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25
윤리 전공자인 탓에(?) 6.4이후부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7)는 그 유명한 경구는, ‘말할 수 있는’ 세계를 초월한 윤리와 미학의 가치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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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5.6)
“나는 나의 세계이다.” (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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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같이 ‘영원의 관점에서’ 볼 수 없는 우리에게 세계는 ‘유아주의적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윤리적 의미에서의 무한하고 영원한 삶이란 ‘나’라는 소우주, ‘나’라는 세계의 한계 바깥에서는 도무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안팎을 이루는 모든 수수께끼들은 한데 접혀 ‘나’의 세계 바깥으로 밀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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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영원한 삶이란 현재의 삶과 똑같이 수수께끼 같지 않은가?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공간과 시간 밖에 놓여 있다.” (6.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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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삶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세계의 사실들에 관한 물음 뿐이다. 더이상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6.5) 이렇게 삶에 관한 물음을 취소하는 방식으로 삶에 관해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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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런 물음도 더는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 (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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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관한 형이상학적 물음을 유보하고 취소하는 방식은 붓다의 ‘무기설(無記說)’과 닮은 구석이 있다.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고 말하여야 할 것은 말해야 한다”는 붓다의 가르침은 비록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 비트겐슈타인과는 서로 대극에 있지만, ‘말하지 않음’으로써 삶의 의미와 가치를 극적으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두 현인은 통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삶도 다 알지 못하면서 죽음을 알려 하는가?”라는 공자의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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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삶과 세계에 대한 물음에 한계를 짓는 방식은 우리가 더욱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붓다와 공자가 삶에 관한 유의미한 물음만을 남겨두었듯이, 칸트가 인간의 이성을 심판대에 올려 한계짓기를 수행하였듯이,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말할 수 있는 세계의 한계를 그었듯이, 우리의 광대무변한 삶의 지평을 모두 담아낼 수 없다면 우리에게 가능한, 또는 그래야만 하는 세계의 한계를 짓는 행위야말로 이 세계를 올바로 살아내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유한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이자 권한이며 삶의 윤리가 아닐까.이렇게 세계에 대한 한계짓기가 수행되고 나면,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안쪽의 세계는 무한하고 영원한 삶으로 열린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시야가 한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6.4311) 이 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세계에 관한 물음이 없어도 신비스러운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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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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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방법론적 침묵’은 비록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대답을 줄 수는 없지만, ‘수수께끼가 없는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수수께끼’를 탐구하는 우리에게 우리가 딛고 올라설 수 있는 각자만의 ‘사다리’를 남겨둔다. ‘수수께끼가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분명 더욱 신비한 세계를 향해 딛고 올라설 수 있다. 그러한 세계는 초월의 방식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세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분명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6.43)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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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곧 나의 세계라면, 나의 세계를 다르게 살아가기 위해 딛고 올라서야 하는 사다리는 내가 지니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사다리를 놓는 삶, 이 불가능한 작업을 수행하는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영원하고 신비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