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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살의나비 Sep 08. 2023

내게 너무 발랄한 며느리

오랜만의 나들이다.

충청도 옥천에서 농사짓는 다온이 고모네가 서울에서 하는 마켓 참여차 왔다고 해서 응원해 주러 가는 거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  세 가족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 신난다, 신난다. 잠시 거기 들렀다가 근처에 있는 서울어린이 대공원에 갈거라 더 기대되고, 나들이 기분이 난다. 나는 늘 재보다 잿밥에 관심이 더 많다. 

나들이 기분을 내느라 옷장을 뒤진다. 살이 쪄서 작아진 옷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찾아본다. 

동물원에 가니까 좀 밝고 발랄한 옷이 어떨까? 청바지? 아니야, 안 들어가, 원피스? 불편할 거 같아. 이게 있었네, 청 멜빵 치마! 이거 입으면 되겠다. 밝은 초록색 반팔 티셔츠에 청 멜빵 치마를 입어 본다. 좀 통통해 보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마흔 치고 귀여운 거 같다. 이걸로 당첨. 다온이는 뭐 입히지. 다온이 좋아하는 분홍 티셔츠에 편안하게 하늘색 바지를 입히자. 남편은 밝은 연두색 티셔츠에 청 반바지를 입었다. 출발이다, 우리 가족 나들이! 아니, 고모네 응원하러!


파주에서 서울까지 꽤 멀긴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의 꼬맹이 차를 끌고 간다. 이 꼬맹이 차로 말할 거 같으면 내가 아가씨 때부터 바쁘게 수업 다닐 때, 엄마랑 여행 다닐 때, 남편이랑 연애할 때, 전국 방방곡곡을 다닌 10년 넘은 나의 역사가 담긴 꼬맹이 차 되시겠다. 차종은 모닝인데, 우리끼리는 그냥 꼬맹이라고 부른다. 덩치는 작아도 해외여행 갈 때 그 많은 짐도, 공원 놀러 갈 때 자전거 까지도 실었던 우리 집에는 없어선 안될 귀하고 대단하신 차다. 

꼬맹이를 끌고 복잡한 서울을 뚫고 성수동으로 향한다. 

서울 숲 주차장에 주차를 해두고 조금 걸으니 고모가 말해 준 마켓이 열린 장소가 가까이 보인다. 고모네처럼 젊은 농부들이 직접 재배한 농산물들을 가져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자신들이 직접 땀과 정성으로 키운 자식 같은 수확물들을 애지중지 진열해 놓고 뜨거운 햇볕아래 손님들을 기다리는 모습에 그들의 노력과 간절함이 느껴진다. 

고모네 부부는 안정적인 직장과 도시에서의 편리하고 평범한 생활을 포기하고 귀농을 결심했다. 

처음에 가족들은 걱정을 많이 했지만, 워낙 고모네 부부의 결심이 단단했고, 계획도 탄탄해 보여 지지해 주기로 했다. 그렇게 귀농한 지 약 2년 만에 올해 첫 수확을 해서 마켓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스스로의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참 멋지고 귀하게 느껴진다. 

고모네도 자신들의 소신대로 찬찬히 길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기특하고 부럽게 느껴졌다. 

고모는 우리가 가까이 와 보고 있는데도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다. 

황톳빛으로 그을린 피부에 콧잔등에 잔잔히 박힌 주근깨가 그간의 노력을 보여 주는 듯하다. 푹 눌러쓴 벙거지 모자 아래로 땀방울이 맺힌다. 고모는 맑고 투명한 영혼을 가졌다. 심성이 곱고 바르다. 우리 시어머님께서는 참 자식들을 참 바르고 반듯하게 키우신 거 같다. 우리 남편도 고모도 심성이 올곧고 단단하다.

고모가 이제야 우리를 본다.

"언니, 멀리 여기까지 와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고모의 맑고 씩씩한 목소리가 우리를 반긴다. 고모의 말에선 항상 진심이 느껴진다. 

나는 고모를 인간적으로 좋아한다.

"엄마랑 이모는, 엄마가 힘들어하셔서 요 앞 카페에 가 계세요."

어머님께서 멀리 오시느라 힘드셨구나. 

우리는 얼른 발걸음을 옮긴다. 카페가 어디 있지. 바로 근처에 카페가 보인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다. 어머님, 이모님께서 안 쪽 테이블에 앉아 계신다.

"어머님~~ 이모님~~ 안녕하셨어요?"

주책없는 입꼬리가 올라가고 만다. 눈치 없는 눈꼬리가 눈웃음을 친다. 

분명히 어머님께서 안 좋으시다고 고모가 방금 말했잖아. 금세 그걸 까먹고 해맑게도 웃고 만 것이다.

"너희는 뭐가 좋다고 웃고 들어오니?"


어머님께서는 3년 전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큰 수술을 하고 위험한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기적적으로 생존하셨다. 병원에서도 모두들 기적이라고 했다. 수술하시고 얼마 동안은 요양하시느라 우리 집에서 내가 모시기도 했었다. 이제는 다 괜찮아 지신 줄 알았는데... 여기 오는 동안에 택시에서 속이 안 좋으셔서 토까지 하셨다고 한다. 처음 쓰러지실 때도 토하며 쓰러지셨던 거라 이모님께서 혼비백산 너무 놀라셨던 거 같다.

그런 중에 나는 그렇게 웃으며 들어왔으니... 정신없는 며느리다. 확실히 나는 정신이 없는 게 맞다.

그래도 자리를 잡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이제 와서 힘드셨겠어요, 어떡해요, 하는 말이 위로가 될까? 온통 그 생각에 대화에 집중이 안된다. 다온이는 오늘따라 엄마랑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다온이를 달랜다는 핑계로 나는 아무 말 않고 다온이만 보고 앉아 있다. 

이 와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 들어가 거울을 보니 세상 발랄한 여자가 거울 속에 서있다. 나 이러고 있었던 거야? 짓궂게 프린팅 된 초록색 티셔츠와 밝은 청색 멜빵 치마를 입은 백 씨 집안 맏며느리가 거울 안에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어떡하지. 이 옷을 어떡하지. 


나는 처음부터 이 집안에 조금 안 어울리는 며느리였다.

시댁 식구 분들은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고 성실하시다. 

나는 그에 비해 욕심이 많고 사치스럽고 게으르다.


내가 처음 시댁에 인사 가던 날이 생각난다. 눈 오는 겨울날이었던 거 같은데...

나는 새빨간 알파카 하프 코트에 털 달린 앵클부츠, 목에는 까만 밍크 목도리를 하고 갔던 거 같다.

어쩌면 그날부터 아셨을까? 우리 집안에 어느 철없는, 요즘 말로 깨발랄한 며느리가 들어올 거 란걸?

우리 시댁엔 어쩌면 근면성실하고, 생활력 있는, 검소하고 부지런한 그런 며느리가 어울렸을지 모른다. 

아주 가끔 다 같이 사진을 찍어 보면 나만 다른 세상 사람 같다.

시댁에 가면 나만 어디서 뚝 떨어진 외계인 같다. 결혼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 적응이 안 된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무게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고단함을 미루어 짐작조차 할 수없다.


나는 묻는다. 

"하루쯤 쉬시면 안 돼요?" 

어이없어 웃으신다. 하루도 쉰 적이 없는 분들. 그게 이해 안 되는 나. 

나는 같이 여행 다니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시댁을 꿈꿔왔고, 시댁은 본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이해하고 서로 힘을 주는 관계를 바라셨을 거 같다.

그렇다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분들께 있을 수 없는 일. 모든 일에 감사하고 이해하시는 분들이시다. 늘 내게 다온이 잘 키워줘서 고맙다. 다 네 덕분이다. 고맙다. 하시는 분들이시다.


나는 확실히 성실하고 근면한 며느리는 못 돼 드릴 거 같다.

하지만 두분이 눈치 없는 나를 보고 어이없어 웃으시더라도, 철 없이 해맑다 탓하시더라도 그 잠깐이라도 웃으실 수 있길 바란다. 언젠가는 두 분을 졸라 가게 문을 닫고 함께 여행을 갈 것이다.  

나는 굳세어라 금순이가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믿는다. 세상 발랄한 며느리로, 심각하기만 한 시댁을 환하게 밝히고 싶다. 잠깐이라도 두 분의 고단함을 덜어드리고 싶다. 이런 마음이 진심으로 두 분께 닿아 전해질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감사하겠다.

많이 부족하고 철없는 며느리지만 그렇게 이 집안에 점점 녹아들 수 있다면 나는 내 원가족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을 씻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지금 백 씨 집안 며느리이고, 내가 지켜야 할 가족은 이곳에 있다. 친정이 내게 상처일 때 나는 어렸고 아무것도 못했지만, 나는 이제 성장해 어른이 되었고,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 

나는 남편과 힘을 모아 우리 가정을 지킬 것이다. 함께 행복하고 같이 웃을 것이다. 


두 분이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이제 더는 힘든 일 없이 웃을 일들만 두 분께 펼쳐졌으면 좋겠다. 

그 좋은 일들을 우리가 만들어 드리고 싶다. 하루쯤은 어깨에 짐을 내려 놓고 쉬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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