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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온나길 Feb 02. 2024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를 읽다가



 '내가 틀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리도 큰 것이라, 언제고 내 생각을 드러낸다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었다.


 내 노력여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게도 내 경험과 시야는 한정적이고, 뒤늦게서야 내가 볼 수 없던 것들이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아, 내 시야가 더 넓어졌네! 모르던 걸 알게 됐어! 완전 좋은걸?'하고 기뻐하기보다 수치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낀다.


 그래서 명확히 내 언어로 무언가를 규정짓는다는 게 무서웠다.


 더 솔직히 말해, 그런 멍청한 나를 다른 사람들이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너무 무서웠다고 해야겠지.


 내가 기억하는 것만도 아주 오래, 나는 말하기가 그렇게 꺼려졌다.


 다른 사람들이 '실제의 나'보다 나를 아주 좋게 봐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는 착하고 다정하고 똑똑하며 속이 깊은,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 모습이 되고 싶어 그 이미지에 어떻게든 날 구겨넣어보려고 애써왔다.


 무수한 노력 끝에 따라오는 건 늘 자괴감과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거구나'하는 현실자각이었다. 그걸 느껴야 할 때면 나는 도저히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곱씹는 건 안전하다. 그 누구도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까. 그러나 한편으론 내 기억에서도 어느 순간 잊혀지기 쉬운 것이라, 나는 종종 내가 무엇을 어떻게 느꼈는지 잊곤 한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게 되고 볼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내 해석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 사람(작가)은 그 사실을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구나.


 지금 내 해석이 이후에는 부분적으로만 남더라도, 상당 부분이 '틀렸다'고 여겨지더라도 그걸로 된거구나.


 지금의 내 이해와 해석이 잘못 됐을까봐 걱정하기보다, 미숙하더라도 내 생각을 짚고 적어둔다면 그건 그 누구도 아닌 내게 도움이 되겠구나.


 그렇다고 오래 묵은 두려움을 떨쳐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 여전히 내 생각을 표현하고 남긴다는 건 어려운 과제다.


 어설프나마 언어로 빚어두지 않고 형체가 불분명한 상태로 그냥 둥둥 떠다니게 두는 편이 훨씬 익숙한 탓도 있다.


 내 한계를 인정하고, 내가 어디까지나 미숙한 사람이란 걸 받아들이자.


 지금의 내 생각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냥 그걸로 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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