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위 직장이라는 사회생활을 통해 인생의 둘도 없는 친구, 인생의 은인, 영혼의 동반자 등과 같은 거창한 관계를 맺을거라 꿈꾸지 않는다. 그저 내가 맡은 일을 구멍 없이 처리하고, 주변인들과 협조하고, 눈치껏 도와주고, 존중하며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기고, 나도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 자연스럽게 관계를 형성해간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으며 당시의 관계를 가늘고 길게 지속해간다. 완전 내 맘 같지는 않지만 어렴풋이나마 감정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관계가 좋다. 서로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며 적당히 농담과 험담, 신변잡기를 얘기하는 관계. 문유석 판사님의 개인주의자 선언에 나오는 개인주의자들.
이렇게 말하니 내가 아주 친구가 없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느슨한 수많은 관계를 맺고 있거나. 이렇게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나는 내 맘 같지 않은 많은 관계들에 지쳐 관계 지속하기를 포기한 적이 많은 좁디좁은, 그렇지만 서로를 존중하려 애쓰는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지난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회사에 입사한 지 두 달이 된 직원이 있다. 경력직이라고 해서 나이도 꽤나 있고, 사회생활도 오랫동안 했으니 적응도 잘하고 협업도 잘 되겠거니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의 민낯을 알게 되었다. 며칠 겪어보지도 않은 회사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다른 직원들에게 틈만 나면 쉴 새 없이 쏟아내 상대방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과 옆자리에 앉는 것이 괴롭고 스트레스라 출근이 힘겹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심지어는 나를 비롯해 팀원 몇몇이 외근을 나가 사람이 많이 비었을 때는 팀의 막내를 붙잡고 본인이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작업한 결과물에 대한 자랑 등을 끊임없이 늘어놓아 정작 상대방은 일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화가 났다
첫째. 지금의 회사를 얼마나 겪었다고, 그런 예의 없는 행동을 일삼는지. 이것은 회사라는 공공의 적을 두고 험담이나 잡담으로 동료애를 형성한다는 차원이 아니다. 자신보다 오랜 기간 이 회사를 다니고 있는 다른 직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둘째. 그렇게 잡담하고 험담하는 시간이 지나쳐서 자신이 처리해야 할 시간을 못 맞추거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게다가 다른 직원들에게까지 피해를 준다. 교묘하게 윗사람에게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이다 자리를 비우면 험담과 잡담으로 다른 사람의 시간을 잡아먹는 것이다.
회사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회사를 쉽게 여기거나 우습게 보는 것은 싫다. 그렇게 이상하다고 험담하는 회사에서 본인도 아직까지 일하며 월급을 받고 생계를 꾸려가는 것 아닌가. 회사를 우습게 본다는 것은 그 구성원들도 우습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한 사람으로 인해 팀의 편하게 지내며 협력하던 분위기는 깨졌고 나름 즐겁게 일하던 모습은 가라앉았다. 다른 직원들의 피로감은 쌓여갔다.
참..... 내 맘 같지 않다.
내가 지금 이 회사를 끔찍이도 사랑한다거나, 여기에 뼈를 묻겠다거나, 세상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회사에, 동료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없도록 조심하며 최대한 존중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다른 팀원들 또한 거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눈뜨고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이 바로 회사인데, 그곳에서의 시간이 험담을 쉼 없이 할 만큼 힘들거나 내가 한 일을 칭찬해주고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화내면서 지낸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물론 나도 하루에도 몇 번씩 속으로 욕을 하거나 틈틈이 농땡이를 피우면서도 바쁜 척을 하기도 하며 마음이 맞지 않는 직원은 꺼리게 되곤 한다. 그렇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한다. 내가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모두들 그만큼 배려 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그동안 내가 참 괜찮은 사람들만 만나왔구나. 운이 좋았구나."를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다. 이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심히 걱정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참 난감한 사람이다.
예전에 일하던 회사의 동료가 오랜만에 나의 안부를 물었다. 옛 동료... 지금은 잊지 않고 서로 가끔씩 안부를 물어주는 사이이다. 하지만 가끔 연락해도 어색하지 않고 이전에 했던 이야기의 주제들을 이어서 대화할 수 있다.
실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본인은 어디서 감염되었는지 모르게 코로나19에 확진되어 회사 출근을 못하다가 이제야 3주 만에 출근했다며 놀라운 근황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백신 접종 일정을 물어보고 조심하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얼마나 아팠냐며 부모님도 걱정 많으셨겠다고 이젠 괜찮냐고 그리고 마찬가지로 더 조심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농담과 진담을 오고 가는 대화를 하다가 문득 그가 지금 다니는 회사의 분위기를 익히 알기에 그에게 위로를 더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메신저를 통해서 작은 선물을 보냈다. 그랬더니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마음이 고맙다며 답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동점이 되면서 유쾌하게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서로 조심하라며, 열심히 일하지 말라며 시답잖은 농담과 약간의 험담이 곁들이며...
무언가 마음이 따뜻해졌다. 꽉 묶인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본인의 신변에 일이 있으면 알려주고 싶고 연락해주고 싶은 그런 관계.
이 두 관계를 동시에 겪으니 마음이 한쪽으로 너무나 심하게 기울어져 버렸다. 옛 동료와 함께 했던 시간보다 더 많은 앞으로의 시간을 새로 온 직원과 지내야 할 수도 있는데 벌써부터 막막하다.
세상에 내 맘같은 사람은 없다지만 서로 결이 맞는 사람은 있는 것 같다. 결이 다르더라도 서로의 노력이 있다면 무뎌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노력은 쌍방향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쪽에서는 괴롭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전혀 모르고 개의치 않는 관계라던가 한쪽에서만 노력하는 관계는 오랜 기간 유지되기 어럽다.
최근에 새 직원 덕분에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그리고 나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무심코 그 사람처럼 행동해서 다른 사람에거 피해를 주거나 괴롭게 한적은 없는지 돌아보고 과거의 내 모습을 반성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태도로, 어떤 관계로 그 사람과 함께 지내야 할지 고민한다. 답은 아직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