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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s Sep 05. 2020

컨테이너 아저씨

7. 다 똑같이 사나 봅니다

스웨덴에서 장을 볼 때면 항상 가던 야채가게가 있다. 학교에서 언덕을 따라 3분만 걸어 내려가면 있는 한 컨테이너 박스가 그것이다. 마트처럼 물건이 잘 정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매대에 뿌려져 있어서 손님들은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필요한 만큼만 담아서 카운터로 가져가야 했다. 그럼 카운터에 있던 아저씨가 저울에 물건을 하나하나 달아서 가격표를 쭉 뽑고는 결제를 해준다. 로 살게 마땅치 않은 날, 마늘 한 줌만 들고 가도 아저씨는 여전히 웃으며 가격표를 뽑고는 했다. 아마도 아저씨의 그 미소에 어떤 이끌림이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금세 컨테이너 박스의 단골손님이 되어 있었다.


딱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아저씨는 영어를 잘 못했고 나도 스웨덴어를 몰랐으니 우린 말로는 통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물건을 집을 때에도, 계산서를 뽑을 때에도, 아니면 처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에도 우린 "Hej, hej!" 짤막한 인사 한 마디 이후로 줄곳 침묵을 유지하곤 했다. 딱 한 번 언어를 사용한 소통이 있었던 날이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나와 같이 장을 보러 갔던 형이 노란색 망고를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망고가 정말 사고 싶었지만 하나에 30 크로나는 조금 부담이 있어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아저씨가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It's a good mango! Very good!" 망고를 샀다. 나중에 형이 알려줬다, 망고가 정말로 맛있었다고.


언어는 단골이 되는 데에 큰 장벽은 아니었나 보다.


끔 가게가 바쁠 때면 아내분도 나와서 일을 돕고는 한다. 그럴 땐 아저씨는 뒤에서 물건을 나르고 아주머니는 카운터에서 계산 업무를 본다.


어느  20 크로나 정도 되는 계산서를 받고는 아주머니에게 신용카드를 내민 적이 있었다. 아주머니 역시 영어를 못하시는지 내게 스웨덴어로 계속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셨다. 결국 내가 못 알아듣자 손으로 동그란 모양을 보여주면서 "Cash, cash!"라고 말하고 나서야 현금을 달라는 말을 겨우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한텐 현금이 한 푼도 없었으니... 내 뒤에 기다리는 줄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는 여전히 현금이 없다고 영어로 하소연하고 있었다.


실랑이가 길어지고 내 뒤의 줄도 점점 길어졌다. 은근슬쩍 아저씨가 계산대로 걸어 들어왔다. 내 카드를 가져가더니 리더기에 꽂고는 어느새 20 크로나가 결제된 영수증과 함께 내주었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참 고마웠는데. 아저씨가 퇴근 후에 무사했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우리 집 과일 장사를 한다. 도매시장의 한 구석 매대에서 매일매일 달큼한 과육과 함께 살아간다. 꼭두새벽부터 경매로 물건을 들여오는 아빠, 아침부터 하루 종일 매대를 지키는 엄마.


한 박스의 복숭아를 팔기 위해 수십 분을 씨름하기도 한다. 손님들은 항상 물어본다. 이거 맛있냐고, 싱싱하냐고, 1000원만 더 깎아달라고. 그렇게 여러 명과 수십 번의 흥정을 하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 마침내 물건을 사겠다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가 내미는 것은 어김없이 신용카드. 요즘 세상에는 아무도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우리가 수수료 떼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아무리 하소연해봤자 지갑에서 없던 현금이 생기지는 않는다. 결국 엄마는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신용카드를 받아 든다.


그 뒤에는 아침에 경매로 받아 온 물건을 옮기느라 분주한 아빠가 있다. 끔 소매가 바쁠 때에는 엄마 옆에서 같이 장사도 하는데, 그놈의 흥정이 문제다. 아빠는 꽤나 흥정을 많이 해주는 편이다.


우리 집과 예테보리의 컨테이너가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우린 다 똑같이 살아가는 모양이다.


아저씨의 미소를 잊어버렸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애를 써도 그 배경의 사과들만 떠오를 뿐 아저씨의 얼굴은 지워졌다. 사진이라도 같이 한 장 찍어둘걸 그랬나 가끔 후회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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