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 대선,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이는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을 비롯한 대외정책에서의 실패, 바이든 본인의 건강상태, 이후에 나온 후보의 철저한 선거전략 실패, 제대로 된 정책을 대중들에게 전달하지 못한 이유가 컸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당선된 건 수많은 이들에게 우려를 끼쳤는데, 이는 그가 너무나도 급진적이고 위험한 몫도 있겠지만, 적어도 미국인에게는 그가 지난 대선에서 선거에 불복한 것도 모자라, 유례없는 의회 폭동의 주범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 최강대국이자 세계에서 제일 도덕적인 자유주의 국가를 표방하던 나라의 행정부 수장이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에 믿을 수 없고, 그런 이가 다시 재기해서 대통령이 된다는 건 더 믿을 수 없다. 미국인들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종교처럼 신성하게 떠받들지 않는가, 실제로 종교의 이념으로 나라를 만들기도 했고.
고백하자면 그동안 난, 아무리 연구실에서 이 주제가 많이 나와도, 무관심한 편이었고 요즘엔 미국인들이 민주당을 외면하는 것에 외려 더 공감하는 편이었다. PC주의를 비롯한 진보 사상 등에 피로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내가 바꿀 수 없는 현실에 그다지 에너지를 쏟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실용적인 생각 때문이겠다.
그렇게 미 대선의 큰 파장이 있고 같은 날 저녁, 독일 내각의 연정이 붕괴했다. 물론, 독일에서 연정이 붕괴하는 건 앞서 언급한 의회 폭동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건 아니다. 다만 그 타이밍이 기묘했달까.
높은 확률로 독일의 총리는 바뀔 것이다. 유력 후보는 메르켈이 권좌에 있을 당시, 권력에서 완전히 밀렸다가 메르켈이 떠나자 다시 기민련으로 돌아온 인물.
나의 지도교수 M은 이 일련의 사건을 ‘흥미로운 시간’을 우리가 보내고 있다고 표현한다.
이제 우리나라.
정치에 대한 언급은 군인이라는 신분을 벗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기에, 아니 한국이라는 사회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조언이 계속 생각나지만, 과연 40여년만에 벌어진 쿠데타에 대해 성토를 하는 게 정치적인 발언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점심시간이 되자, 역시나 동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본다. 한국에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이미 예상한 것처럼 그들은 꽤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통령이 야당과의 정쟁에서 코너에 몰렸고 어떤 논리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계엄을 선포했고 최악의 상황이 될뻔한 걸 국회의 빠른 조치 덕에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계엄을 독일어로는 Kriegsrecht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전쟁법 내지는 전시법이다. 뭐 계엄이 (준)전시상황에 내려지는 조치니 그 말이 더 와닿는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그동안 그래도 현 대통령이 공직에 오랜 기간 머물었고, 한 분야에서 꽤 열심히 살지 않았겠냐는 생각과 (공직자로서 삶을 버틴 것에 대한 일종의 존중이라고 해도 될까..), 모든 일을 비판하려고만 드는 수많은 사람에게 질렸는지도 모르겠다. 단편적으론, 유럽과의 과학 기술 쪽으로 협력하려는 모습,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군인들의 처우를 개선하려는 등의 모습을 생각해보게끔 했다.
다만 이 모든 게 나의 착각, 아니 그냥 무관심이었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채 상병사건과 여러 일련의 외교 참사를 생각해보면 이전에 이미 다르게 생각해야 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논란의 중심인 영부인은 그다지 언급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나는 동료들에게 이번 사건은 현 대통령의 정치적 자살행위였으며 그가 하야하거나 탄핵당하는 일밖에 없을 거라고 말했다. 적어도 우리 국민이 이 상황을 절대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달까.
나는 그들에게 아주 착잡한 심정이라 말해줬는데, 그래도 미친 한 사람이 시스템을 붕괴하려고 해도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 것 아니냐며 좋은 일이라고 교수는 이야기한다. 시스템이 잘 작동해서 막았다곤 하나, 마치 내가 느끼기엔 제3세계에서 있을 법한 일이 벌어졌기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아직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던져줄 만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국민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지도자를 품고 있다는 게.
한편, 나는 연구실에서 대만이나 일본을 한국과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다소 선을 그으며, 대한민국은 그들과 달리 피를 흘려 직접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지금의 여당 대표와 관련한 질문도 나온다, 여당 대표도 계엄을 반대하지 않았느냐며. 그래서 나는 다 같은 뿌리인데, 지금은 사이가 안 좋다고 전해주니, M은 원래 모든 정치인이 본인을 키워준 이를 짓밟고 큰다고 말해준다. 독일에서 메르켈이 헬무트 콜을 밟고 올라간 것처럼. 그래서 이야기해줬다. 지금의 대통령은 전 대통령이 키워줬는데, 전 대통령을 잡아먹었고, 아마 지금의 여당 대표는 지금의 대통령을 잡아먹고 싶어 하는 듯하다고.
계엄 상황 당시, 대통령이 언급한 것처럼 북한 위협의 실존 여부는 물론이고, 종북 세력 등에 대해도 물어 한국에선 보수들이 반대쪽들을 공격할 때, ‘공산당원’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일러줬다.
그러고선 여당에 대한 역사가 이야기하다 보니, 그들이 독재의 뿌리에 세워진 정당이라는 점을 알려주게 됐다. 동료들은 이 사실에 흥미로운 걸 넘어 놀라워했는데, 어찌 혁명을 통해 독재를 이겨낸 국민이 독재의 잔재, 아니 그 똑같은 뿌리를 지지할 수 있냐는 점이다.
여러모로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역사에서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이 단 한 번도 처절하게 응징당하지 않았던 점을 곱씹게 한다. 적어도 독일은 나치와 관련된 모든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나는 현 정부와 여당이 이 상황을 그저 뭉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 아주 의아하다. 대통령이야 이미 계엄을 했으니 제정신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지만,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은 그를 응당 내쫓는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나. 그들이 이처럼 생각하는 게 8년 전에 탄핵당한 정치세력이 완전히 붕괴할 뻔했던 기억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다만 이미 계엄을 내리고 서울 한복판에 탱크와 헬기가 지나가는 일이 벌어졌음에도, ‘탄핵만은 막아야 한다.’는 정치인들의 인식에 개탄스럽다. 절대 특정 정당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지만, 민주주의 사회는 그래서 투표를 하는 것 아닌가. 대한민국은 엄연히 법이 있는 법치주의 국가이거늘.
꽤 오랫동안 우리 정치에 실망한 상태로 포기했듯, 다시 나는 지금, 이 시각부터 또 무관심해질 듯하다. 이는 그다지 기대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겠다. 아니, 그보다는 관심을 가져도 올바른 방향의 변화로 이끄는 게 어렵거나, 어쩌면 불가능하기 때문이겠다.
장래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 건 독일도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여긴 조금 지켜보고 싶다. 이곳엔 그래도 더 희망이 있다고 믿는 걸까 아니면 내 밥벌이와 삶이 더 관련이 있어서 그런 걸까.
무엇이 됐든, 아주 흥미로운 작금의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