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도교수는 어느날, 본인이 벨기에에서 조교수를 하던 시절에 관해 이야기한다. 독일인으로서 벨기에 내에서는 소수이자 경험도 일천한 편이니, 이를 이끌어주는 멘토 같은 성격의 지긋한 원로 교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교수는 그저 본인의 연구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후배 교수 및 박사생들을 잘 이끌어주는 훌륭한 선생의 표상이기도 했는데, 그의 정년퇴임 기념식에 그는 한 시를 언급한다.
그 시는 독일 시였고, 역시 저자도 독일인이다. 굉장히 훌륭한 시였는데, 정작 독일인인 그 당시 젊었던, 나의 지도교수는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꽤 많이 흐른 지금, 교수는 그 시를 문득 떠올린다. 그러고 이를 검색했는데, 그는 그 시인을 본인이 알 수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는 그 시인이 적극적인 나치 활동 부역자였기 때문.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하며, 그 멘토 교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인용했을 거라고 이야기하곤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에게 비슷한 주제를 품고 있는 이야기를 알고 있는 이가 있냐고 묻는다.
나는 그때, 나의 사관학교 철학 교관이 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 해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전어를 해석한 전설적인 학자의 책 중의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고 한다. 그 누구도 본인의 어깨를 밟을 수 없다. 이말인즉슨, 아무리 뛰어난 이도 이 모든 걸 다 해낼 수 없으며, 이전 세대 학자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즉 그 어깨를 밟고 연구를 진전하는 것이며, 본인도 후대를 위해 어깨를 내어주는 역할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시도 비슷한 맥락의 무언가였는데, 이는 아버지가 본인의 자식들에게 본인이 했던 삶을 잘 전수하고, 그 자식들이 또 그들의 자식들에게 이를 전수하고 발전한다는 유의 주제였다.
우연히 이 이야기를 다시금 나의 철학교관에게 물어볼 기회가 생겼다. 소셜 미디어의 사진이 한 번 보고 금방 사라지는 탓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엔 그분이 보내줬던 캡쳐본이 사라졌다. 그런 이유로 똑똑이 챗지피티에게 물어보니 대답해준다.
“The quote you are referring to is attributed to the Sanskrit poet and philosopher Bhavabhuti. It comes from the preface of his play "Uttararāmacarita" (The Later Story of Rama). Bhavabhuti is often compared to Kalidasa and is considered one of the great playwrights in classical Sanskrit literature.
The specific line you're mentioning is a famous verse where Bhavabhuti expresses humility about his work and the transient nature of knowledge and art. The line roughly translates to: "The earth is almost covered with my predecessors, just enough room left for the shoulders of a newcomer like me." This reflects Bhavabhuti's acknowledgment of the vast contributions of those who came before him, leaving only a small space for him to add his work.”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진짜인지 구글에 검색하는데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이젠 이 인공지능의 방대한 데이터가 이 구글의 검색을 뛰어넘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비슷한 맥락으로 이 독일 시에 관해 물어봤는데 챗지피티는 두 가지 인물을 소개해준다. 정확히 교수가 인용한 이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물어볼 기회가 있겠지.
각설.
최근 인공지능의 대단한 성공과 관련하여 일견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는 연구실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입장 차이가 극명히 나뉜다. 어떤 이는 로봇 내지는 자율주행 자동차 관련한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는데, 그는 많은 데이터를 훈련하여 물리학적 모델 없이도 성능을 내는 지금의 머신러닝 기법과 이와 반대로 물리학적 모델을 바탕으로 일정의 오차를 고려한 최적화 방법인 Model Predictive Control (MPC), 두 가지 방법 모두를 접목시키는 연구를 하고 있다.
한편, 어떤 이는 AI니, 머신러닝은 너무나도 Hype, 즉 거품이 많이 끼었다며 이에 비해 클래식한 접근 방법인 MPC 내지는 수학적 최적화 방법에 더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이 옳다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흔히 AI나 머신러닝을 한다는 이들이 기본적인 수학적 이해가 결여된 채 기존에 짜인 코드만으로 무작위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대한 경계는 나도 매우 공감한다.
물론, 많은 데이터가 있다는 가정하에, 이와 같은 접근 방법은 사실 꽤나 효과적이다. 수학적인 이해와 무관하게 큰 노력 없이 어느 정도의 결과물을 낼 수는 있는 방법이기에. 즉, 많은 분야에 있어서 꼭 수학적인 이해가 없더라도 그동안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를 이를 통해 해결하여 더 나은 연구를 할 수 있는 토대가 생겼다는 점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이게 정말 효율적인지는 물어보아야 할 문제이다.
비단 최첨단을 달리는 연구 분야를 제외하고도, 우리의 삶엔 이와 관련한 큰 변화가 생겼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이젠 단순 반복, 작업을 요구하는 행정 업무는 의미가 없어졌고, 언어의 장벽도 많이 허물어져 지금의 번역 사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런 추세에 한 박사생은 교수에게 묻는다. 본인이 느꼈을 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교육 시스템이 다 바뀔 거로 생각하는데, 예를 들면, 내가 원하는 질문을 수시로 대답해 줄 수 있는 챗봇이라든가, 양질의 동영상이 제공된 플랫폼을 통해 교육이 진행된다면, 지식을 전달하는 대학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지 않겠냐고.
교수는
‘우린 현재,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수업하고, 평가하는 과정을 하고 있는데, 네 말처럼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에 사람들이 다시금 현장으로 복귀하는 건 인간은 실제로 상호작용이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나도 이게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다. 이미 지금 알고 있는 나의 지식보다 컴퓨터가 더 똑똑한데, 인간의 한계는 내가 쌓아온 경험과 지식이 세대를 거치며 결국 죽기에 사라지는 탓에 기록을 하는 것인데, 컴퓨터엔 그 한계가 없으니, 사실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세대를 거듭하며. 어깨를 내어주며 지식을 전수하는 학문의 시대는 이제 끝이 난 걸까. 이런 이유로 이 모든 데이터를 관장하는 기업들이 너무나도 비대해지고 강력하여 그들이 설사 잘못된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미래는 더 어두울지도 모른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국가의 힘보다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애플과 같은 빅테크의 힘이 더 클 지도 모를 일이다. 이게 국경이 없는 진정한 세계화라면 그럴지도 모르는데, 그 미래가 썩 좋아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