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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Nov 25. 2022

손을 들고 질문을 하다

사실 오늘 마지막 수업은 가지 않으려고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지 않고 싶었다. '진리, 정의, 자유를 향한 인문학적 성찰'이라는 요상한 제목을 가진 이 강의는 매주 문학, 과학, 철학 등 각 분야의 교수님들이 돌아가며 강의를 하시는 수업이다. 중요한 건 이 강의가 pass or non pass(일정 분량 이상 이수하면 패스, 그렇지 못할 경우 논패스로 성적이 매겨지는 것) 강의라는 것, 그리고 1주일에 한 번 장장 3시간 동안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총 13번의 강의 중 10번만 출석을 채우면 더 이상 강의를 들으러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나는 이미 9번을 채운 상태라 꼭 오늘 수업을 들으러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너무 계산적인 사고일 수 있겠지만, 학교로부터의 쉬는 시간이 절실했던 나에게는 꼭 필요한 사고였다. 3시 15분, 통계 수업이 끝나고 같이 '진리, 정의, 자유~'(이하 진정자) 강의를 듣는 친구들이 '오늘 수업 갈 거야?'라고 물어봤다. 그렇다. '오늘 수업 가자'가 아닌 '오늘 수업 갈 거야?'였다. 


그 말은 내게 선택권이 있다는 말이었다. 오늘 수업을 듣고 깔끔하게 10번 출석을 채운 후 다음 주 수업은 관대한 마음으로 들을지 말지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다음 주 수업을 들을 것이냐. 무척이나 피곤한 하루였지만 나는 전자를 택했다. 실은 지난주에도 진정자 강의를 안 들었기 때문이다.(이렇게 말하면 학교 자주 빠지는 사람 같겠지만 의외로 출석은 잘한답니다. 학교 다니는 목표가 '출석하기'니까요!) 그렇게 난 오늘 마지막 강의를 듣게 되었다.


첫 번째 연대 교수님의 강연은 사실 잘 와닿지가 않았다. 일본 사무라이 시대에 대해 설명을 하시는데, 영어와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 사용하셔서 내용이 하나로 통합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흠 사무라이 시대에는 저랬구나'하고 듣고 있었다. 두 번째 고대 교수님의 강연 때 나는 뭔가 눈이 뜨이는 느낌을 받았다. 교수님께서 아주 매혹적인 제안을 하셨기 때문이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 오늘 강연을 통해 여러분에게 어떻게 시를 읽고 좋은 시를 구별해내는지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시 읽는 법!! 그것은 내가 이때까지 알고 싶어 했고 또 혼자서는 어렵다고 생각한 분야였다. 그래서 교수님께서 좋은 시의 조건으로 '자기 초월', '자기희생', 그리고 '자기 존중'을 이야기하셨을 때 나는 '오호!' 하는 마음으로 두 눈을 (아마도) 반짝반짝 빛내며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가지 궁금증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잠깐만... 그러면 자기 연민, 자기 연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보통 문학계에서 '자기 연민'이라고 하면 자신에게 너무 매몰된 글을 비판할 때 부정적인 어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그게 항상 의문이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글쓰기의 순기능이 아닐까? 어떤 글은 '일기장에나 써라'라고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이 욕설이나 누군가를 비방하는 글로 채워진 것이 아닌 이상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글도 세상에 공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부분을 q&a 시간 때 질문하고 싶었다. 무척이나, 마음 가득히 진심을 담아 여쭤보고 싶었다. (그건~ 진심~이~었어~) 하지만 단 한 가지 문제는, 내가 자발적인 발표를 하기 이전에 심장이 매우 쿵쾅쿵쾅 뛴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워낙 자주 발표 전에 이런 증상이 있다 보니까 나름대로 가설도 만들어봤다. '발표를 하면->사람들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될 거고->다른 사람이 내 말을 어떻게 평가할까 두렵다->그래서 심장이 뛴다' 이게 1번째 가설이고, '발표를 하면->내 생각이 다 까발려진다->선생님(혹은 교수님)의 마음에 드는 생각이 아닐까 두렵다->그래서 심장이 뛴다' 이게 2번째 가설이다. 내 생각엔 이 두 가지 가설 모두 타당한 근거가 있다. 


대학생이 되었다고 다르지 않았다. 쿵쾅쿵쾅 나 여기 있어 하고 분명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심장. 교수님께서는 '질문할 사람 없나요?'하고 질문을 던지고 계시고 나는 손을 들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다른 사람이 먼저 손을 들어버린다. 아아. 기회를 놓쳤구나. 다음 기회를 노려보자! 또다시 질문 타임이 돌아오고 또다시 망설이는 시간이 찾아온다. 손을 들까 말까 망설이는데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손을 들었다. 총 10번의 진정자 강의에 참여하며 처음으로 내 의견을 말하기 위해 100명이 넘는 사람들 속에서 손을 들었다. 조교님이 전달해주신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는 아름다웠고, 감동적이었다. 


10번의 강의를 듣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도 발표를 해 보고 싶다. 언젠가는.' 그동안의 바램이 닿았을까? 오늘의 발표는 '발표 한 번 했구나'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엄청난 것을 해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게임에서 주인공이 몬스터들을 무찌르고 레벨업을 해서 다음 필드로 넘어가듯... 


'손을 들고 질문을 하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일, 심지어 지루한 일이 될 수도 있지만(실제로 그런 사람을 만나봤다) 나에게는 하나의 도전과제처럼 남아 있는 일이었다. 그 일을 오늘 해냈다는 것에 (그것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오늘은 기념할 만한 날이다. 또 조금의 성장을 해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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