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해외지사장 자격으로 부임 가는 자리지만 그렇다고 비즈니스 클래스를 태워주지는 않는다. 우리 회사는 대외 감시가 철저한 공기업. 예산을 조금이라도 허투루 썼다가는 연말 국정감사 때 거의 박살이 난다. 그래서 회사가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소모성 경비성 예산은 언제나 야박하다. 인천에서 도하까지 10시간 50분이나 걸리는 비행 편인데도 이코노미 클래스로 갈 수밖에 없다. 아, 물론 개인경비를 추가 부담하면 비즈니스가 아니라 퍼스트 클래스로도 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나 같은 생계형 직장인에게는 꿈같은 소리지. 집에서 공항까지 짐 하나 부치는 비용도 아까워서 안고 지고 올라왔는데 비즈니스 클래스는 무슨. 혹여나 이다음에 정말 정말 운이 좋아서 회사 임원까지 승진할 일이 있다면 회사에서 비즈니스 클래스를 준비해 줄지도 모른다. 잘 되고 볼 일이다.
아무튼, 배정 자리에 앉았다. 중간에 화장실에 한번 이상은 가야 해서 창가보다는 복도 쪽으로 달라고 했다. 기내식 받기도 편하고 여러 이점이 있지만, 반대로 창가 쪽 사람이 나가려 할 때는 억지로 자리를 내줘야 하니 모든 게 다 좋을 수는 없다. 비행기가 거의 만석이었는데 다행히 내 옆자리가 공석이었다. 오 재수! 예전 해외출장길에 자리 좌 우로 코끼리만 한 덩치 사이에 껴서 갔던 일이 있었는데 정말 숨 막히는 줄 알았다. 이코노미 클래스지만 오늘처럼만 배정된다면 10시간 아니라 스무 시간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카타르항공 QR859편 이륙 직전 기념샷(2021.12.22.)
카타르항공 이용은 처음인데, 의외로 서비스가 괜찮다. 대한항공과 비교해서 기본적인 기내 서비스 물품도 거의 동일한데, 슬리퍼 대신 양말을 주는 게 특이했다. 이게 슬리퍼 대용이란 말인가? 주변을 봤는데 제공해주는 양말을 덧 대신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뭔가 좀 어색해. 수면안대, 칫솔치약, 담요, 헤드셋, 귀마개 등 편의용품 수준은 비슷했다. 또 하나. 요즘은 코로나 시대 아닌가. 마스크, 손소독제 등 코로나 위생용품을 추가로 제공받았는데, 이미 KF94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던 터라 그냥 기념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카타르항공은 기업 컬러를 최대한 이용하는 회사였다. 탑승구부터 몽땅 짙은 자주색 인테리어다. 심지어 기내 조명도 주광색 계열이 아니라 자줏빛이 도는 것처럼 느껴진다. 직원들 유니폼도 자주색 유니폼에 자주색 모자로 중동 기품이 느껴지는 디자인인데, 코로나 시대라 1회용 가운을 유니폼 위에 겹쳐있고 있었다.
코로나 시대라 어지간한 거리도 기내식을 제공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기내식을 제공해야만 할 때에도 콜드밀 간편식을 제공한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완전한 기내식을 제공한다. 비프스테이크에 익힌 감자 골랐는데 맛있었다. 매번 비행기를 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스튜어디스가 수백 명의 탑승객에게 일일이 뭘 물어볼지 물어보고 선택하게 하는데 아니 그러면 남는 메뉴나 모자라는 메뉴가 발생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비행기표를 예약할 때 뭘 먹을지 미리 선택하게 하고, 주문한 대로 기내식을 준비해서 순서대로 착착 배식해주면 좋지 않을까? 그마저도 어렵다면, 사진으로 된 기내식 메뉴판을 준비해서 그림으로 보여주고 선택하라고 하면 스튜어디스들이 훨씬 편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는데, 왜 늘 수백 명의 승객들에게 일일이, 그것도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영어)로 물어보며 메뉴 주문을 받는지 모르겠다.
코로나 시대 인데도 기내식은 잘 나온다. 비프스테이크+감자
기내식과 더불어 달콤한 레드와인 한잔을 마시고 안대 뒤집어쓰고 그냥 잤다. 원래 비행기 같은 이동 중인 교통편에서는 잘 못 자는 스타일인데 오늘은 아침부터 워낙에 피곤해서 자리가 불편하든 말든 잘 잤다. 긴긴 시간을 어떻게 견디나 했는데 무척 다행이다. 눈 뜨니 이제 또 아침 준다고 했다. 세 메뉴 중 뭔가 고르라고 했는데 나머지 두 개는 여전히 기억 안 나고 그냥 듣기 친숙하고 어지간하면 실패하지 않는 오믈렛 골랐다. 치킨, 계란 베이스 요리는 전 세계 어딜 가도 흔한 요리이고 종교에 관한 터부가 없다. 심지어 다들 맛도 비슷하다. 식사 메뉴를 뭐 고르기 어려울 땐 치킨 요리 고르면 대부분 실패하지 않는다.
오믈렛처럼 안 보이지만 오믈렛 맞아요. 사각빵처럼 생긴 게 오믈렛. 익숙한 계란 맛.
잘 자고 잘 먹고 나니 어느덧 내릴 시간이다. 살다 보니 카타르라는 나라를 다 와보네. 아니, 중동 자체가 처음이다. 역시 더운 나라 중동. 현지시각으로 새벽 5시인데도(한국보다 6시간이 늦다) 외투 벗고 긴팔도 덥다. 오리털 점퍼를 입고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가볍게 입고 오길 참 잘했다.
카타르 수도 도하 공항에 무사 도착했다. 이제 온 길 되돌아서 이슬라마바드로 가야한다. 빙빙 도는 먼 길.
카타르 수도 도하 공항에 무사 도착했다. 비행기 내린 직후의 전경사진.
우리는 환승객이니 입국 수속을 밟을 필요도 없고 이제부터 그냥 출국 승강장에서 15시간 10분만 기다렸다가 연결 항공편을 탑승하면 된다. 비행기 티켓에 6시간 라운지 바우쳐가 포함되어 있어 카타르항공 라운지로 향했다. 카타르 도하 공항은 중동의 허브 공항 중 하나라 공항이 무지무지 넓다. 물어물어 겨우겨우 찾아갔는데, 여기가 아니란다. 여기는 비즈니스 클래스 이상만 입장할 수 있는 곳이랜다. 아, 어딜 가도 통하는 돈의 파워. 입구에서 천대받고 다시 물어물어 일반 라운지로 찾아가서 입장할 수 있었다. 오, 역시 이코노미 라운지는 미어터진다. 겨우겨우 앉을자리 찾아서 자리 잡고 뷔페 코너에서 간단히 뭘 좀 마시고 조금 쉬다가, 비행기 안에서 푹 잔 까닭에 잠이 안 와서 남는 시간에 연내 해야만 하는 숙제를 하려고 노트북을 켰다. 회사 교육비로 도서를 구매하면 제출해야 하는 독후감 작성 숙제인데, 미루고 미루다 연말까지 왔다. 도서감상문을 제출하지 않으면 구매 도서비용이 급여에서 차감되니 더는 미룰 수 없다. 열 개쯤 되는 도서감상문을 두어 시간 걸려 다 썼다. 대충 써도 안 되는 게 일정 분량 이하로 적어서 내면 시스템에 저장 자체가 안 되는 야박하고 매몰찬 시스템이다.
공항 내 라운지찾아 삼만리. 중동 나라답게 덥다. 가볍게 입고오길 잘했다.
공항 라운지 이용은 인생 처음이다. 사실, 경유 비행기를 타는 경험 자체가 처음이라 그 간은 라운지를 이용할 일 자체가 없었다. 공항 라운지를 자주 이용하는 사람은 PP카드를 만든다는데, 내가 뭐 그리 자주 이용할 일이 있겠나. PP카드는 연회비가 비싸거나, 라운지 이용 자격을 주는 월간 이용실적 하한이 매우 높다. 이래저래 조금 공부해보고 카드 만드는 건 바로 포기했다. 다음 생은 이런저런 계산 없이 돈 들더라도 하고 싶은 거 다 지를 수 있는 금수저로 태어나면 좋겠다. 매번 계산해보고 손익 분기를 넘나 안 넘나 점검하는 인생은 피곤하다. ㅠㅠ
깔끔하고 아늑한 라운지 공간. 왜 돈을 주고 이곳에서 쉬는지 금방 이해했다.
라운지에는 다양한 공간이 있다. 기본적인 홀에는 쉬기 편한 다수의 쇼퍼와 수프, 치즈, 토스트, 샐러드 등 간단한 음식으로 구성된 뷔페 코너가 있다. 맥주 등 약간의 주류도 보인다. 조금 둘러보면 패밀리룸도 있고, 흡연실도 보이고, PC를 제공하는 비즈니스 룸도 보인다. 미니 테이블 축구 등을 즐길 수 있는 게임룸도 있던데 다들 피곤한지 게임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화장실은 매우 깔끔하고 쾌적하다. 아예 화장실에 상주하며 화장실만 관리하는 직원이 따로 있었다. 손님 한 사람이 세면대를 쓰고 나면 바로 따라가서 닦고... 구석에 그냥 서 있다가 다른 손님이 세면대를 쓰면 또 닦고... 소변기를 쓰고 나면 또 따라가서 닦고... 그렇게 하니까 깨끗하지. 화장실 옆에 샤워실도 있었다. 아무나 쓸 수 있냐 물어보니 지금 사용 중이라 홀에서 쉬고 있으면 자기가 알려준댔다.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나와서 쉬고 있으니 10분 있다가 용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찾아와서 샤워실이 비었으니 와서 쓰랜다. 친절한 정도가 아니라 전담 집사를 고용했나 싶을 정도였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남아돌고 경험 삼아 라운지 샤워도 해보기로 했다. 샤워실 들어가니 탈의 공간 세면 공간이 또 별도로 있고 그 안에 샤워실이 있다. 엄청 럭셔리하고 깔끔하다. 여기 또한 한 사람이 사용하면 바로 청소하고 또 청소하는 시스템이다. 안내대로 들어가니 호텔에서 제공하는 듯한 어메니티를 종류별로 새것으로 제공해준다. 칫솔치약, 샴푸, 바디크림, 컨디셔너. 한번 쓰기엔 과분한 분량인데 쓰레기통을 보니 직전 사용했던 손님 것은 그대로 다 버렸다. 아이고 아까워라.
파노라마로 찍어본 라운지 샤워실. 어차피 사용료에 포함된 가격이니 이용해보시길 추천드려요.
어쨌든 뜨거운 물로 개운하게 샤워 잘하고 남은 어메니티는 좀 없어보이든 말든 주머니에 넣어서 잘 챙겨 왔다. 입장객에겐 무료라고 했지만 암만 생각해도 과분한 서비스를 받은 것 같아 도로 찾아가서 화장실 보이에게 2달러를 쥐어주고 왔다. 연계 비행편 이용할 일이 있으면 라운지 샤워도 이용해보시라. 피로도 풀리고 추천할 만하다. 라운지 따라 좀 다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름 있는 항공사라면 관리할 테니 어느 수준 이상은 되지 싶다. 적어도 도하 공항 카타르항공 라운지 샤워실은 매우 깨끗했다.
공항 내 푸드코트에서 선택한 치킨커리라이스. 쌀이 무척 길쭉하고 찰기가 없다.
라운지 1회 이용 바우처는 6시간 제한이었다. 6시간을 다 채우고 도로 이동해야 했다. 구매한 항공편에는 다른 바우처가 포함되어 있었다. 항공사 말로는 푸드코트 가서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이용하면 된다고 안내받았는데, 가서 바우처를 들이미니 상단 금액이 제한된 바우쳐였다. 대충 3? 4달러쯤 되는 돈이었는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버거킹도 보이고 익숙한 패스트푸드가 보였는데 해외까지 와서 맨날 먹던 것 먹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생소한 요리에 도전해보았다. 정확한 메뉴 이름은 모르겠지만 치킨 카레라이스 인 듯했다. 1인분을 너무 많이 퍼주길래 반만 달라고 했다. 원래 그렇게 다들 많이 먹나? 어쨌든 그것도 다 못 먹었다. 일단 닭은 기름기 없이 너무 퍼석퍼석하고 쌀은 찰기가 전혀 없이 날라댕긴다. 입에 잘 안 맞다. 내가 어지간하면 음식은 남기는 편이 아닌데 이번엔 남겼다. 남은 음식은 어쩐다? 한국 같으면 구매식당에 도로 반납해서 음식물 쓰레기 분리수거 할텐데, 이 나라는 몽땅 쓰레기통 직행이다. 설거지 안 해도 되고 치우기는 편하겠지만 지구에게 미안해졌다.
비즈니스 라운지는 입구부터 럭셔리하다.
그렇게 대강 점심을 먹고, 비즈니스 라운지(카타르 항공 알 마하 라운지)로 향했다. 로비 리셉션부터가 달랐다. 훨씬 널찍하고 쾌적하고. 왠지 안내직원들도 더 예쁜 듯 했다. 비즈 라운지 추가분은 개인카드로 결제했다. 약 7만원에 해당하는 금액. 비싸지만 경험하는 비용이라 생각하고 질렀다. 그만큼 즐기고 나오면 되지. 역시 비즈니스 라운지는 인테리어도 훨씬 깔끔하고 실내도 넓었다. 그리고, 와인바도 있어 와인을 무제한 제공해준다. 이코노미 라운지에 없던 수면실도 있다. 대신 게임룸은 안 보인다. 대충 쇼퍼에 앉아 좀 쉬다가, 노트북 켜서 여정도 좀 정리하고... 와인도 한두 잔 홀짝이고, 와이파이 잡아서 카톡으로 여기저기 중간 도착 안부인사도 보내고 하다 보니 시간 금방 간다. 라운지 안에서도 연결 항공편 게이트와 출발 시각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로 확인할 수 있어 편했다. 편리한 라운지 뷔페 코너에서 간단히 저녁 요기까지 끝내고 탑승게이트로 향했다.
카타르 항공 비스니스 라운지. 무척 쾌적하고 고급스럽다.
카타르 항공 비스니스 라운지. 무척 쾌적하고 고급스럽다.
무탈하게 이슬라마바드 행 비행기 탑승. 같은 카타르 항공편 비행기다. 승무원과 눈이 마주쳤는데 쌩긋 웃으며 너무나 반갑게 맞아준다. 어? 15시간 전 그 승무원 같은데? 나를 기억하고 인사하는 건가? 아니면 다들 똑같이 생긴 거라 내가 착각하나? 11시간 장거리 비행 후 15시간 쉬고 다시 근무? 아닌 것 같다. 그냥 친절한 승무원인가 보다.
이슬라마바드 행 카타르항공 QR632편. 도하공항. (2021.12.22.)
이슬라마바드 행 비행기도 만석이다. 이번엔 옆자리 덩치 큰 남성이랑 어깨싸움을 조금 했지만, 비행시간이 길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륙하자마자 저녁 기내식을 준다. 무탈하게 고른다고 치킨을 골랐는데 고르고 보니 치킨 카레라이스다. 점심 메뉴랑 똑같네. 실패다. ㅠㅠ 그래도 푸드코드보다 기내식 카레라이스가 훨씬 맛있었다.
기내식 치킨커리라이스. 맛은 기대대로 딱 무난.
도하까지 거의 11시간을 날아와서 그런지 3시간 비행 편은 뜨니 내리네?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짧은 여정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금방 이슬라마바드에 착륙했다. 이곳 시간은 현지시각 12월 23일 새벽 2시(한국시간 12월 23일 아침 6시). 집에서 출발한 시각이 21일 14시였으니, 만 하루하고도 16시간이 더 걸려 현지 공항에 도착한 거다. 심지어 아직 현지 숙소까지 더 가야 하는데 말이다.
새로운 곳. 처음 와 보는 곳. 이제 입국 게이트만 잘 통과하자. 파키스탄은 친숙하지 않은 나라라 은근히 걱정이 된다. 입국심사에서 시비 걸면 어쩐다? 돈 달라는 뜻일 텐데 얼마를 줘야 하지? 입국심사에서 시비 걸릴 짐은 없겠지? 노트북 새로 사 온 건데 포장 풀고 왔으니 통관 세금 내라고 안 하겠지? 비자가 잘 등록되어 있는 게 맞겠지? 벌서 별별 걱정이 다 든다. 잘 되겠지. 잘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