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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보이 Jun 14. 2024

피규어로 싸우고, 키링으로 화해하고

부부의 각자도생 취미생활

"결혼 전 내 꿈은 <취미 생활도 함께 하는 부부>였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그만큼 더 다정하고 사이 좋은 부부가 될 줄 알았다.  

그리고 남편을 만나 처음 두 세번의 데이트까지는, 나도 이 남자와 함께라면 그 소망을 이루게 될 줄 알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남편은 어쩌면 더 나보다 영화광.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영화 <러브액츄얼리>에 대해 쉼없이 떠들며 가까워졌고, 두 사람이 처음 간 DVD방에서 화면 위로 흐르던 영화도 그와 비슷한 <어바웃 어 타임>이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일은 좀더 두고 봐야 안다.

일단 남편은 영화 <러브액츄얼리>도 좋아하지만, <신세계>나 <황해>, <범죄도시> 등 잔인하고 자극적이면서 남성적인 영화를 더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영화 보는 걸 그닥 즐기지 않는 사람이다. (일을 하게되면 관련해서 레퍼런스 영화들을 다양하게 보긴 하지만, 평소엔 지극히 보고싶은 것만 보는 사람인데...)

그러다 보니 결혼 8년차, 이제는 영화도 각자 본다. 일단 극장까지는 함께 간다. 그리고 시간대가 비슷한 회차를 골라 각자 보고싶은 영화를 보고, 끝나면 어디선가 다시 만난다.

이후 함께 하는 식사자리. 각자가 본 영화에 대해 짧은 소감 정도를 나누기는 하지만, 연애 때처럼 영화 얘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는 상황 같은 건 이제 잘 없다.  

그러니 부부의 취미가 "영화 감상"이라고 하기도 좀 뭣한데...


여기서 새삼 깨달은 재밌는(?) 사실 하나.  

결혼 전에 나는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기 위해 부부 공통의 취미를 찾았다면, 결혼 후에 나는 도리어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 부부 공통의 취미를 찾게 됐다.

아이가 없어 육아에서 자유로운 대신, 온통 둘만 보내는 시간이 슬쩍 지루해진 부부. 주말이면 늘 우리는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지 시시한 고민들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즈음 내가 떠올린 게 여행도 되면서 운동도 되는 "등산"이다.


다행히 여행은 두 사람 다 좋아하고, 운동은 두 사람 다 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 취미로 등산만한 게 없지 싶었다.

그래서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에도 우리는 마스크를 끼고 동네 둘레길을 시작으로 원미산, 청계산, 계양산 등을 다녔는데. 차츰 지역을 넓혀 미션을 클리어 하듯, 설악산, 지리산, 제주 올레까지... 가려던 차에 고장이 나 버린 나의 무릎.

세번 째 등산이었던 계양산 정상을 밟고 내려오던 중, 나는 올 것이 와버린 걸 직감했다.

발을 딛을 때마다 오금이 저리고 무릎의 뼈가 쓸렸다. 집에 돌아온 뒤엔 무릎이 접지도 못할만큼 퉁퉁 부어올랐고, 그 뒤 찾은 정형외과에선 큰 주사기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 물을 뽑아내야 할만큼 무릎 안에 가득 물이 차 있었다. 무릎활액막염(최종 진단은 무릎연골연화증). 속된 말로 무릎이 아작이 난 건데…

뭐 물론 등산 몇 번에 멀쩡하던 무릎이 갑자기 그리 된 건 아니다. 평소도 나는 허리며 무릎, 관절이 별로 좋지 못한 사람. 그럴수록 등산화나 스틱 등 등산 보조 장비들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이제 막 시작한 취미생활에 등산화니 뭐니 큰 돈부터 태우는 게 아까워서, 일단은 그냥 집에 있는 운동화에 평소 입던 차림으로 산에 올랐을 뿐인데...

등산화 값 아끼려다가 도리어 몇 배의 병원비를 쓰고 무릎까지 내어준 내가 뒤늦게 알게된 값진 사실. 등산화는 괜히 있는 게 아녔다. 그리고 초보일수록 등산화에 스틱은 필수다. 그 후로 나는 등산은커녕 계단도 게처럼 옆으로 내려가고 무릎도 포개지 못한다.

고로 "등산" 역시도 우리 부부의 공통 취미는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인데...  


최근 남편이 혼자만의 취미를 찾았다.


다름 아닌 애니메이션 감상과 피규어 수집.  

이게 다 <귀멸의 칼날> 때문이다. 이 시리즈를 너무 재밌게, 감명깊게 봐버린 남편. 회사에 있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만 빼면, 하루 중 반은 온통 그 세상에 빠져있는 것 깉다.

퇴근하고 돌아와 뉴스 대신 돌려보는 <귀멸의 칼날> 시리즈. 특히나 극 중 렌코쿠와 아카자의 대결 장면을 너무 좋아하는 남편은 심심해도, 우울해도, 기분이 너무 좋아도 그 장면을 보고 또 본다. 계속 돌려보는 통에 옆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인터넷 쇼핑을 하던 나도 대사를 외울 정도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보는 걸 넘어 사는 것까지 즐기게 된 남편. 극중 캐릭터의 피규어를 사모으는 게 취미가 돼 버렸다.

주인공 정도 사는 걸로 끝날 줄 알았던 피규어 수집이 이제는 극중 캐릭터 전부를 사모으는 것도 모자라(대체 등장인물이 몇 명이야. 끝이 없다), 같은 캐릭터도 동작이 다르면 사고, 새로운 게 나오면 또 산다. 얼추 집에 있는 걸 눈으로만 훑어도, 수십 만원 어치는 될 것 같다.

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도 않는 내 입장에선 사실 그 피규어들이 전부 돈으로만 보이는데...

내심 혼자 '하. 저게 다 얼마야. 용돈이 너무 넉넉한가? 줄여나 되나?' 생각은 하면서도 아직 그러지 못한 이유. 출퇴근에 지치고 힘든 남편에게 그래도 그게 좀 위안(즐거움)이 된다 싶어서다. 그런데...


"토보이. 나 오늘 좀 늦어. 퇴근은 했는데 중고거래가 있어서 어디 좀 가야해. 쿨거래 마치고 전화할게."


시리즈가 끝나 좀 잠잠하다 했더니만,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되자 다시 불붙은 남편의 피규어 수집욕. 이번엔 중고거래란다.

그런데 거래가 끝나도 한참 전에 끝났을 시각. 남편에게선 전화가 없었다. 그래서 뒤늦게 연락을 취해본 나.

남편이 중딩에게 사기(?)를 맞았단다. 사연인즉슨, 알고보니 셀러는 중학생, 건네받은 물품은 처음 얘기됐던 것과 달리 일부 파손된 제품이었다고 한다. 거래를 마치고 돌아선 직후에야 그걸 알아차린 남편은 반품을 하기도 뭣해, 본드를 사서 어디선가 그걸 이어 붙이고 있다고 했는데...


"아 그럼 그거에 정신이 팔려서 여태 전화도 안했단 말야?"

 

그런데 집에 와서도 남편의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자정이 다 되도록 쓸고 닦고. 떨어진 귀걸이가 잘 붙질 않자 그 대신 싸인펜으로 그려넣는 걸 택한 남편은 그러고도 또 그게 마음에 안들어 손에서 피규어를 놓지 못했다.


"말 안하면 아무도 몰라. 귀걸이 있던 없던 그걸 누가 알아."

"내가 알잖아. 그게 자꾸 맘에 걸려."

"아 그럼 밤새 그러고 있을 거야? 내일 회사 안가?"


결국 참다못해 빽!!!

고작 피규어 하나 때문에 중딩에게 사기를 맞고 와 징징대는 남편이라니. 가뜩이나 갱년기 불면증으로 잠 때를 놓치면 꼬박 날밤 새우기 일쑤인 나는 자지도 않고 징징대는 남편이 짜증이 나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여차하면 집에 있는 피규어란 피규어는 전부 당근에 내다 파는 수가 있다고 겁박을 한 뒤에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는데...

이 녀석이 귀걸이 없는 그 녀셕. 사실 탄지로는 귀걸이가 포인트이긴 하다.
바로 다음 날...


이번엔 내가 키링에 꽂혀버렸다.

걱정했던대로 밤새 잠 못 이루고 뒤척였던 나. 남편이 출근한 다음에야 다시 침대에 누웠는데...

무심코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맥도날드의 맥스파이시 미니 키링 세트를 발견했다. 햄버거 세트를 사면, 6,500원에 살 수 있다는 이 작고 귀여운 키링들. (주의. 거저 주는 건 아니다)


  


가방에 주렁주렁 장식을 다는 게 요즘 유행이란 걸 알게 돼, 때마침 지난 주말 나 역시 처음으로 가방에 달 인형 하나를 샀다. 그런데 인형은 하나인데, 돌려가며 드는 가방은 서너 개. 가방을 바꾸면 인형도 옮겨 달아야 하는 상황이라, 키링이라도 하나 더 살까 하던 참인데. 그런데 단돈 6,500원에 이 작고 귀여운 키링들이라니!!!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남편의 피규어나 이 키링이나 마찬가지다. 지나고 나면 다 예쁜 쓰레기들. 남편의 피규어는 예쁜 쓰레기 취급을 해놓곤, 나는 이 키링을 사자니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거 봤어? 맥도날드 미니 키링 세트?"

 

그런데 소유욕이 잦아들긴 했지만, 사라진 건 아녔나보다. 퇴근해 돌어온 남편에게 내가 무심코(?) 키링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남편은 대뜸 핸드폰을 꺼내 들곤,


"저 혹시 맥스파이시 미니 키링 세트 지금도 살 수 있나요?"


인터넷에 검색을 해본 뒤, 출시 하루만에 재고가 동이 났다는 소식을 접한 남편은 부랴부랴 집 근처 24시 맥도날드마다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 거긴 재고가 있다구요? 바로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결국 서너 군데 전화를 돌린 끝에 재고가 남아있는 근처 매장 한 군데를 찾아낸 남편.

밤 9시가 넘은 시각.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은 남편은 그 길로 차를 몰아 맥도날드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햄버거 세트 하나를 사 남편에게 먹이는 대신, 마침내 맥스파이시 미니 키링 세트를 손에 넣었다.


 

돌아오는 차 안


"낼 모레면 오십인 내가 2시간 걸려 퇴근해 와서는 키링 소리 듣자마자, 맥도날드마다 전화해, 차로 달려 가, 대단하지 않냐? 캬 아직 젊다 젊어!“

"가만 보면 당신은 좋은 남편 코스프레 하면 되게 뿌듯해 하더라?"

"뭐야,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오빠. 이럴 땐 너 때문이라고 하지 말고, 널 위해서라고 말해줘. 그래야 진짜 로맨틱하고 좋은 남편이지. 안 그래?"


사실 나는 내심 남편이 고마웠다.


결혼 전에 나는 이상적인 부부란 취향도 취미도 같은 부부인 줄 알았다. 그리고 늘 그렇게 되길 꿈꿨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부부는 사실 각자의 서로 다른 취향도 취미도 존중할 줄 아는 부부가 아닐까.

지금의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이상적인 부부보다는 그런 성숙한 부부가  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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