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 꽤 당돌한 아이였다. 승부욕도 있었고, 주목받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공부도 곧잘 했다. 학창 시절에는 늘 회장을 했으며, 전교회장까지 했었다.
실패라는 것을 거의 경험해보지 못하고 자랐다.
내가 처음 실패를 경험한 것은 입시에서였다.
원하는 대학에 떨어지고 나니, 내 자존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인생의 실패자라고 느껴졌다.
재수를 시작했으나, 재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했다.
두 번째 실패였다.
그 뒤 나는 우울을 앓았고, 집에서 잠을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자고 TV를 6시간씩 보며 시간을 낭비하며 지냈다.
그렇게 몇 개월을 폐인처럼 지내다 편입이라는 제도를 알게 되었다.
학사편입으로 대학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안에 다시 좋은 대학에 가보겠다는 열정이 꿈틀거렸다.
20대 초반 내 인생 목표는 오로지 SKY 대학에 들어가 뽐내며 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학사편입을 하기 위해 폐인 생활을 접고, 학점은행제와 독학사를 병행해서 학사 학위를 1년 반 만에 취득했다.
학점은행제로 학사학위를 취득한 날,
아빠는 굉장히 기뻐하셨다. 그리고 축하파티를 하자며 나를 포함한 가족들을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 식사를 하시며 말씀하셨다.
"하봄이는, 분명 뭐라도 될 애야.
이렇게 혼자 공부해서 1년 반 만에 학위를 취득하는 게 쉽지 않아."
뭐라도 될 애.
아무도 나를 '뭐라도 될 애'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 순간, 나조차도 내가 별 거 아닌 인간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아빠가 해준 말이었다.
나는 그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나의 학위 취득일에 아빠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다 시큰둥했다.
아직 편입을 성공한 것도 아니고, 학점은행제로 학위를 취득한 것이 뭐 대수야?라는 식이었다.
나조차도 이게 별 건가 싶었다.
공부를 못하던 딸이 아니었기에, 나를 향한 엄마의 기대는 컸었다.
그리고 엄마의 바람은 오직 얼른 편입을 성공해서 '우리 딸 00 대학 다녀요.' 하고 자랑하는 것이었다.
늘 엄마의 자랑이었던 나는, 대학 입시 실패와 동시에 더 이상 엄마의 자랑이 될 수 없었고, 스스로를 실패자라 규정하며 갇혀 살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아빠가 나를 믿어주고 인정해 줬던 그 순간 나는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이 일은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난 아직도 그 식사자리에 분위기와 아빠의 목소리, 표정 등 모든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뭐라도 될 애.
아직 내가 뭐라도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난 10년 동안 나는 많이 성장해 왔다.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했던 절망의 순간에서 일어나서, 지금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힘은 아빠의 한마디였다.
그리고 이제 30대가 된 나는
나를 스스로 믿어줄 수 있게 되었다.
너는, 뭐라도 될 애야.
나는 나에게 종종 이렇게 이야기해 준다.
분명, 나의 꿈을 이루고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펼치는 사람이 돼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럴 것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고, 죽이는 말이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며 살아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