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온나길 Dec 21. 2021

책 <밤의 여행자들> 리뷰

부제를 꼭 써야 하는 게 아니었나봐

 -<밤의 여행자들>/윤고은/민음사

 -출간연도: 2013

 ※스포일러 주의! 소설 내용이 담긴 글이므로 소설을 아직 읽지 않은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북상하는 것.
고기압, 벚꽃, 누군가의 부음.
남하하는 것.
황사, 파업, 쓰레기. - <밤의 여행자들> 中


 재난에 난파당한 일상은 점. 점. 점. 으로 단절된다. 진해에 닥친 쓰나미처럼 눈에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요나의 일상은 재난 속에 놓여 있다.


http://aladin.kr/p/5V52


 요나는 재난 여행을 상품으로 다루는 여행사 '정글'의 직원이다. 요나는 잘 나가는 여행 프로그래머였지만 지금은 자신의 업무도 아닌 고객의 클레임 전화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상사 김에게 대놓고 성추행을 당하고, 요나가 고안한 아이템(진해의 쓰나미)은 옆 팀 동료의 이름을 달고 나온다. 더구나 어쩌면, 요나는 '옐로카드'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김에게 부당한 일을 당한 직원들이 찾아와 연대해야 한다고, 같이 맞서자고 하지만 요나는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 퇴물이나 패배자, 떨거지로 규정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요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은 아직 멀쩡하다며 안도한다. 이런 요나의 모습은 정글에서 재난 여행 상품을 구매하는 고객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요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여행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출발선을 넘은 게 아닐까, 하고. 여행은 이미 시작된 행보를 확인하는 일일 뿐. - <밤의 여행자들> 中


 '모든 여행이 이미 시작된 행보를 확인하는 일'이라면, 요나의 여행은 벌써 그 향방이 정해져 있던 걸지도 모른다. 요나는 '정글'에 속한 채 무이로 향한다. 후에 나오지만 이곳은 또 다른 정글이다.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 책 <타인의 고통> 中


 요나에게, 여행자들에게 무이는 카메라 렌즈 너머의 세계다. 요나는 여행하는 내내 카메라에 무이의 생생한 모습을 담으려 한다.


 사진 이미지도 누군가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構圖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 책 <타인의 고통> 中


 이들은 어디까지나 '여행자'로, 구도 밖의 모습에는 관심이 없다. 요나는 카메라로 인해 일어난 소동 이후, 울고 있는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 대신 한국말로 사과한다. '렌즈 너머'에 속하는 현지의 아이보다 일행들이 자신의 사과를 듣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요나가 원하는 '생생한 모습'이란 재난을 겪었던 지역 특유의 생생한 모습이다. 여행자들은 재난을 겪었던 지역으로서의 무이에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 단면을 벗어난 무이의 모습에는 무관심하다.


 한때 무이는 부족간의 전쟁과 싱크홀이라는 재난을 겪었던 섬이다. 그건 분명 끔찍한 사건이었으나 지금은 시간이 흘러 그 자취가 옅어지고 상품성이 애매해졌다. 여행자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실망한다. 여러 모로 무이는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요나는 무이를 D등급으로 평가한다.


잘 짜인 연극 무대의 뒤편을 보고만 사람처럼, 처음에 요나는 무이의 민낯을 보고 실망한다.


 그렇게 5박 6일의 재난 여행을 마무리하고 여행자들은 한국으로 떠난다. 원래라면 함께 한국으로 갔어야 하지만, 예기치 못한 실수로 요나는 다시 무이에 돌아오게 된다.


 요나는 매니저의 당부를 어기고 리조트를 벗어났다가 무이의 민낯을 맞닥뜨린다. 사진의 구도를 벗어난 무이는 요나의 기대에서 많이 어긋나 있는 모습이다.


 무이는 요나가 며칠간 머물렀던 곳과 전혀 다른 표정을 갖고 있었다. 여행 기간 동안 요나가 본 것은 몇 가지 철 지난 재난으로 황폐해진, "원 달러."가 유행하긴 하지만 그래도 소박하고 촌스러운 시골이었다. 자신의 평가에 따라 이 섬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면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다시 걷게 된 무이는 마치 개장 전의 테마파크 같은 느낌이었다. - <밤의 여행자들> 中


 본의 아니게 무대 뒤편을 봐버린 요나에게 매니저는 '재난 시나리오'에 참여해달라고 제안한다. 매니저의 제안은 차마 거절하기 힘든 매혹적인 것이었다.


 누군가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밀어서 구멍에 던져 넣으라고 요구했다면 요나는 단숨에 이 일을 거절하고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이지 않다는 이유 하나로 요나는 가만히 있었고, 상황에 익숙해질수록 이 일이 미칠 영향력에 대해 둔감해졌다. - <밤의 여행자들> 中


 이들은 시체를 마네킹이라 부르고 시나리오에 엮인 사람들을 이름 대신 배역으로 칭하며 인간성을 지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대상일 뿐이다.


Error!


 잘하면 그렇게 거리를 유지한 채, 그저 대본 속의 일로 끝났을 수도 있었을 테다. 그러나 요나는 럭을 통해 무이와 연결되며 여행자로서는 볼 수 없었던 무이의 입체적인 모습을, 무이가 마주한 진짜 재난을 목격한다.


 이제야 요나는 제대로 된 무이의 지도를 그릴 수 있었다. 요나가 5박 6일간 본 무이는 일부에 불과했다. 진짜 무이는 그 5박 6일에 서너 배의 그림자를 더 붙인 것이었다. 카메라 속에는 그 모든 것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5박 6일 동안 찍힌 것과 그 이후에 찍힌 것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금이 있었다. 그러나 진짜 재난은 두 세계 어디에도 찍혀 있지 않았다. 무이의 재난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있었다. 그것도 사진 따위로는 찍을 수 없는 형태로 존재했다. 그런 종류의 재난에 대해서 요나는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밤의 여행자들> 中


 이전까지 요나는 회사 '정글'의 한 자리로서만 존재했다. 요나에게는 정글 외에 친구도 가족도 없었다. 럭은 소속 없이 부유하던 요나에게 찾아온 행운(luck)이자 무이를 외면할 수 없게 하는 존재다. 럭이라는 입체적인 인물이 있는 한 무이는 평면의 세계, 하나의 대상으로 남을 수 없다.


교살자무화과나무. <밤의 여행자들>에서 한밤중에 이 나무 앞에 서면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이 보인다고 한다.


 '파울'과 선박회사 '폴'. 요나는 한국에서도 무이에서도 그것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보이지 않는 룰에 따라 쫓기듯 움직여야 했다. 폴=파울은 그 실체가 없으나 모두의 위에 절대자로 군림한다. 어쩌면 폴=파울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유령 같은 것에 불과하더라도 '퇴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어진 역할을 다해야만 한다.


 상사 김 또한 '파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또한 살아남기 위해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고군분투해야 한다. 김 팀장은 부하를 희생시키거나 부하들의 성과에 기생해 '정글'에서 살아남아왔다. 후반부에 김 팀장은 퇴사했다고만 언급된다. 재난과는 무관해보였고 누군가에게는 재난이기까지 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도 '정글'에서 낙오해 퇴출당한 게 아닐까 싶다.


 우리는 무이라는 가상의 이국적인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지켜보며 이 재난을 먼 곳의 일처럼 관조한다.


 그렇게 자칫 남의 일로만 머무를 뻔했던 재난은, 요나가 악어 75로 전락하며 바로 코앞에 생생하게 닥쳐온다.



 순식간에 상황이 뒤집히며 요나는 이름이 사라지고 악어 75, 하나의 객체가 된다. 악어에게는 대사가 없다. 즉, 악어는 누구에게도 불합리함을 토로할 수 없다.


 쓰나미에 휩쓸려 진해에서 무이까지 떠내려온 잡동사니들처럼, 이전까지 타인의 일에 불과했던 재난은 무이에서 요나를 덮쳐온다. 관조자였던 요나는 재난의 당사자가 된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태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마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가 쓴 것으로 추정


 이 장면에서 이 시가 떠올랐다. 요나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요나를 도울 수 있는 이들은 애초부터 없었거나 이미 사라졌다. 요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시나리오는 가속도가 붙어 멈출 수 없다.


계획을 지휘하던 사람에게도, 그 계획의 일부였던 사람에게도 재난은 공평하게 찾아온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밤처럼 재난은 조용히 다가와 무이를 집어삼킨다. 시나리오의 전말을 아는 요나와 작가, 매니저를 비롯해 대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재난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아침 8시, 예정된 시간이 되자 해는 지난밤을 비추듯 지평선 위로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사막과 도로, 리조트와 해변 위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공평했다. 부족의 구분도 계급의 구분도 지역의 구분도 없었다. 모두가 뒤엉켜 있었고 눈을 감은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 <밤의 여행자들> 中


 인재와 결합한 재해는 그 규모가 커져 이슈가 된다. 요나가 짰던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무이에는 새로운 재난 여행 상품이 생긴다. 무이는 다시 여행객들로 북적거린다.


 사람들은 모두 재난 같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고, 타인의 재난을 '여행'하듯 가볍게 소비한다. 요나의 죽음도 럭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소비된다.


맹그로브 숲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간다. 교살자무화과나무와 대조적으로 맹그로브 숲은 '생명'과 '공존'을 연상시킨다.


 시나리오에서 '악어'로 몰살당할 예정이었던 '악어 주의 구역'의 사람들은 맹그로브 숲에 들어가 살아남는다. 무이는 초토화되긴 하지만 요나의 최소한이자 최선이었던 선택으로 인해 다시 생명을 이어나간다.


 이 책에서 교살자무화과나무와 맹그로브 숲의 모습은 대조적으로 보인다.


 교살자무화과나무는 새들이 씨앗을 퍼뜨리면 나뭇가지에서 시작해 기존 나무의 주위를 커튼처럼 휘감으며 자라는 기생식물이다. 숙주 나무를 휘감아 오랜 기간 양분을 빨아먹고 성장하며, 결국 기존의 나무는 죽고 이 나무만 살아남는다고 해서 '교살자'라는 이름이 붙었다.


 반면 맹그로브 숲은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맹그로브 숲의 나무들은 물 아래로 10미터 이상 뿌리를 내려 토양의 유실을 막는다. 맹그로브 숲은 생명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51642&docId=2441934&categoryId=51645


 우리는 세상을 '정글'이라고 여기며 낙오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둥댄다. '파울'은 정체를 알 수 없고 실체도 없지만 사람들의 머리 위에 도사린 채 보이지 않는 룰에 쫓기게 만든다.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음증적인 향락(그리고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럴싸한 만족감)을 보건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 책 <타인의 고통> 中


 교살자무화과나무가 '정글'을 떠오르게 한다면 맹그로브 숲은 '생명'과 '공존'을 연상시킨다.


 재난에 난파당한 사람들의 삶은 점. 점. 점. 으로 단절된다. 일상을 단절시키는 재난은 자연재해 같은 가시적인 재난과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재난을 모두 포함한다.


 만약 우리가 각자도생하기보다 함께 군락을 이룬다면 어떨까? 요나가 그랬듯 최소한의 온정을 내미는 것만으로 서로의 삶이 재난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붙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맹그로브 숲처럼, 모든 생명은 잇닿아 있으므로.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 책 <아몬드> 中




사진출처:

https://pixabay.com/images/id-1239384/

https://pixabay.com/images/id-660078/

https://pixabay.com/images/id-304093/

스트랭글러 무화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https://pixabay.com/images/id-4340503/

https://pixabay.com/images/id-791516/

https://pixabay.com/images/id-172428/



인용:

책 <타인의 고통>

http://aladin.kr/p/sF8CG


책 <아몬드>

http://aladin.kr/p/DoGiA


매거진의 이전글 책 <사랑받을 권리>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