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댄디스트가 되다
14시간 정도 지난 것 같다. 나는 곡을 완성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고 유튜브 영상을 보느라 두 눈이 충혈되었다. 미용실 예약시간이 임박했다. 저번 주에 정산을 받자마자 평소보다 1만 원이 더 비싼 미용실을 예약했다. 같이 일했던 직원이 쌀쌀맞게 굴던 이유를 생각해보건대 덥수룩한 나의 헤어 스타일에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마 나를 간신히 작업실 월세나 내는 가난한 음악가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물론 미용실 비용을 절약하느라 이발 타이밍을 놓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의 스타일에는 오랫동안 쌓아온 나만의 댄디즘(Dandyism)이 있다. 독자들도 모를 수 있으니 간단히 설명해드려야겠다. 댄디(Dandy)는 기본적으로 기성품들과의 차별성을 둔다. 유행을 따르는 군중과 섞이지 않고 나만의 아름다움에 헌신한다. 댄디는 상류층들의 허영과 무절제를 비판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프랑스 작가 쥘 바르베 도르비이가 정립한 이 댄디즘을 아마도 그 직원은 몰랐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친절하고 쉽게 설명해줘야겠다.
‘JUNO HAIR’라고 적인 미용실은 부드러운 톤의 조명들이 가득하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찾으시는 선생님이 계시나요?”
딱히 찾는 디자이너는 없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나는 두 번 정도 말을 더듬고 말았다. 보들레르는 댄디즘이 자신감 있는 삶의 태도에 있다고 했거늘 나는 결국 화려한 조명과 직원의 노련한 말투에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앞서의 일을 복기하고 있는데 밝은 미소의 한 여성이 다가왔다. 겉옷을 챙겨주더니 가운을 입혀주겠다고 한다. 퇴근 직전이라고는 상상 못 할 생기 어린 목소리였다. 너무 오랜만에 들어본 아날로그 여성의 목소리. 나는 낮은 목소리로 겉옷을 내어 주며 말했다.
“이 책은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미학의 역사’라고 적힌 나의 책을 제목이 보이게끔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머리를 자르는 동안 ‘책을 좋아하시나 봐요’ 혹은 ‘이건 무슨 책인가요’와 같은 질문을 기다렸다. 그 후에는 내가 추구하는 음악 세계와 나만의 댄디즘을 설명해주어야겠다. 하지만 디자이너의 첫 질문은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눈이 많이 충혈되셨네요. 일이 바쁘신가 봐요.”
진땀이 흘렀다. 차마 4시간 동안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다니다 충혈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 제가 음악을 하거든요.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있다 보니 어쩔 수없이.. 또 요즘 큰 프로젝트를 하느라 많은 곡을 써야 합니다.”
놀랄 정도의 민첩한 거짓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 나는 한 달 넘게 곡을 쓰지 않았다. 트렌드를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거의 모든 예능을 챙겨보았고 유튜브 알고리즘에 올라온 양자역학 강의를 이해하기 위해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았다.
“아 음악을 하시는구나”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음악인에 대한 동경, 신비, 그 어느 것도 없는 것일까. 세상에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음악 하는 사람은 멋져요’,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세요?’ 같은 질문을 해준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저번에 취소된 가수들과의 프로젝트를 부풀려 건실한 뮤지션이라고 소개할 텐데!
그녀는 부릅뜬 눈으로 내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물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많이 힘드시죠?”
이 젊은 디자이너는 나의 음악에 쥐뿔도 관심이 없다. 나는 이 씁쓸한 확신으로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을 선사했다.
“다들 똑같죠 뭐”
그녀는 이발을 마칠 때까지 아무런 방해 없이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떠세요?
싱그러운 목소리를 듣고서 근래 자른 머리 중 가장 아름답다고 답해버렸다. 그녀는 별 5개와 리뷰를 부탁했고 나는 최고의 문장을 쓰겠노라 약속했다. 문 앞까지 나와 인사를 하더니 명함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미학의 역사’ 중간쯤에 꽂고 어물쩡 인사를 하며 나왔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비친 앞머리들이 일정하게 내려와 있다. 댄디즘은커녕 네이버 리뷰에 수두룩한 남자 머리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 고독한 땅에서 진정한 댄디즘은 불가능한 것일까. 한숨과 함께 왁스 발린 머리를 헝클었다.
카페에 가서 ‘미학의 역사’를 마저 읽는다. 3만 원을 투자한 미용실에서도 댄디즘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커피를 마시며 미학을 탐미하는 내 모습은 왠지 고독해 보인다. 물론 그걸 난 모른다. 그저 읽고 마실뿐. 여유롭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눈을 부릅뜨며 다시 책에 집중한다. 문 앞, 좌측 테이블의 사람들을 의식한다. 타인의 시선들이야말로 댄디를 완성하는 마침표다. 커피를 모두 마시고 한 번의 엉거추춤없이 계산대로 향했다. 그리고 잰틀 하지만 작은 목소리로 직원에게 재난지원금 사용 가능 여부를 물었다. 눈치없는 직원은 “네 재난지원금 됩니다!”라며 씩씩하게 복창했다. 결국 댄디를 완성할 마지막 기회를 놓친 채 씁쓸한 마음으로 카페를 나왔다.
한 손에 ‘미학의 역사’를 쥐고 헤드폰으로는 바그너의 교향곡을 듣는다. 작업실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서울 시내를 한 번 더 거닐어야겠다. 시내에는 나와 관련 없는 우아한 건물들이 줄줄이 서 있다. 좀 더 들어가면 아름다운 남녀들이 아름다운 도시의 경관을 완성하고 있다. 이쁘고 멋진 동년배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인파를 뚫고 지나간다. 겨울바람을 피해 쥐색 바람막이를 턱 끝까지 올리고 머리는 바닥을 처박으며 걸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나의 영혼은 쪼그라들고 있었다. 하지만 음악이 재현부를 넘어갈 때쯤에 보들레르의 말을 떠올렸다.
‘댄디는 정신적 귀족주의자이며 퇴폐기에 출몰한 마지막 영웅주의의 섬광이다’
현악기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교향곡은 웅장해졌다. 그래, 나에게는 바그너의 우주가 있다. 저기 스타벅스에 그려진 사이렌을 보며 오디세이아를 떠올릴 수 있는 호메로스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세상과 맞부딪힐 니체의 정신이 있다! 마지막 피날레 소리가 휴대폰 가게의 스피커를 압도했을 때,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작업실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