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축제와 일상으로의 복귀
다음 날.
오늘은 Straubing 맥주 축제, Volksfest를 가기로 한 날이다. 이 Volksfest에서 제일 유명한 건 우리가 흔히 아는 뮌헨에서 열리는 Oktobefest, 그리고 지역마다 그들만의 Volksfest가 매년 비슷한 시기에 2주 간격으로 열린다. 바이에른에 사는 이들은 이렇게 지역마다 열리는 맥주축제를 돌아가며 참가하기도 한다. 가죽바지와 전통의상을 입고 맥주를 마시며. 그리고 Straubing의 맥주 축제는 바이에른에서 규모로만 두 번째이다. 이 조그만 도시가 바이에른에서 눈에 띌 수 있는 유일한 시기가 이때다.
그동안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이미 그때의 삶을 완전히 정리하고 새출발을 한 내게 그곳은 꼭 돌아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멀리까지 무거운 가죽바지를 들고 왔으니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친구들이 이야기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애초에 가지도 않았을 테다.
다시 찾은 Straubing. 솔직히 좋지만은 않았다. 떠올리기 싫었던 기억도 났고 그 모든 풍경에 썩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이곳에서 정말 난 1년 가까이 살았던 걸까. 학생 기숙사는 예전보다 많아졌지만, 이 조그만 도시는 기본적으로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다시 가보니 이곳을 떠나길 잘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축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당시 나는 꽤 들떴었고, 많은 시간을 보냈던 대학 건물과 시내에서 큰 향수를 느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난 알고 있다.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학교 건물을 돌아보고, 도나우 강을 따라 맥주 축제 행사장에 진입한다. 너무 많은 인파와 우유부단한 동행들에 살짝 화가 났지만 이내 맥주가 들어가고, 특유의 음악이 펼쳐지니 그런 감정들은 금세 사라졌다. 맥주 1L를 마시고, 맥주 텐트를 빠져나와 시내를 잠깐 구경하는데 옛 축구 동료를 마주했다. 그와 이야기하는데, 맥주가 이미 들어가서인지 독일어가 술술 나온다. 이상하게 그의 독일어가 또박또박 잘 들린다. 이미 취기가 오른 탓에 나의 행동거지도 살짝 오버스러움이 있었던 듯하다.
시내 안에 있는 대성당은 가려던 순간에 잠겨버려 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퍽 아쉽다. 그곳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가. 그걸 제외하고 시내라고 해봐야 광장에 있는 시계탑이 전부이다. 그래도 이 모든 게 알코올 때문인지 다 좋았다. 축구 동료들은 내게 그쪽 텐트로 오라고 이야기했다. 한편, 나의 일행은 거기 말고 다른 텐트로 가자고 했는데, 어찌어찌 축구 동료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됐다.
이미 6시 반이 넘어가니, 사람들은 정말 많았고, 좋은 자리는 이미 다 선점되어 있는데, 축구 동료들이 내 자리를 만들어준 덕분에 그들 옆에 테이블을 얻을 수 있었다. 2년 전에 떠나곤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는데, 반갑게 맞아준 그들이 고마웠다. 사실 난 찝찝한 부분이 없지 않았는데, 반년전에 장학금 신청한다고 증명서 떼 줄 수 있겠냐고 주장에게 물어봤는데, 내 연락에 제대로 답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와 무관하게 모든 이들은 나를 정말 반겨줬다. 독일어 하는 게 완전히 독일인 같다고 하여, ‘옛날보다 조금 나아졌지.’라고 이야기했다. 알코올이 도와준다고 말하는 게 더 재밌을 뻔했나.
소리 지르고 뛰다 보니 그렇게 두세 시간이 훅 지나갔다. 원래는 더 일찍 떠나려고 했으나, 분위기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달아올랐기에, 사실 분위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 떠난 셈이다. 즐겁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그렇게 떠나는 게 아쉽긴 했다. 난 총 4L 이상을 마신 듯한데, 떠날 때 그들과 제대로 인사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빨리 가야 했고, 취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게 기차역까지 허겁지겁, 막판엔 뛰어 기차를 탔다. 역시 슈트라우빙에서 뮌헨 가는 직행 열차가 없는 탓에 기차를 갈아타는데, 뮌헨에 도착하니 한 시가 훌쩍 넘었고, 친구 집에 도착한 건 새벽 두 시였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피곤했던 게 사실이다.
아쉬운 건 그들을 제외하곤 만날 수도 있었던 이들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뭐랄까.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이들도 있었는데 아쉽게 됐다. 높은 확률로 앞으로도 볼 일이 없겠지. 나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테니. 우리는 서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슈트라우빙을 특별하게 만든 건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이 도시가 아니라, 사람들이었다고. 사실 우리는 한편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렇게 우리끼리 한편 강제적으로 끈끈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고 함께 공감했다. 실로 이번에 다시 돌아가니 그런 생각이 든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난 뮌헨을 떠났다. 린다우로 가는 기차편은 서울의 만원 지하철이 생각날 정도로 끔찍했다. 한 시간을 그렇게 서서 가니 그동안 쌓인 여독까지 하여 컨디션이 많이 퍼졌다. 날씨도 우중충하니, 이제 이 모든 기차여행의 흥미가 사라진다. 사실 그 어느 때보다도 여정이 길기도 했고, 짐도 무거웠고 수많은 일과 이벤트가 벌어졌던 게 사실이다.
린다우에서의 연결편을 놓쳐버린 이유로, 시내 구경을 잠깐이나마 할 수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지라 꽤 추웠다. 바람막이를 챙겨오지 않은 게 또 아쉬운 순간이랄까. 날씨가 좋았다면 훨씬 아름다울 것 같은 도시였지만,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여행의 첫날 봤던 아름다웠던 보덴제의 풍경과는 매우 달랐다. 물론 운치가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감흥을 느끼기엔 나의 몸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그나저나 린다우에서 내리자마자 있었던 광장의 이름은 알프레드 노벨이었는데, 이는 이곳이 노벨상 수상자들의 모임이 1951년부터 시작해 매년 열리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광장 이름의 기원을 여기서 찾는다). 이 모임은 단순히 30-40명 정도의 노벨상 수상자들만 참가하는 게 아니라 각국의 500-600명 정도 규모의 35세 이하의 젊은 과학자들이 여러 절차를 거쳐 선택받아 참가할 수 있다. 허허. 내겐 기회도 거의 희박하지만 나이만으로 따져도 5년 남짓 남았다.
다른 보덴제 도시인 Friedrichshafen은 Zeppelin 동상은 물론이고 박물관까지 있는데, 여기서 많은 항공기가 개발되었음을 실감케 한다. 그래서 이 조그만 도시에 공항까지 있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페르디난드 폰 체펠린. 우리가 아는 비행선을 만든 인물이다. 독일의 많은 기업은 2차세계대전 때 군수공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제플린도 마찬가지. 이때문에 연합군 폭격을 피해가지 못했다. 구도심의 2/3이 파괴됐다고. 1937년 힌덴부르크 참사(불타버린 수소 여객선)과 더불어 이 산업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히틀러와 괴링 등 나치 악당 때문에 이곳의 항공산업은 몰락했다. 그나저나 벤츠의 최대 럭셔리 브랜드인 마이바흐의 이름의 기원인 마이바흐도 이 항공산업에 제플린과 함께 일했다.
그곳에서 탄 기차에선 나로선 좀처럼 겪기 힘든 멀미도 느꼈는데 그만큼 몸이 좋지 않다는 걸 실감케 했다. 지난 여정이 너무 빡세지 않았나 반성해보게 된다. 어쨌든 길고 긴 여정, 여러 기차의 연착과 트러블 끝에 난 프라이부르크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앞으로 한 시간 반 남짓이면 역에 도착이고, 물론 거기서 또 무언갈 타고 가야 하지만, 이제 나의 정겨운 집에 갈 생각에 벌써부터 안도감에 쌓인다.
이 여행을 아마도 마지막으로 난 이 49유로 여행을 하지 않을 듯하다. 뭐, 물론 하게 될 수도 있는데, 내 생각에 이런 여행은 앞으로 하지 않을 것 같다. 이는 일단 너무 빡세고, 그리고 이젠 나의 경제적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강한 확신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래도 이 여행에서 난 인생에서 기억 남을 만한 대단한 풍경을 즐겼고, 내가 오래간 사랑했던 밴드의 공연도 볼 수 있었으며, 다시금 내가 모든 것을 시작한 곳에서 성장한 나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으며, 거기서 있었던 인연들이 날 인정해준다는 사실도 느낄 수 있었다. 또, 제일 중요한 건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한 원동력과 청사진도 나름대로 그릴 수 있었다. 오랜만에 해본 긴 여정은 내게 큰 자양분이 되었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