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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s Apr 20. 2021

커피에 반하다

커피와 일상

핸드드립 커피와의 첫 만남은 기막힌 우연이었다. 실수였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일 수도 있겠다. 군대에 있을 때 처음으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면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지만, 어쨌든 우리의 첫 만남은 그랬다.


PX에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물건들을 많이 팔고 있는데, 이를테면 꿀, 홍초, 포카리스웨트 가루 같은 평상시에 사 먹지 않을 것 같은 물건들이 즐비하다. 그런 곳에 분쇄 원두가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지만, 누가 군대에서 핸드드립용 분쇄 원두를 판매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하겠는가?


나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저 인스턴트커피 가루일 것이라 생각하고 1kg짜리 커피 가루 한 통을 구매했다. 아마도 맥널티의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블렌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점심 식사 후에 한 잔을 타 먹으려고 포장지를  시원하게 개봉했다. 가루를 종이컵에 조금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비로소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루가 녹지 않는다...


원두 가루가 가라앉은 그 한 잔을 마셔보았다. 향은 정말 좋았다. 정말 커피를 잘 만드는 카페에서 마신 것만 같은 고소한 향이 감돌았다. 하지만 역시 밑에 있던 가루가 문제였다. 맛은 텁텁했고, 가루가 입 속에 들어왔을 때에는 쓴맛이 너무 강렬했다.


이미 포장지도 뜯었고, 가루를 덜어내기도 했으니 환불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버리자니 돈이 너무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사용할 수 있는 도구라곤 갖고 있던 텀블러 두 개와 정수기뿐이었으니 더 막막했다.


그날 오후, 충동적으로 스테인리스 필터를 하나 구매했다. 그 필터만 있으면 어떻게든 이 가루를 잘 먹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원두 가루에 들인 돈을 아끼려고 필터까지 충동구매를 해버린 셈이니 이 일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앞뒤가 맞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이 아닐 수가 없다. 어쨌든 이게 내가 커피를 내리게 된 계기이다.


아침에 코 끝을 스치면 유난히 기분이 좋아지는 향이 있다. 갓 구운 빵 냄새와 고소한 커피콩 볶는 냄새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빵집이나 카페 앞을 지나갈 때면 종종 그 향기가 사람을 붙잡는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내 손에는 아메리카노 한 잔과 빵 한 조각이 들려 있는 경우가 다분하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즐기는 한 잔의 여유를 상상하기에 그 정도면 충분하다.


요즘 들어서 가장 좋아하는 아침식사 메뉴는 프렌치토스트와 커피 한 잔이다. 달달하고 고소한 토스트와 쌉쌀한 커피 향의 조화는 절대로 실패할 수가 없는 최고의 궁합을 자랑한다. 살은 조금 찌겠지만 정말로 행복한 맛이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거짓말을 잠시라도 믿고 싶어 지는 그런 맛이다.


삭막할 수도 있는 자취방에 아침마다 커피와 빵 냄새가 퍼지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지 않은가?


사실 내가 커피의 맛과 향을 그렇게까지 잘 알지는 못한다. 어떤 원두에서는 꽃향기가 나고, 어떤 원두에서는 견과류 같은 향이 나고, 또 어떤 원두는 toffee note가 있고... 참 설명이 많지만 이해할 수도 없고 그렇게 느끼지도 못한다. 도대체 커피에서 꽃향기가 난다는 사람들은 얼마나 예민한 사람들인지 궁금하다.


내 기준은 그저 '좋다/별로다'이다. 이거면 충분하다. 이 단순한 기준에 의해서 고른 원두는 일리(illy)의 'Dark intenso'이다. 시큼한 맛이 적고 묵직한 것이 참 마음에 드는 커피이다.


날이 더워지면 나름의 계절메뉴인 콜드 브루를 시작한다. 찬 물에 분쇄 원두를 넣고 이틀을 벽장 속에 잘 넣어두었다가 필터링을 해주면 완성이다. 나는 원액이 진한 것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원두와 물의 비율을 거의 일대일로 맞춘다.


콜드 브루는 일반 드립 커피나 아메리카노에 비해 쓴맛이 적고 더 고소한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그 농도가 진한 줄도 모르고 많이 마셨다 그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기도 하니 그 이후로는 조금 연하다 싶은 정도로 농도를 맞추게 되었다.


내일은 필터링을 하는 날이다.


하루는 콜드 브루 원액이 정말 맛있게 잘 나왔던 날이 있었다. 봄 날씨가 화창하여 정말로 바깥에 나가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그런 좋은 날이었다. 밖을 보며 커피를 마시다 며칠 전에 네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나누고 싶은 맛'.


문득 너에게 커피 배달을 가야겠다 생각했다. 텀블러에 얼음을 넣고 얼른 한 잔을 만들어냈다.  얼음이 녹기 전에 얼른 커피를 맛 보여주고 싶어 면도하는 것조차 잊은 채 네게 달려갔다.


가끔은 똑같은 커피를 마셔도 다른 맛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커피는 술과 같아서 어떤 날은 쓰고, 어떤 날은 유난히 달고 고소하다.


기분은 어떤지, 날씨는 어떤지, 누구와 함께 마시는지. 참 신기한 한 잔이다.


커피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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