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샤힌 아크타르
읽기 괴로운 책들이 있다. 너무 두꺼워서, 혹은 재미가 없어서, 또는 어려워서. 다양한 책들이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당신에게는 어떤 책들이 괴로움에 몸서리치게 만드는지? 나에게는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그리고 이 책이 특히나 괴로웠던 책으로 기억된다. 이 세 책의 공통점이라면, 폭력적이고 참혹하다는 점이다. 돈 키호테의 1권은 사디스트적이었고,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들려주는 전쟁의 이야기는 잔학하다. 그리고 이 책,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사회가 어떻게 여성을 찢어 놓는가에 대해 샅샅이 드러내고 있다. 정말 괴로운 읽기 경험이었다.
비랑가나는 벵골어로 war heroine이라는 말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직후, 전시에 파키스탄 군과 협력 세력에 의해 전쟁 포로로 강간을 당한 여성들에게 정부가 수여한 명칭이다. 전쟁 영웅, 비랑가나들은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와 같은 전쟁범죄 피해자들이다. 이 책은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을 겪고 살아낸 전쟁영웅, 비랑가나의 삶을 마리암(메리)라는 한 여성의 이야기로 풀어 전한다.
1남 3녀 집안의 장녀, 마리암은 어릴 때 한 소년과 영화를 보러 나가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온 사건 이후 마을에서의 평판이 깎여 시집을 갈 수 없게 된다. 소년과 아무 일이 없었음에도, 그 사실관계는 참작되지 않아 마을에서 쫓겨나듯 대학에 입학한다. 마리암은 대학생 시절에 만난 남자 친구와 결혼을 기대하기도 하지만, 남자 친구는 그녀를 성적으로만 이용한 채 버리고 떠난다. 그 이후로 전쟁이 일어나, 그녀는 남동생과 함께 피난을 다니게 된다.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던 남동생은 전쟁에 게릴라군으로 참전하였다가 죽고, 마리암은 파키스탄 군의 포로가 되어 감금과 성 학대를 당한다. 전쟁이 끝나고 풀려난 마리암은 정부로부터 '비랑가나'라는 명칭을 받으며 사회 복귀를 위한 보조를 받지만, 결국은 가정으로도 사회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실패한다.
마리암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다차원적이고 빈틈없이 촘촘하다. 그것이 이 소설을 읽기 가장 힘들게 했다. 마리암의 겪게 되는 온갖 고초에 대한 서술은 오히려 느슨하며, 감정 호소적이지도 않다. 차분한 서술이지만 마리암의 인생 파고가 너무 높아서 그 아픔은 여전히 처참하다.
이 소설 속에서 마리암은 끊임없이 처형당한다. 유년 시절 마을에서 그녀는 마을 공동체로부터 평판 살해를 당했으며, 대학 시절에는 남자 친구로부터 오로지 도구로서 사용되며 인격을 질식당한다. 전쟁 중에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말살당한다. 옷은 벗겨졌으며, 최소한의 식음과 청결이 해결되지 못하는 곳에 감금되고, 맞고 강간당한다. 종전 이후로도 세상은 마리암에게 '구성원'으로 살아갈 기회를 주지 않는다. 정부는 근근이 빌어먹는 삶이나 결혼으로 떠민다. 가족들은 그녀의 귀환을 부끄러워하며, 사회는 그녀를 구경거리 삼고 멸시한다.
이 소설 속의 방글라데시는 용서와 관용이 없다. 한 발이라도 잘못 디뎌서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세계. 그 세계에서 마리암은 바닥보다 더 아래, 바닥을 딛고 선 자들의 발 밑에 있다. 짓밟히는 생의 고통 속에서 그래도 살아가는 삶의 처연함이 이 소설에 그대로 담겨있다.
반면에, 마리암을 지그시 밟아버린 군화 신은 발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전범은 처벌받지 않았으며, 그들은 사뿐히 날아간다. 피해자의 명예가 땅에 떨어져 온갖 쓰레기와 함께 나뒹구는 동안 가해자의 명예는 여전히 드높고 깨끗할 수 있는가.
방글라데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다카에 방문했던 2017년과 2018년을 생각한다. 우리 독서모임 책 리스트를 살펴보며 이 방글라데시 소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설렘을 생각한다. 그 기쁨과 설렘 이후의 이 고통은 나의 무지에 대한 제값이다.
방글라데시는 내 어림짐작보다 더 복잡하고 다난하고 아픈 역사를 가진 나라였고, 이 책으로 인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 중 어떤 것도 나의 지난 방글라데시 방문을 더 의미 있게 해주지는 않았다. 늘어난 것은 슬픔이다. 내 기억 속 흙 빛 다카는 이제 잿빛이 다 되었다. 회의장 30명이 둘러 않은 라운드 테이블에 단 한 명의 여성 공무원도 찾을 수 없었던 날이 떠오른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발을 헛디뎌 사라진 것일까. 왜 여전히 여성이 걸을 수 있는 길은 좁고 험한가.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이랬다.
[이 책의 주제] 여성 서사를 통해 전쟁 속에서 여성의 위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쟁 속 여성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함께 페미니즘 담론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여성성, 여성의 역할, 여성의 위치에 대해서 생각해볼거리를 많이 준다. 정보화되고 나면 삭제, 탈락되어 전달되지 못하는 감정들이 잘 담겨있는 책이다.
[모성애의 강요] 어느 사회에서나 모성애가 강요되는 것일까. 비랑가나는 전쟁 포로로 강간을 포함해 잔학한 폭력의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지만, 전쟁 후에도 결혼과 출산이 강요된다. 우리 사회에서도 모성애는 여전히 강요되고 있는데, 산후조리원도 일례가 될 수 있다. 한 사회과학자의 논문에서 산후조리원이 여성에게 여성성(아이 낳기 전으로 빨리 돌아갈 것)과 모성애(모유 수유)를 강요하는 장치로 보았다.
[인간의 도구화] 여성은 남성의 성욕의 해소 도구이며, 재생산(출산)의 도구로 그려진다. 때문에 결혼하지 못하는 여성, 나이 든 여성은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쓸모없는 존재이다. 한 남자의 아내로 집안을 돌보고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하는 여성은 더 이상 환영받을 수 없다.
마리암 집안의 독남이었던 몬투는 전쟁에 나서지만 그는 수급이 가능한 병사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 죽자, 그의 어머니는 폐경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자신의 나이에 비통해하며, 그의 아버지는 삶의 의미를 잃은 듯 정신을 놓아버린다. 몬투가 아버지의 인생에서 최후의 의미였던 것이다. 대를 잇는다는 것이 뭐길래 온 세상은 대 잇기에 미쳐있을까.
인간의 도구화가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파키스탄 군의 강간으로 인해 임신한 비랑가나들의 태아를 강제로 낙태하고, 출산해낸 아이들은 빼앗아 해외 입양 보내 버린 일이다. 비랑가나들은 위대한 방글라데시의 아이들을 낳기 위한 통로이므로, 그들의 의견과 결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파키스탄인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들은 방글라데시에서 치워버려야 할 위협적 존재다.
[언어의 아이러니] 전쟁의 영웅, 비랑가나. 강제 성노예로 파키스탄 군에 학대당하다 돌아온 사람들에게 비랑가나라는 칭호를 주지만, 이 언어의 아이러니가 잔인하다. 슬퍼하지 말라는 사회의 명령 같다. 폭력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여성들에게 결혼이라는 사회제도로 귀환하여 역할할 것을 강요하는 칭호이기도 하다.
[대중의 외면] 모임원 모두 이 책이 전달하는 강렬한 메시지에 매료되었지만, 섣불리 다른 사람에게 추천은 하지 못하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왜 이런 책은 외면을 받을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분별력을 갖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분별력을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거부한다는 생각이 든다.
샤힌 아크타르,「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https://ridibooks.com/books/1963000124
샤힌 아크타르, 「작전명 서치라이트」 *위 책과 동일한 작품의 영역본이다
https://ridibooks.com/books/3706000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