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 노인이 말했다. "인간에게 파멸은 있어도 패배란 있을 수 없어" 놈을 죽인 건 어부로서의 자긍심 때문이고, 너가 어부기 때문이지. 너는 놈이 살아있을 때도 놈을 사랑했고, 죽은 후에도 역시 사랑했어. 놈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죽인 건 죄가 아니야>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은 줄기차게 혼잣말을 한다. 그것도 절대 굴하지 않는 절대 긍정과 강력한 희망으로.
김욱동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다>를 보니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는 파멸 당해도 정신적으로는 패배하지 않는 산티아고의 모습이라 했다. 즉 노인은 물질적 가치보다는 정신적 가치, 결과보다는 과정, 목표보다는 수단과 방법에 묻게 싣는 인물이라 했다.
< 폼롤러로 허벅지 반죽 시작. 앞과 옆은 여전히 소 달구지 끌고 가는 시골길처럼 울퉁불퉁하군. 특히 이쪽. 어제 이 곳에 힘 실어 살았던 모양이야. 수건과 두손에 이끌려 찌릿찌릿 전기 신호를 보내는 햄스트링. 왼쪽은 시멘트 발라놓은 땅이 굳은 것 같고 오른쪽은 아직 촉촉한 느낌이네. 문제 없어. 똑같이 만들어 줄 테니.
오로지 중둔근만 겨냥하는 거야. 앞벅지고 햄스트링이고 절대 나서게 놔둘 순 없어. 명중. 그래 좋아. 무대 조명이 중둔근만 비친 것처럼 그렇게 다리를 올려 보라고. 좀 더 좀 더, 헤밍웨이가 왼손에 쥐가 날 때 팔씨름에서 이긴 걸 회상하면서까지 사투를 벌였잖아. 그렇게 쥐어 짜 보라고.
옆쪽에서 여성 두 명이 "120만원 주고 열 번 끊어서 받아 봤더니 우리 딸 얼굴이 요만해졌어. 거기 피부과 가봐. 좋아" 라는 큰 소리가 내 귀에 꽂혀도 다시 근육으로 돌아와, 그렇지. 허벅지 안쪽 내전근에 불 들어왔어. 자, 이제 다리를 들어올려. 누가 봐도 올리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게 올리는 거야. 중요한 건 치골(음부뼈)부터 무릎 안쪽까지 타들어 가는 넓적당면 같은 내전근이니. 내전근이 불닭볶음면을 먹은 것도 같고 물파스를 잔뜩 쳐 바른 것 같고. 그 느낌 좋다고 신나게 다리 내리지 말고 천천히 근육을 놓아줘. 인생은 힘 빼는 게 더 중요하잖아>
내전근을 온전히 느끼는 중
헬스장 맨 끝 구석 자리. 회사 사무실에서 뺀 책상은 이 자리로 대체 됐다. 오전과 오후 내 지정석이 됐다. 타깃 근육에 적중하는 순간엔 세상과 나, 단 둘만 존재한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현재 만을 몰입하는 것처럼.
그러다 일상에서 또 다시 통증이 나타날 때면 자유를 만끽한 감각에 날이 선다. 몸을 넘어 정신까지 질책 한다. <아침의 피아노>를 쓴 철학자 김진영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함을 잃지 않는데.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나오는 "대체 제게 왜 이러는 겁니까? 왜 저를 이렇게까지 만든 겁니까? 대체 왜 저를 이렇게 끔찍이도 괴롭히는 겁니까?"와 동일시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노인과 바다>를 만났다. 내 인생의 최고의 책, 지금을 살게 하는 지침서가 되었다. 혼잣말이 바뀌었다. 상어떼 어디 덤벼봐라, 난 무찌르는 방법을 알거든? 식으로 통증을 대하고 있다. 내일은 좀 더 나은 세포로 거듭, 아니 더 쌔진 놈으로 탄생할 테니 잘 지켜보라고 중얼댄다.
어부라서 청새치를 잡고 상어에게 모조리 뜯겨 돌아 왔어도 단지, 어부라서...
난 의자에 장시간 앉아 일을 하는 사무원이라서 매일 똑같은, 200번에 달하는 다리 올리기를 하루 두 번씩 마땅히 한다. 나보다 훨씬 늙고 연약한 그도, 84일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그도 당당히 해냈으니. 숭고함을 담아 오늘 오전도 임무 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