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퇴근하고서 바로 집으로 오지 못하고 친구가 하는 식당에 들러 따뜻한 음식 한 그릇을 비우고 막내가 마지막으로 들르는 학원 근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왠지 마음이 너무 허해서 차마 그 어디로도 발걸음이 닿지 않아 집으로도 안가고 긴 시간을 기다려 막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귀가한 적이 기억을 곱씹어봐도 최근엔 없는 것 같습니다. 캄캄한 마당과 집 주변의 가로등이 그저 오랜 습관처럼 찾아들던 집의 위치와 실루엣을 알려줍니다. 잘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잘 보이는 것도 아닌 바로 그런 어스름한 실루엣입니다.
대문을 지나 가로등빛 하나 없는 캄캄한 마당에 들어서면 든든한 우리 집 진도개 '미남이'와 '코코'가 반겨줍니다. 생각해보니 이 녀석들도 저녁 시간이 6시 즈음인데 두어 시간이나 늦게 저녁을 챙겨주었습니다. 서운해하지 않고 저녁을 먹으면서도 꼬리를 냅다 흔들어주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부모로 살아온지 올해로 딱 스무해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자녀로 살아온지 40여년이 훌쩍 지나 이제 곧 반백의 어디쯤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문득 부모로 살아갈 날은 그래도 좀 남았는데 부모님의 자녀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문득이라고 말했지만 벌써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어디를 가서든 부모님을 떠올리게 되고 어쩌면 지금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부모님들과 하는 마지막 무엇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슬퍼지려는 마음 대신 하나라도 더 함께 하고 싶어 바쁘게 먹고 사느라 부모님과 남기지 못한 사진을 요즘들어 부쩍 한 장이라도 더 남기고, 영상이라도 몇개 더 남기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런 사진과 영상들을 보먀 울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마음에 묵직한 어떤 것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내 자녀들 생일이며 자라는 동안 있었던 수많은 삶의 이벤트들을 챙기면서 늘상 하는 생각이 우리 부모님도 나를 이렇게 키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아이가 아파서 새벽이며 평일이며 주말이며 병원으로 뛰어갈 때면 급한 마음에 아무 생각이 없는데 진료를 받기 위해서 복도나 의자에 앉아서 수많은 아이들과 부모들을 볼 때면 또 우리 부모님도 나를 이렇게 키워냈겠구나 싶었습니다. 지금보다 아이들 키우는 환경이 훨씬 열악했을 테고 더 없이 불편한 것들 투성이였을 텐데 이렇게 사람 구실하며 살 수 있게 잘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끝도 없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런데 정말 아이를 낳아 부모로 살면서도 사는 게 바빠서 떠올리질 못했는데 시간이 점점 흐르고 큰 아이가 대학에 진학항 만큼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부모님들께서도 그 만큼의 세월을 안으로 쌓고 계셨던 거였습니다.
무엇을 바라 이 시간들을 치열하게도 살아냈을까. 무엇을 하려 이렇게도 부지런히 달려왔을까 싶습니다. 결국, 소중한 이들과 소중한 것들 곁에 평온하게 머무르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익숙한 것과 소중한 것은 어쩌면 다른 개념일 수 있지만 대개의 익숙한 것은 그 만큼 내 삶과 가까이 있었던 이야기고, 또 오래 같이 했다는 의미이기에 거의 높은 확률로 소중한 것으로 귀결됩니다.
소중한 것은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곁에 있어 모르고, 떠나 있어 모르던 있었으되 이젠 없는 것들
이세일 '습관의 사랑' 전문
이렇게 도발적인 문장을 포함한 시를 삼십대 중반에 써두었습니다. 그리고 10년도 훌쩍 지나 버린 지금 읽어내는데 그 의미와 깊이가 너무 다르게 다가옵니다. 어떤 마음으로 저 시를 썼는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 와서 읽어내는 그 마음은 그때 시를 쓰던 그 마음과는 아주 다른 양상입니다.
그때는 그저 내 곁에 있지 않다는 공간적 의미였다면 지금은 공간 뿐만 아니라 의미와 시간까지 더해졌습니다. 그래서 소중한 것을 내내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그 사실 때문에 더욱더 서글프고 슬픈 마음이 자꾸 찾아듭니다.
지금까지 무언가를,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지 위한 투쟁적인 삶을 살아 왔는데 그렇게 살면 안되었을 수도 있었단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소중한 것과 함께 하는 시간, 공간, 의미를 더했어야 했는데 거의 늦은 이제서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에 후회가 막심합니다. 기회 비용의 문제이고, 또 삶에 있어서 '만약 무엇 무엇이었다면'이라는 가정은 부질 없는 일이기에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시기는 정말 늦은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고민하는 대신 이제부터라도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기 위한 치열함 대신 곁에 있으면서 시간과 공간과 의미를 함께하는 것에 더 노력해볼까 합니다. 비틀즈(The Beatles)의 노래 '오블라디 오블라다(Ob-La -Di, Ob-La-Da)'의 가사처럼 삶은 계속 되는 것(Life goes on.)이니까요.
소중한 것은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지만 머무르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모두의 안녕과 지나온 시간, 앞으로 걸어갈 시간에 대한 사랑을 가득 담아 스스로에게 선물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