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토마토 - 토론토에서 맞이하는 토요일 아침
제일 쓸데없는 짓을 해보자.
스무 살 겨울에 작당모의를 했다. 연말연시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을 가장 하잘 없이 보내보자. 당시 행색이 그러하듯 이유는 없었다. 맥도날드에 모여서 어떻게 귀한 시간을 쓸모없이 보내볼까 궁리했다. 이런건 어때? 12월 31일 저녁부터 시작하는 50시간 시리즈. 맥도날드에 50시간 있기, 피시방에 50시간 있기. 우리 진짜 웃기고 멋지다. 피시방 50시간 다큐를 찍기로 하고, 24시간 만에 나와서 출소를 기념하는 흰 두부를 먹었다. 근데 맥도날드 50시간 있어도 돼? 24시간 운영이긴 한데. 알게 뭐야, 그들도 나도 서로에게 관심 없는걸.
오늘은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한 지 일주일 되는 날이다. 시차 적응도 끝내서 이제 밤에 자고 아침에 깨어있을 수 있다. 집만 구하면 정착했다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 부지런히 집을 찾아봤으나, 쫓겨났다.
토론토에 온지 이틀 째 되는 날부터 캐나다 한국인 커뮤니티인 캐스모, 페이스북 마켓플레이스, 키지지, 크레이그리스트를 수강 신청하듯 10분에 한 번씩 업데이트하며 집을 찾아봤다. 나는 성격 급한 한국인이니까.
꽤 괜찮은 조건의 집이 이있어서 메일을 보냈고, 뷰잉 약속을 잡았다. 첫 전화 영어 약속잡기였다. 이거 완전 오픽 시험 주제인데. 네이키드 보이가 있던 에어비앤비를 체크아웃하고, 오싱턴역 근처 에어비앤비로 이동했다. 뷰잉 약속은 저녁 6시었다. 에어비앤비와 보러 갈 집은 3km 정도 떨어져 있길래 걸어갔다. 가는 길에 자전거 보이가 "I love your nike shouse!" 하길래 인사하고 수다 떨다 저녁에 자전거 타기로 했다.
나 걸어서(walk) 약속 가는 중이야.
일(work)하러 간다고? 무슨 일?
엥? 나 일은 찾아야 되는디
오우 너 실업자야? 쏘뤼...
엥...?!
이렇게 발음을 배워간다.
거실, 주방, 화장실을 집주인 부부와 셰어 하는 룸렌트였다. 한 달에 900$. 토론토 집값은 정말 상상 이상이다. 그래도 집주인 부부가 굉장히 친절했고, 조용했고, 깨끗하고, 규칙 있는 집이라 마음에 들었다. 10월 4일 화요일에 이사하기로 했다. 첫 번째 뷰잉 한 집은 650$로 저렴하지만 지저분하고 낡아서 별로였는데 아주 마음에 들었다.
왜 10월 4일에 이사하기로 했냐면, 캐나다로 송금 신청한 돈이 4일에 지급 예정이기 때문이다. 수수료 아끼려고 와이어바알리 어플을 사용했는데 저렴한 대신 시간이 좀 걸린다고. 게다가 나는 개천절 연휴 끼고 신청한 거라 시간이 좀 더 걸렸다. 그래도 4일에 받을 수 있다고 되어 있길래, 4일이면 당연히 돈이 들어올 줄 알았다. 푸념하는 지금까지 돈이 안 들어왔다.
캐나다 계좌에 돈은 안 들어왔지만 양해 구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바리바리 짐을 챙겨서 이사하러 갔다. 우버 아저씨는 내가 말이 좀 빠른데 익스큐즈미 발음할 때 조심하라고 했다. 키쓰미로 들린다고. 와 아재개그는 만국 공통이군. 깔깔 웃어줬다.
집주인 부부는 반갑게 맞이해줬다. 3층인데 무거운 캐리어 올리는 것도 도와주시고, 물 한잔 내어주시며 선풍기도 켜주셨다. 영수증 써줄 준비를 하길래 말을 꺼냈다.
"이 어플 화면 보시면 알겠지만, 오늘 돈이 들어오기로 했는데 아직 못 받았다.."
"미안하지만 디파짓이 없으면 여기서 숙박할 수 없어. 너는 외국인이라 보증할 수 있는 게 없고, 다음 달에도 이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잖니. 에어비앤비와 마찬가지로 결제를 해야 숙박할 수 있어"
당연한 말을 단호하게. 창피했지만 맞는 말이라 미안하다고, 해결해 보겠다고 거듭 사과했다. 다행히 짐은 보관해 주신다고 해서, 5시까지만 맡아달라고 했다. 급하게 노트북만 챙겨서 터벅터벅 나왔다. 맞는 말이어도 서러운 건 매한가지라. 쪽팔렸다.
맥도날드가 보였다. 배도 안 고파서 애플파이와 망고 스무디를 키오스크로 주문하고 구석에 앉았다. 한국 시간은 새벽이라 고객센터 문의도, 가족에게 도움도 못 구했다. 다른 송금 시스템도 시간이 걸리고, 다른 카드로 입금해서 인출해도 한도가 100만 원이었다. 보증금은 180만 원이었다. 나 돈 있는데. 나 돈 있는데... 나 돈 있다고....
맥도날드에 기약 없는 기다림과 함께 5시간을 앉아있었다. 옆자리는 계속 바뀌었는데, 꾸벅꾸벅 졸던 백인 할아버지, 직원보고 손 까닥거리더니 핸드폰 보여주며 처리해달라는 백인 할머니, 흑인 꼬마, 학교 끝난 학생들. 이 동네는 아시아인이 적구나. 일 구할 곳도 마땅하지 않을 것 같은데. 지하철역도 좀 멀고. 겨울에 추운데 어떻게 걸어 다녀. 첫 인상이 이런데 같이 살 수 있어? 이 집은 신포도야. 신포도.
약속의 다섯 시가 됐고 나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맥도날드는 여전히 바빴고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 점은 좀 고마웠다. 맥도날드는 어디든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 같다. 기약 없는 기다림과 쫓겨난 사람, 잠시 앉을 곳이 필요한 사람, 눈치 안 보고 싶은 사람이 가만히 있다 가는 곳. 애매한 사람들이 모여서 애매하게 시간을 보내는 곳. 카페와 다르게 시끌벅적하고 부산스러워서 나 하나쯤 투명인간 되기 안성맞춤인 곳.
집주인에게 전화해서 일단 다른 에어비앤비를 구했다고 말했다. 사실 혹시 몰라서 예약은 안 했지만, 역시나. 집주인은 단호하게 짐 가져가라고 했다. 풀어뒀던 짐을 챙겨 나왔는데, 친절하던 아저씨는 문만 잡아줄 뿐 캐리어 내리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 인사도 대충 받고 그대로 문이 닫혔다. 다시금 실감했다. 나는 디파짓을 못 내서 쫓겨난 외국인이다.
친구는 거기가 네가 살 집이 아니라서 세상이 최선을 다해 막아 준 거라고 했다. 오늘은 모든 선택이 후회됐다. 수수료 내고 신한은행 해외송금할 걸, 에어비앤비 5일 체크아웃이었는데 무리하게 이사하지 말 걸, 처음 봤던 650$ 집 그냥 계약할 걸. 캐나다에 온 지 일주일이 됐다. 아직 후회할 일이 많을까. 모르겠다. 내일 또 집을 보러 가기로 했다. 의외의 행운이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