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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심의 가면을 쓴 이기심

진짜 이기적인 것은 남을 위한 희생이라는 마인드

[아침 8시에 시작하는 엄마의 모습]


아침 8시가 넘어 겨우 눈을 뜬다. 초 1이 된 딸은 혼자서 시리얼을 다 먹고 옷을 혼자 갈아입었다.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현관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 잘 갔다 와” 딸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인사한다. 내 몸은 아직 이불 속이다. 9시에는 둘째 유치원 차량이 1분도 기다리지 않고 출발한다. 서둘러야 한다. 이미 일어난 지 한 시간은 된 아들에게 짜증을 내며 급하게 옷을 입힌다. 시간이 촉박하니 마음의 여유 따윈 없다. 아들 손을 붙잡고 내달린다. ‘아! 자유다!!’ 둘째까지 보내고 나면 집안의 고요가 찾아온다. 여기서 잠깐, 남편은?! 첫째가 학교에 가기 전 출근하고 없다. 나는 오늘 아침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위의 상황은 전날 저녁 육퇴의 기쁨을 누리다 늦은 밤에야 겨우 잠든 한 여자의 아침이다. 그 여자는 2년 전의 ‘나’이다. 물론 첫째를 혼자 학교에 보낸 날은 저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딸은 한 번씩 나를 놀린다. “엄마는 그때 일어나지도 않고! 나 혼자 옷 입고 학교에 갔잖아.” 이럴 때는 빠르게 사과하는 게 답이다. 평소에는 저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들이 먼저 일어나는 것은 동일했지만 이불속에서 남편의 출근을 본다는 정도가 다르다. 시끄러운 소리에 겨우 눈을 뜬 나에게 착한 남편은 뽀뽀를 해주고 출근을 했다. 그제야 뒤늦게 일어나서 두 아이를 챙기고 집을 슬슬 정돈한다. 적당히 바쁜 아침을 보내고 나만의 시간이 찾아온다.          


  남편이 이불속에서 눈만 뜨고 있는 나에게 뽀뽀를 해 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남편 출근 전에 일어나면 집안의 어지러운 모습을 핑계로 이것저것 트집을 잡았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이 자주 했던 말 중 하나. “아침에 꼭 그래야겠니”. 그때는 남편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그럼 당신이 잘하면 될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니 그 짜증은 환경 탓이 아니었다. 내 컨디션의 문제였다. 당시의 나는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난 적이 거의 없다. 매일 아침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겨우 눈을 떴고 늘 피곤했다. 아침시간은 내게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할 일은 왜 그리 많은지... 눈 뜨자마자 아이들을 챙기고 집을 돌보며 짜증이 가득했다. 그러니 남편은 입 다물고 이불속에서 눈만 뜨고 있는 아내가 더 예뻐 보였으리라. 잘 때가 제일 예쁜 것은, 비단 아이들 얘기만이 아니었나 보다.     



[희생이라는 착각]     

 사랑하는 아이들을 챙기고 우리 가족이 지내는 따듯한 보금자리를 매만지는 일은 짜증 날 일이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중요한 일이고 소중한 일과였다. 반대로 살아온 내 8년의 세월... 내 기분은 내가 책임져야 하니 그렇다 치고. 내 짜증을 아침마다 보고 들은 가족들에게는 미안해서 어쩌나. 글을 쓰고 있으니 가슴속에서 미안함이 울컥 치민다.       


 결혼을 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갑자기 헌신적인 사람이 되었다. 남편을 위해 살고 아이들을 위해 산다. 나를 위해 산 적은? 잘 모르겠다. 나를 위한다는 게 뭔지도 잘 모른 채 결혼 8년의 세월이 자나 갔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했는데 왜 한 여자는 남편을 위해 헌신하며 살까? (아닌 사람도 많다. 내 경우에는 그랬다) 남편이 내 헌신을 원한 적 없고 나에게 그렇게 살도록 강요한 사람은 없다. 아이가 태어나고는 아이를 위해 헌신하며 희생하며 산다고 착각했다. 그것은 헌신과 희생이 아니라 내가 낳은 아이에 대한 책임이고 의무이다. 부부가 선택한 일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높이기 위해 ‘어머니의 희생’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제 안다. 나를 희생하며 아이들을 돌볼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나’를 돌봐야 한다는 것을. ‘희생’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희생할 일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모두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서두에 이야기했던 아침의 모습은 ‘희생’의 마인드로 인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가족들을 위해 일했다고 착각한 나를 위한 ‘보상’이 필요했다. 큰 보상은 바라지도 않고(바랄 수도 없고) 육퇴 후 나 혼자만의 시간이면 되었다. 보상이 주어졌으면 불만도 사라져야 하는데 결코 그렇지 못했다. 도돌이표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는 원인을 안다. 희생에 대한 보상은 이 세상에 없다.      



[희생 (犧牲)]
1.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 또는 그것을 빼앗김
2. 사고나 자연재해 따위로 애석하게 목숨을 잃음.
3. 천지신명 따위에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 주로 소, 양, 돼지 따위를 바친다.



 희생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알게 된다. ‘희생’은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라 내가 당하는 일이다. 똑같은 일을 해도 내가 주체가 되어할 때와 내가 희생되는 것은 다르다. 결혼 8년 차의 나의 모습과 결혼 10년 차의 지금 나의 모습은 ‘천지차이’다. 지금 나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살지 않는다. 나를 돕는 일을 알고 나를 위해 산다. 이전과 동일한 것은 아이들을 돌보고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를 매만지는 일이다. 동일한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지만 이제는 이 일이 내게는 기쁨이고 감사이고 즐거움이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가 주체가 되어해 보자. 끌려가듯이 억지로 겨우겨우 미루고 미루지 말고. 전투적으로 앞치마를 매고, 팔을 걷어붙이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시작’하는 거다! 시켜서 하는 일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학창 시절 ‘자율학습’이라는 이름과 전혀 맞지 않게 강제적으로 시행되던 그 ‘자율학습’,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고 그 시간을 즐기며 공부했던 학생들과 억지로 몸만 앉아 있었던 학생들의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듯이. 우리 삶에 주인을 다시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누구를 위해 희생한다는 마인드. 이것이야말로 이타심의 가면을 쓴 이기심이 아닐까? 진정으로 남을 위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나’를 위해 살자. 아이러니하게도 이기적으로 살기 시작하면서 가장 평온한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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