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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모리 Mar 29. 2024

안전불감증, 혹은 환대를 환대로 받아들이기

토마토 - 토론토에서 맞이하는 토요일 아침

술을 사러 나가기로 했다.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2016년의 고요한 겨울밤이었다. 나와 진주와 윤하는 안동에 있었고 더 조용한 하회마을의 한옥 숙소였다. 20대 초반에게 적막은 그저 심심함. 무작정 밖으로 나가 걷기 시작했다. 찬바람 속 헛소리를 주절거리며 40분을 걸으니 마침내 주유소가 나왔다. 제일 가까운 마트가 있나요? 아이고 아가씨들이 어째 이 추운 날 돌아다녀 내가 가는 길인데 태워줄까? 나는 반가워서 주절주절. 아저씨에게 우리의 젊음뿐인 여정을 얘기하려고 했다. 갑자기 진주가 내 팔을 콱 잡고, 말씀은 감사합니다. 저희 근처라서요. 하고 걸음을 종종 옮겼다. 그리고 눈을 흘겼다.


너 미쳤어? 누군지 알고 위험하게.


타인이 나를 해칠 수 있다. 특히 20대 여성은 표적이 되기 쉽다. 모두가 경고하고 뉴스와 숫자와 통계로 보여주는 사실은 나도 알고 모두가 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칼을 맞고 죽는 사람이 있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폭행당하는 사람이 있다. 지하철에서 조금 부스럭거리면 주변 사람이 흠칫하는 날 서있는 나라에 나는 살았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은 먹지도 말고, 모르는 사람 차에는 타지도 말아라. 말로 의사소통을 시작할 수 있을 때부터 시작된 교육이다.


너는 사람을 너무 잘 믿어. 마치 사람에게 당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아무 이유 없이 남을 돕는 인간들이 내 주변에 있었다. 10살의 김우주는 하굣길에 우다다 뛰어가서 할머니 리어카를 밀어주고, 56살의 남재화는 폐지 수거하는 노인이 올 때마다 바나나 우유를 준다. 노숙자를 위해 $5 지폐를 지갑에 항상 넣어 다니는 사람이, 어디 갈 때마다 음식을 나눠주는 사람이, 현금이 없다 하니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계산하라는 상인이, 길을 묻자 택시를 잡아 태워주는 사람이, 내 어딘가에는 있었다.


나는 겁도 없이 히치하이킹을 하고, 기차에서 만난 부부와 얘기하다 여정을 바꿔 그 집에서 저녁을 먹고, 여행 가이드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는 말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답장하다 같이 간 친구한테 혼나고, 데려다준다는 말에 흔쾌하다. 운이 좋아 내 세상은 나를 아직 배신하지 않았다. 내가 남을 돕는 것과 남의 호의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꽤나 다른 선상에 있는데, 나는 그냥 사람을 믿고 싶나 보다. 사심 없이 그래야만 한다는 거만함이 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캐나다에 있다. 약에 취해 소리 지르고, 바지를 벗고, 길바닥에서 자다가도 문을 잡아주고, 기부하고, 웃는다. 이민자가 많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낯설어서 언제나 죄송하다고 말하는 게 캐네디언의 밈이다. 대체로 정중하고 친절하며 언제나 죄송하다고 말한다. 20대 여자에게만 보여주는 호의, 피곤하면 저희 집에서 쉬었다 가실래요, 류의 걸쩍지근한 찐득함 말고, 사람이 사람에게 보여주는 사소한 다정함이, 환대를 환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감각이 멸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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