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걱정되기 시작한 지사장......
어딘가 허술하고 엉뚱해 보이는 줄 알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파키스탄 지사, 작지 않은 조직의 수장. 머리. 대가리. 끝판왕. 공장장. 지사장(가끔 나도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이 거대 조직의 수장을 하고 있는 건지 신기해할 때가 많다).
우리 공장은 업종 특성상 24시간 돌아가는 곳이라서 인력 관리가 매우 중요한 곳이다.
어느날 유능한 중앙제어실 직원 한 명이 사표를 냈다. 사우디아라비아 취업 비자가 나와서 돈 더 많이 벌어오겠단다.
중요한 보직에서 근무하던 직원이며 그 간 말썽 안 피우고 성실하고 유능했는데 아쉽네. 이 나라(=파키스탄)에서 현지 직원들에게 해외취업 비자는 꿈이다. 해외취업 비자가 나오는 순간 막을 길이 없다. 연봉이 몇 배가 차이가 나는데 나 같아도 나가겠다. 참고로 파키스탄의 2025년 국가 최저 임금은 월간 3만 7천 파키스탄 루피. 2025년 3월 현재 환율이 1루피 = 5.1원 정도 하니까, 환산하면 월 19만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이다. 심지어 이 마저도 감시가 가능한 공공영역에서나 지켜지지 민간영역에선 안 지켜지는 경우가 허다하다(그거 안 줘도 일하겠다는 지원자가 널리고 널린 탓이기도 하다).
이 나라 자국민에겐,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해외로만 나갈 수만 있다면 연봉이 몇 배가 뛴다. 그런데 대졸자가 바로 해외취업하긴 하늘에 별 따기니까 국내 기업 중 평판이 높은 곳에서 경력을 조금 쌓고 링크드인 같은 곳에서 줄구창창 자기 홍보를 뛰며 해외콜을 받고 취업비자가 나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바이바이 해버린다.
하아... 그런데 저 자린 구직자 아무나 채용할 순 없고, 전문교육도 필요하고 지식도 경험도 중요하고 관리자한테 보고 요령도 중요한 자린데 어떡하나.
내부에서 인력운영 관련 인사위원회를 시행했다.
위원회는 지사 하위보직 중에서 똘똘하고 쓸만한 친구를 자격검증 거친 후 면접시험 봐서 내부채용을 하고 하위보직은 외부에서 채용하자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사내 공고문을 고지하고 자격검증 후 내부 면접고사일 당일.
면접관들이 먼저 자리 잡고 있는 면접장에 인터뷰 지원자가 들어왔다.
내 역할은 면접관장. 면접이 편파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중재하고 공정성과 합리성을 두루 갖추도록 하는 역할. 전체 진행도 내가 끌고 간다.
간단한 자기 소개 시키고, 그 간의 경력과 특기 등 기본적인 질문을 한 후에, 이미 제출한 보직 지원서 내용을 짧게 구두로 브리핑해 보라는 주문을 내렸다.
그런데.
나는 사실 이 친구가 지원한 보직 지원서를 이미 사전에 다 읽어보고 면접장에 들어갔다. 보직에 관한 매우 자세한 Job Description(한국어 단어가 기억이 안 나서 네이버 찾아봄. '직무기술서' ㅠㅠ)과 역할, 의무가 카테고리를 나눠서 매우 잘 작성되어 있길래, '와아~ 요즘 친구들, 글 솜씨가 나보다 낫네~' 하며 아주 만족해하며 면접장에 들어갔었단 말이다.
아무리 면접장에서 긴장하고 얼어있어도 지가 쓴 글 지가 요약도 못해? 암만 생각해도 수상해수상해.
그거 말고, 기술적 질문에 대해선 70~80% 수준으로 답변을 잘하길래 면접관 최종 평가 수렴을 거쳐 내부 채용 합격으로 결론을 내리긴 했는데... 아무래도 뭐가 찜찜.
"면접관님들, 가지 마시고 잠시 웨이트. 아니, 저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이 중에 누가 저 친구 보직 지원서 작성 도와주신 분이라도 계신가요?"
"아... 그게... 지사장님, 아마도 저 친구 오늘 너무 많이 긴장해서 그랬을 수 있습니다."
"아니, 보직 지원서는 이렇게 항목 구분 잘하고 기승전결 잘 써왔는데 그거 반에반도 설명 못 하는 게 말이 되나요? 나 아무래도 이거 대필 냄새가 좀 나는 것 같은데?"
"그게, 지사장님...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그 보직지원서, 100% 다 믿으시면 안 됩니다. 요즘 친구들 대부분이 ChatGPT 도움을 받아서 작문할 겁니다."
머릿속에서 큰 종이 데엥~~~
시대가 정말 생각보다 빨리 변하고 있구나.
AI가 지식산업에 조기 침투하고 있다는 뉴스는 많이 봤어도 피부로 체감하고 있진 못하는 직종에 있어서(기름 만지는 엔지니어링 산업 현장이라서) 아직은 강 건너 남의 일인 줄 알았는데 이런 사내 지원서 문서조차 AI가 쓰일 수 있다니.
뭐, 물론 그 친구가 스스로 생각하고 작문했는데 순간 얼어서 일순간 어버버 했을 수도 있지만, 수 차 릴랙스 시키고 보강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못 그런 걸 보면 본인의 작문이 본인 머릿속에 없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는 지사장. AI 대필을 의심하는 타당한 배경.
봄방학이 끝나가던 무렵, 한국에 있는 딸아이가 긴급히 나를 찾는다.
아이들이 나를 찾을 땐 뭔가 요구사항이 있을 때지.
"아빠, 나, ChatGPT 유료계정 하나 해 주면 안 돼?"
"아니 딸이 왜애? 아빠도 무료계정 가끔만 쓰고 대부분 검색엔진 해결하는데? 그냥 무료 써. 직업인 아닌 다음에야 그걸로 충분해. 아빠도 유료 안 써."
"아이 참. 무료계정 맨날 답변도 대충 해주고 몇 개 물어보면 막히고 짜증나서 못 쓰겠어. 나 딱 한달만 쓰게 해줘요. 친구들도 다 유료계정 있단 말이야!"
"왓더??? 리얼리??? 아니, 학생이 ChatGPT 쓸 일이 대체 뭐가 있는데?"
"그거, 수학문제도 풀어주고, 영작도 해 주고, 글 요약도 해주고 얼마나 쓸 데가 많은데!"
여전히 딸내미를 신뢰 못하는 아이 아빠는 딸아이와 한 시간을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백기.
요구사항 들어주는 걸로. 다만, 개인 구독은 너무 비싸니 ID 공유사이트를 뒤져서 공유계정 사용하는 걸로 합의.
......
그래놓고 며칠 뒤에, 공유계정에 살콤 들어가서 요 녀석이 뭐 하며 사용하나 봤는데...
검색엔진으로 사용하는 거 태반에... "○○○○○ 도서 독후감 작성하기" 시키기!
아놔.
어째야 되나 머리가 혼미하지만,
이미 태반이 AI에게 독후감 숙제를 하도급 주는 세상이라면 그 또한 받아들여야 하겠지.
근데 그렇게 적응되어 버린다면 글 쓰는 재미가 뭔지 평생을 모르고 살 텐데.
그건 그거대로 또 걱정인데.
AI는 생각보다 주변에 이미 깊숙하게 침투해 있다.
누군가 그랬다.
머리 아픈 일 대신 잘해주는 AI가 반갑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찜찜한 이 느낌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