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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Apr 25. 2023

도서관 일대기

오늘은 제가 사랑하는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해요. 저는 거의 모든 종류의 도서관을 좋아하는데요, ‘거의‘라고 말한 것은 이제까지 가 본 도서관은 모두 좋았지만 앞으로 갈 도서관이 어떨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사실 ‘거의’라는 말은 괜한 말인지도 몰라요. 제가 도서관을 일방향적으로 사랑하는게 조금은 수줍어서 널 완전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거의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몰라요.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제가 4살 무렵이었을 때부터 저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고 해요. 고모가 그러기를, 저는 놀이터에 갈 때도 꼭 한 손에 책을 들고 갔대요. 그네에 앉아서 몸이 흔들리는 기분 좋은 안정감을 느끼며 책을 쫙 펼친 후 읽었다네요.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을까요. 비록 책을 거꾸로 든 채였지만요. 제가 망아지처럼 뛰어놀기를 좋아하던 7살 무렵에 엄마는 아주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어요. 엄마는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이었는데,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영어 강의를 하기도 했답니다. 엄마가 공장에서 막 퇴근한 후의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신기해요. 엄마는 고작해야 30대 초반이었을 텐데 공장 일의 피로함 때문에 졸기도 하고 영어 공부에 그닥 관심이 없는데 억지로 끌려온 사람들을 어떻게 어르고 달래서 공부를 시켰을까요. 그 중엔 두 눈이 총명하게 빛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그 사람들은 영어를 배워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런 상상을 하다가 엄마가 저와 2살 어린 동생을 데리고 도서관에 가는 모습을 상상해요. 어떤 일이든, 특히 남을 가르치는 일은 꾸준한 공부가 필수이겠지요. 당시 엄마는 영어 자격증 준비를 하느라 거의 매일같이 도서관에 갔다고 해요. 그런데 아뿔싸! 이 두 아이는 어쩌죠? 하는 수 없이 도서관에 데려갈 수 밖에 없겠네요. 엄마가 아동관 한쪽에서 영어 공부를 하는 동안 저와 동생은 도서관 이곳저곳을 헤집으며 이 책도 봤다가 저 책도 봤다가 엄마한테 책을 들고가서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뭔지 굳이 보여주기도 하고 그랬겠지요. 다행히 저희는 엄마가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낌으로 알았는지 엄마한테 책을 읽어달라고 조르진 않았어요. 각자 좋아하는 책을 들고 소파에 앉아 더없이 편안하게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요.


8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날은 무려 16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요. 아빠의 손을 잡고 갔을 거예요. 선생님들은 학년과 반이 적힌 흰색 팻말을 들고 운동장에 서 계셨어요.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1학년 0반(몇 반이었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팻말 앞에 서서 뒤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빠를 향해 손을 흔들었어요. 아빠, 나 뭔진 모르겠지만 유치원에서 졸업했어. 이제 초등학교 잘 다녀볼게. 흥분과 긴장으로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두 뺨으로 손을 흔들었겠지요. 예전에는 나의 마음밖에 몰랐는데 이젠 아빠의 마음을 상상하게 돼요. 첫째 딸을 초등학교로 떠나보내는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다 키웠네 싶어서 뭉클하면서도 어딘가 시큰한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아빠의 걱정과 다르게 저는 9살때부터 학교 도서관 선생님과 가장 친해졌어요. 그 때 저희 학교가 독서교육특성화학교였나 그래가지고 도서관도 깔끔하게 리모델링이 되어있었고 복도 끝에도 미니 도서관이 있었어요. 미니 도서관에는 푹신한 소파와 3층짜리 작은 서가가 있었고요. 수업 종이 땡하고 치자마자 누가 먼저 그 소파 자리를 차지하느냐는 중대 문제였어요. 짧은 쉬는 시간에 저는 미니 도서관 소파에 가장 먼저 앉아 있다가 가장 나중에 떠나는 아이가 되었고, 긴 점심 시간에는 훨씬 큰 학교 도서관에 찾아갔어요. 학교 도서관에는 저학년들이 책을 보는 공간이 따로 꾸며져 있었는데 저는 그쪽을 향해 퓅 하고 콧방귀를 한 번 뀌어준 다음에 고학년이 보는 책들이 가득한 서가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죠. 그 때 제가 주로 보던 책들은 판타지 소설이었어요. 제로니모부터 위험한 대결, 타라 덩컨 등 상상력을 몽실몽실 자극하는 책이었어요. 큰 도서관에선 자리 선정부터 달라졌어요. 평소엔 소파 자리를 애용하다가도 책 읽는 기분을 내고 싶다 하면 기다란 바 테이블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어요. 의자에 올라가기도 힘들었지만 일단 올라가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어요. 손으로 종이 질감을 쓸어내리면서 후각은 종이의 냄새에 집중하면서 글자를 휘리릭 삼키듯이 읽어내려가다보면 수업 종은 언제나 제 예상보다 일찍 울리곤 했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저는 도서부를 6년동안이나 하며 도서관과 친하게 지냈지만 그 얘기는 하지 않을래요. 당시 도서부는 ‘도서노동부’로 불릴 만큼 팔뚝의 힘이 중요한 동아리였어요. 신간책을 나르고 교과서를 옮기고 반납한 책을 꽂다 보면 어느새 점심 시간이 지나있었고 제 팔은 너덜너덜해져 있었거든요.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도서관이 미워지기도 했어요. 사실 너무 많은 책과 부족한 사람 수가 미운 거지만요.


저는 대학생이 된 지금도 도서관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이번엔 동아리가 아니라 ‘근로’를 하고 돈을 받고 있어요. 한 때 사서가 꿈이었던 사람으로서 이만큼 좋은 직업 체험의 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일을 하면 할수록 저는 사서가 되지 않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기립성 저혈압이 있거든요.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에요!(별표 다섯 개) 사서가 되면 책을 꽂아야 하는데 책장 아랫칸에 있는 책을 꽂으려 앉았다 일어서면 머리가 핑 돌고 어지러우니 둘리가 머리를 얻어맞고 별을 보는 거랑 똑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반납하고 간 책을 다시 꽂을 때 어떤 사람이 이 책을 빌렸을까 상상하는 것은 꽤 재밌답니다. 똑같은 책 두 권이 반납함에 있다면 이런 상상을 해 보아요. 주인공은 중년의 아주머니 두 명. 두 명은 친구다. 도서관에 같이 왔다가 두 명 다 우연히 좋아하는 책을 발견했는데 같은 책이다! 오 우린 취향도 잘 맞아 이거 같이 빌리고 어땠는지 얘기해보면 좋겠다. 그렇게 반납되어진 쌍둥이 책. 혹은 책 제목을 보고 빌린 이의 생활을 추측하기도 해요. 아동이해에 관한 책을 빌린 사람은 어쩌면 아동과 관련된 일의 취업준비를 하는지도 몰라. 혹은 현직 교사인데 교실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의 심리를 이해하고 싶은거야. 그렇게 한 권 한 권 꽂다보면 어느새 북트럭엔 남은 책이 없….진 않고 많이 남아있어요. 평일 오후 도서관의 일은 끊이질 않아요.


제가 사랑하는 도서관 이야기를 적다 보니 엄마 이야기, 아빠 이야기, 학교 이야기, 일 이야기까지 나와버렸네요. 지금 누군가 제 앞에 앉아서 제게 도서관을 사랑하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것 같아요. 도서관을 이루는 모든 물질과 비물질이랍니다. 책, 그 책과 관련된 사연을 상상하는 것, 도서관에서 영어 뉴스를 보는 어르신들을 관찰하는 것, 도서관의 조용한 분위기, 그 속에서 사부작사부작 뭔가를 하는 사람들. 간간이 들려오는 프린터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도 거슬리지 않아요. 모두 이 도서관이라는 세계 속에 속해 있는 것 같아서요. 도서관에서 나오면 갑자기 주변의 소리가 의식되듯이, 도서관 안은 또 하나의 세계인 것 같아요. 저는 이 세계를 사랑합니다. 이 세계 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 제 모습도 사랑합니다. 아픔이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고 사라질 순 없겠지만, 치료법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이기도 하지요. 결계가 쳐진 듯한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영원히 많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요. 종이책과 책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아 제가 꾸준히 도서관을 방문하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소망을 담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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