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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Apr 20. 2022

파키스탄 행 출국 당일

2021.12.21.화요일 이야기

 한동안 내 방을 안 쓸 거니까 최소한의 정리를 하고 가야 했다. 널려있는 짐은 최대한 집어넣고, 여름에 비치한 습기제거제는 싹 버리고, 침구는 세탁해서 덮어놓고 가야 곰팡이가 안 슬 거고. 배게커버랑 침대커버 벗겨다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오전에 다 빨고, 건조기 돌리면 출발 직전까지 딱 맞겠네. 정말 시간을 쪼개 써야 하는 당일이다.


 오늘은 딸이 재택수업하는 날이라 학교에 안 갔다. 늦은 아침을 차려다 딸이랑 같이 먹었다. 마지막 집밥이구나. 왠지 짠 한 맘이 든다.


 마누라가 꼭꼭 꼭 당부하고 간 게 있다. 화장실 청소는 해놓고 가랬다. 마누라는 화장실 결벽증 같은 게 있어 자기만의 화장실을 쓰고 싶어 한다. 원래 그렇게 내 화장실, 마누라 화장실 분리해서 썼었는데, 애들이 생기니 애들이 마누라 화장실만 쓰려했다. 상대적으로 내 화장실보다 깨끗해서. 그리고 엄마니까. 그런데 이제 큰 아들내미가 어른 티가 나기 시작하니 남자는 남자화장실 쓰라고 했는데 내 화장실이 지저분해서 싫단다. 그래, 청소하고 가야 뒤탈이 없지. 금방 하고 가지 뭐.


 10~20분이면 뚝딱 마칠 것 같던 화장실 청소가 맘먹고 하려니까 끝도 없다. 아니, 청소 안 하던 곳이 아니었는데, 막상 검사요원(=마누라)한테 보여줄 생각을 하니 여기도 지저분하고 저기도 더럽다. 한 번 건드리기 시작하니 변기, 세면대, 개수대, 바닥 타일 할 것 없이 모두 손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청소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 다 못 끝냈다. 화장실 청소하다 기차 시간 놓치나 걱정될 정도였다. 이미 출발도 하기 전에 힘들어 죽겠다. 아, 나 공항까지 갈 수는 있을까?


 청소 대충 끝낼 때쯤이 되니 건조기에서 건조 완료 소리가 들린다. 다행히 시간 안에 침구 세탁도 끝냈다. 침구 걷어다 침대커버를 이불 위로 대충 덮어놓고 먼지 앉는 걱정도 끝냈다. 중간에 귀국하면 도로 자야 하니 소홀히 해두고 갈 수 없지.     


 이제 출발 한 시간 남았다. 마지막 짐 체크를 해야 한다. 절대 안 가져가면 안 되는 것부터. 여권, 비자, 달러, 스마트폰, 노트북 및 충전기. 나머지는 혹시 빠뜨리고 오면 거기 가서 사면 될 거다. 필수 품목 확인하고 뚜껑 덮었다. 이제 모르겠다.     


 큰아이가 학교에서 조퇴했다. 아빠 배웅하러 빨리 왔단다. 한동안 내가 없다는 게 많이 서운한가 보다. 큰애는 영화 “모가디슈”를 보고 나더니 나 보내는 걱정이 한층 더 심해져서 벌써 어떻게 사는 환경인지 수백 번도 더 물어보고 있다. 아들아. 아빠도 아직 안 가봤거든요.... 가서 얘기해줄게요. 아빠도 사실 조금 걱정되지만 다 사람 사는 곳이야.


영화 모가디슈 포스터. 큰아들은 이 영화를 보고 아빠 해외근무지에 대한 상상을 완전 감정이입 해버렸다.


 차에 짐을 실어야 하는데 오늘처럼 마음 급한 날 차가 멀리 있다. 빈 몸으로 차부터 가까이 대 놓고 아이들 둘 다 동원해서 트렁크 세 개를 굴려 실었다. 내가 저걸 과연 공항까지 굴려갈 수 있을까? 공항까지 도착만 하면 대형 무료 카트가 있으니 문제없지만, 그 사이 길이 관건이다. KTX 역사에서 공항철도 역사까지 거리가 상당히 될뿐더러 오르고 내려가는 일이 많다. 어쨌든, 트렁크 세 개 차에 싣는 미션까지도 성공.     


 “아빠, 잘 다녀와~ 나 이제 학원 갈게~”     


 딸이 외투를 차려입고 학원 간다. 엥. 아빠 환송해주는 거 아녔어? 음... 학원도 중요하지. 그래 다녀와~. 기차역사에서 안 떨어질 거라고 앙앙 우는 것보단 나은데 너무너무 쿨해서 살짝 서운한 맘도 조금 들고... 암튼 우리 딸은 너무 쿨하다. 항상 그렇다.     


 출발시간 딱 맞춰 마누라가 조퇴했다. 오후 14:34분 진주발 서울행 KTX. 오후 2시에 집에서 역사로 출발. 아들은 뒤에 타고 마누라가 운전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미리 손가방에 넣어둔 생수병을 꺼냈다. 조금만 안 흔들릴 때 뚜껑 따야지 하면서 도어포켓에 잠시 보관. 역사가 그다지 멀지 않아 15분에 도착했다. 이제 열차만 오면 그냥 타면 된다. 모바일 구매, 디지털 승차권. 편리한 대한민국이다.     


 나, 아들, 마누라 각각 트렁크 하나씩을 끌고 기차 짐칸에 올려 실었다. 사실 KTX 수하물 규정에는 1인당 두 개의 트렁크만 허용된다. 혼자 이동이 불가한 짐이 수십 개라면 중간역에 못 내리지 않는가. 합리적인 규정이다. 짐 세 개라고 역무원이 뭐라 그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수하물 칸도 넉넉하고 역무원이 쳐다보지도 않는다. 다행이다. 안 쫓겨나겠네. 1차 미션 성공.     


 이제 열차가 슬슬 출발한다. 마누라랑 큰아이가 계속 손을 흔들어주다가 큰아이가 기차를 따라 뛰어온다. 어, 앞 안 보다가 넘어지면 큰일 나는데. 다행히 그 정도로 따라오는 건 아니고 플랫폼을 넘어서니 더 따라올 길도 없다. 이제 진짜 출발이다.     


떠나는 기차를 끝까지 따라오며 손 흔들어주는 큰아들... 마음이 짠하다.


 휴... 이제 한국에서 해야 할 마지막 미션이 있다. 통신사 바꾸기. 나는 진작에 중고폰 + 알뜰폰 최강 조합이라 통화 무제한에 데이터 4.5기가인데도 월간 전화요금이 만원대 초반으로 무척 저렴하다. 그래도 2년간 해외에 있을 건데 그 요금도 내기 싫어 내가 쓰던 통신사는 최저요금제가 그래도 좀 비싸다(비싸 봤자 몇천 원). 그래서 좀 더 알아보니 타 통신사에 이벤트 요금으로 0원짜리가 있다. 1년 한시 적용이고 1년 후에는 월 3,000원 정도의 비용이 청구되는 요금제지만, 국내에서 통화할 일 없이 한국 문자만 받으면 되는 나한테 딱 맞는 요금제였다. 미리 집에서 개통하자니 통화 및 데이터 비용을 미리 지불하게 될 것 같아 나가기 직전에 개통하려고 해당 통신사 유심칩을 미리 사서 가지고 왔다.     


 본격적인 작업 하기 전에 물부터 마셔야지. 아침 겸 점심 먹고 아무것도 못 먹고 못 마셔서 목이 탄다. 물이 어디 갔더라. 어. 없다. 내 물. 어딨어. 아차... 아까 차에서 마시려고 꺼내기만 했다가 도어포켓에 두고 왔구나. 내가 그렇지... 물만 두고 왔겠어... 뭐 더 두고 왔겠지. 몰라... 여권만 있으면 돼.     


 물은 건너뛰고, 통신사 바꾸자. 준비한 유심칩을 꺼냈다. 유심만 있으면 안 되지. 유심 오프너도 꺼내.... 어? 어디 갔어? 유심만 있고 유심 오프너가 없다. 분명히 유심포장지에 같이 넣어두었는데, 가만 보니 유심 포장지 반대편에 걸이용 구멍이 난 상태라 그쪽으로 흘렀다. 어디서 흘렀지? 유심 오프너가 철사조각 하나인데 그게 보일 리가 있나. 큰일이네, 기차 도착하기 전에 통신사 바꿔야 하는데 어쩐다.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가진 물건 중에 철사처럼 뾰족한 게 뭐가 있더라? 스테이플러 찍힌 문서? 없는데? 치간칫솔? 음. 잘하면 될 수도 있어. 치간칫솔 찾아서 유심트레이 구멍에 넣으니 들어가긴 한다. 그런데 너무 힘이 안 들어가서 휘기만 하고 실패. 음... 이름표 옷핀이면 되겠다. 승무원 이름표를 아까 봤으니 지나가면 조금만 빌려달라고 해야지 하다가, 아, 나도 명찰 가져왔어~ 생각이 나서 가방을 뒤져보니 있다. 있다 있어. 역시 죽으란 법은 없어. 생각하면 다 길이 있어.     


 유심 셀프 개통은 반드시 와이파이 환경에서 해야 한다. 기존 통신망이 끊긴 상태에서 개통 정보를 입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KTX는 와이파이 된다고 해서 여기서 하려고 했는데 내 자리 와이파이가 안 된다. 헉. 아니 왜. 역무원이 지나갈 때 와이파이 안 된다고 신고를 하니 내 폰을 들고 이래저래 만져보더니 이상하다면서 와이파이 되는 구역으로 자리를 바꿔준댔다. 그런데... 역방향이랜다.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그냥 다른 칸 잠시 가서 하고 올게요. 아 오늘 왜 이렇게 힘든 날인가. ㅠㅠ


 내 자리에선 안 되던 와이파이가 옆 칸으로 가니 된다. 암튼 그렇게 월 전화요금 0원짜리 통신사로 옮겼다. 통신사만 옮기면 안 되고 또 하나 단도리해야할 일이 있다. 로밍데이터 차단. 고객센터 통화해서 로밍데이터 원천차단 신청하고 준비 끝냈다. 이렇게 하면 로밍은 문제없이 되어서 한국 MMS는 받을 수 있지만 데이터요금은 한 푼도 안 낸다. 힘들었지만 나름 뿌듯하다. 통신비로 내 아까운 돈을 낭비할 수 없지. 아임 파인 언틸 나우, 쏘 파 쏘 굿. 아직까진 양호하다.     


 17시 51분. 정확히 서울역 도착. 나는 도착 10분 전부터 초조해진다. 많은 승객들 사이에서 트렁크 3개를 내려야 하는데. 혼자서는 불가능. 다행히 하차 준비 중인 주변 승객들이 흔쾌히 도와준다. 대한민국은 좋은 곳이다. 트렁크 세 개 내리는 미션까지 성공. 이제 KTX 플랫폼에서 공항철도 플랫폼까지 이걸 옮겨야 하는 오늘 최고 난이도의 미션이다. 준비한 고무줄을 꺼냈다. 트렁크 두 개를 하나로 합치도록. 낑낑대고 줄을 묶으려고 하고 있는데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이 대형 카트를 밀고 와서 말을 툭 건넨다. 


“이거 옮기실 거예요?” 


어, 이 분은 누구지? 역사에 이런 서비스가 있었나? 


“아, 네네. 공항 가려구요.” 

“7천 원만 주세요.” 


하더니 익숙한 솜씨로 내 짐을 카트에 차곡차곡 쌓아 꽁꽁 묶는다. 알고 보니 나처럼 KTX역사에서 공항철도역사로 대형 수하물을 옮겨주는 단거리 쉐르파 서비스가 있었다. 역사에 딱 두 분 있다고 했다. 나는 운이 좋았던 케이스. 딱 필요한 시점에 딱 필요한 분이 도와주러 오셨다. 트렁크 세 개를 얼기설기 쌓아 거의 몇 개의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거쳐 수백 미터를 걸어야 하는 길인데, 사실 엄두가 안 났다. 옮기다 너무 힘들면 하나씩 두 개씩 두 번 옮겨야지 생각했던 일이었다. 대한민국인데 설마 트렁크 길에서 잃어버리겠어 생각하면서. 노트북 트렁크 잃어버리면 두 개 합쳐 단가만 거의 400만 원짜린데 난리 날 텐데 하면서. 서울역 쉐르파 어르신의 도움으로 공항철도 역사까지도 무사히 왔다. 7천 원 달래는걸 고마워서 1만 원 드렸다. 마지막까지 공항 제1청사 내릴 때 재빨리 안 내리면 큰일 난다며 신신당부하고 가셨다. 무슨 말이냐면 공항 제1청사 역시 종착역이 아니라 하차 시간이 매우 짧은데, 거기서 한 번 내리고 다시 타서 두 번 내리고 하지 말란 소리였다. 그래서 딱 출입구에 트렁크 세 개를 줄 세우고 가는 내내 몇 번을 하차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볼링공 굴리듯 짐부터 밖으로 굴려놓고 나가야지. 하면서.


KTX 기차역 - 전철역을 연결해주는 쉐르파 선생님이 계신다.


 공항 제1청사 역 도착해서 무사히 짐도 내렸다. 역은 평탄하고 역사 나가는 길까지 엘리베이터 쓸 수 있어서 혼자 트렁크 세 개 가져가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기대한 대로 드디어 대형 카트를 만났다. 미션 90% 성공. 카트에 짐을 다 때려 싣고 골프백 찾으러 갔다. 과연 잘 도착했을까? 안 오면 두고 간다는 생각으로 보냈는데, 잘 도착해 있다. 그런데 뭐가 좀 이상하다. 공항청사 영업플랫폼에 내 짐이 있는 게 아니고 그냥 대합 공간 벤치에 직원이 직접 내 짐 하나만 갖고 앉아있다. “아니, 제 짐 하나 때문에 이렇게 나오신 거예요? 원래 여행사처럼 영업 플랫폼이 있던 거 아녔어요?” “아, 그게, 원래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너무 손님이 급감해서 철수해서 그래요. 짐이 있을 때만 이렇게 나와요.” 음, 뭔가 맘이 좀 짠했다. 그러면 짐 값 5만 원이 비싼 게 아니지. 진짜 쉐르파 고용한 거네... 감사하는 마음으로 골프백까지 수령했다.     

 집에서 공항까지 짐 이송 미션 성공. 힘들구나. 다음에는 미리 싸서 택배로 보내고 이런 고생 말아야지. 이것도 다 경험이다. 안 해봤으니 알 수가 있나.


공항 제1청사역 출구에서 만난 공항카트. 이제 살았다. 사실 저걸 혼자 대중교통으로 옮길 수 있는 부피는 아니긴 하지...


무사히 공항 청사에 도착한 골프백 긴급 공수 서비스


 아침 겸 점심 먹고 죙일 아무것도 못 먹고 쫄쫄 굶었더니 배고파 죽겠다. 뭐라도 좀 먹자. 대형 트렁크는 가져가든가 말든가 그냥 대합실에 방치해놓고, 4백만 원짜리 노트북 트렁크만 밀고 공항 4층 식당가를 올라갔는데 뭔가 휑하다. 아니, 저녁 8시도 안 되었는데 태반의 음식점이 문을 닫았다. 아, 출발 전 강제 단식인가. 마지막 한식도 못 먹고 출발하나? ㅠㅠ 다행히 한식당 한 군데가 아직 영업 중이다. 해물된장찌개를 시켜 먹었는데 공깃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평상시 같으면 밥값 비싸다고(공항 밥 비싸다) 투덜댔을 터인데, 오늘은 밥을 팔아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맙던지.


코로나 시대. 식당가에 사람이 없다. 태반의 식당이 문을 닫았다. ㅠㅠ
그래도 굶지 않았다. 쫄쫄 굶다 먹은 밥이라 공깃밥 한 그릇 추가로 더 시켜 먹었다.


 도로 대합실로 가서, 가져갔을 리 없는 트렁크와 골프백을 도로 찾아가다 무게측정을 해봤다. 수하물 접수창구에서 돈 더 낼 수는 없지 않은가. 역시 사전에 집에 있는 체중계로 대강 무게를 맞춰온 짐들이라 1.3kg 정도의 여유만 남기고 딱 통과했다. 에잇. 조금만 더 들고 올 껄. 책을 괜히 뺐나.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13.2+10.8+19.7=43.7kg. 겨우 45kg 이내로 맞췄다.


 카타르항공 접수 라인에 기다리고 있는데, 같은 항공편으로 출국하는 회사 동료 부장님을 만났다. 현지 개발회사 법인장 자격으로 가는 부장님과 그 개발회사 직원의 딸까지 모두 같은 항공편으로 출국하는 일정이다. 혼자 가면 불안한데, 길동무가 있어 무척 다행이다. 


 수하물 접수편은 줄이 길었다. 다른 항공편이 다 망해서 도하 경유지만 살아있어 그런 거라고 했다. 무사히 짐을 부치나 했는데 골프백은 대형 수하물 코너에서 다시 부치란다. 그런가 보다 하고 부쳤는데, 이게 또 나중의 복병이 될 줄이야. 그건 짐 찾을 때 다시 얘기하겠다.     


 드디어 카타르 도하 행 항공기 탑승. 한국인은 많이 안 보인다. 벌써 외국 느낌이 물씬 난다. 짙은 자줏빛을 메인 컬러로 쓰는 카타르항공은 색깔부터 중동 느낌이 팍 나고 나름 고급져 보였다.     


 이제 이륙합니다. 잘 있어요 모두들. 식구들에게 이륙한다고 카톡을 보내고 통신상태를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무사히 이륙 완료. 안녕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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