람되이 상실이라 표하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또 다른 본연은 곧 원형이 됩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 과정에 '생애'라는 이름을 붙여봅니다. 누군가의 생애는 어떠한 사전에도 명시되지 않기에 오로지 내가 의미를 지어야 합니다. 이를 테면 그 이의 이름이나 말투, 행동과 같은 본바탕 말이죠.
주름은 삶의 흔적입니다. 습관은 중복된 종적입니다. 여러 생애를 마주할수록 여러 의미를 배우게 됩니다. 옹알이를 막 시작했던 소녀가 허리 굽은 할망구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연과 형용을 거쳐갔을까요.
타다닥- 바이닐 소리와 불꽃의 화음이 따끈하여 자칫 화상을 입을 것만 같습니다. 나는 음악과 캔들, 그리고 스탠드 조명을 끕니다. 방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습니다. 또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도 허전함을 느끼진 않습니다. 언젠가는 고요에 적응을 할 테니까요. 실은 나는 이런 걸 알아채지 못할 만큼 몹시 둔합니다. 책상 위의 자명종은 엉뚱한 시각을 가리키고 있고, 히비스커스 차를 따른 유리컵은 손잡이가 깨져 아래를 받쳐 사용해야 합니다. 이외에도 애써 불편을 감수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16인치 맥북보다 마라톤 타자기로 느리게 글을 쓰는 편입니다. 만년필과 수정액으로 첨삭을 하여 엄지엔 잉크가 늘 마르지 않습니다. 커피포트보다 주전자로 차를 끓이는 편이고 디지털 북이 낯설어 항상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닙니다.
모든 것이 편의해진 시대에서 누군가는 저의 생활 양식을 의미 없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계가 사라져도 시간은 흐릅니다. 컵이 깨져도 목이 마릅니다. 활자는 여러 매체 속에서 보존되고 차는 오래 끓일수록 그 향이 깊어집니다. 이렇듯 변치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동시에 변치 못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10년 전 아끼던 친구에게 선물로 받았던 시계라든지, 돈을 모아 어린 마음으로 부모님께 사드렸던 컵이라든지. 가령 생애 동안 착실히 쌓아둔 자질구레한 형용사는 함부로 대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그것이 제 기능을 상실했다고 하여도 나는 그 존재 자체로 의미를 부여하겠습니다.
나는 불필요한 것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무려 아주 넉넉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