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감각 없는 사람이 지닌 현실감이란.
현실감은 확실히 감정보다는 감각 쪽에 가까운 것 같다.
생존에 위협을 느껴서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사슴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현실감이 부재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의문을 품을 필요가 있었다.
내게 현실과 반대되는 것을 꼽으라고 하면 이상이 되겠다.
MBTI에서 S와 N으로 나뉘는 지표가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에 따라 구분해 보면 나는 N에 가까운 사람으로서 이상을 넘어 공상 속에서도 살아가는 사람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등 사회 경험이 많지 않아서, 부모님의 안전한 보호 아래 지내며
돈, 금전, 경제적인 이슈와 관련이 깊은 현실감이 발달할 기회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나는 그런 생존 본능을 거부하려고 본능적으로 발버둥 치는 사람 같기도 하다.
현실감이란 게 차갑고, 물질주의적이고, 회색빛깔로 가득하며 공격적인 무언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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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게 현실감각이 생기고 있는 걸 깨닫는다.
현실감이 공상, 이상과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현실감을 느낄 일이 잘 없는 내게 찾아오는 현실감각이란,
평범하고 별 볼일 없는 현실도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감각이다.
하고 싶은 것과 꿈과 같이 여겨지는 것들이 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들은 반드시 이뤄야 하고 따라야 하는 지표가 아니었다.
어떠한 당위성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나는 꿈을 방향키로 삼고 일상을 보내곤 했지만, 실제로 꿈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아닌지는
내 삶이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인가를 매기는 채점기준과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삶은 엉망진창인 채로 아름답기도 하다.
꿈은 꿈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간직하게 함으로써 가치가 있다.
꿈을 성취한 그 순간에만 삶에 의미가 부여된다면 삶은 단발적으로만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삶을 단발적인 것으로 인지하면서 살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르고 있고, 누구나 그 흐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단발적인 순간에 영광과 함께 그 후의 삶에 어떤 영예가 주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성취감과 마찬가지로, 그런 영광이나 영예를 목표로 살지 않는다.
어느 비싼 초밥집에서 식사를 할 때에만 삶이 존재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고,
매일 다양한 음식을 맛보며 지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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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꿈을 향한 진로는 실제로 한 걸음씩 떼 보면서 현실에 랜딩한다.
나는 내가 인정 욕구가 높다는 게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어떤 성취를 해냈을 때 누군가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 관점이 틀렸다고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더 받아들이기 수월하게 풀어내자면
일정 수준 이상 성취를 해내지 못했을 때, 만족을 하지 못한다는 표현이 더 와닿는다.
나는 그래서 주로 불만족에서 비롯된 증상들에 시달리는 편에 해당한다.
아마,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그렇게 될 것 같다.
맞지 않는 옷을 입기 위해 하는 게 노력이라면 그걸 포기하는 게 맞을 텐데,
나는 꼭 그 옷을 입어야만 만족이 되는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맞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 옷을 입지 못하는 것은 내게 꿈을 무너뜨리라는 것과 같이 들리는데
나는 돌아 돌아 꿈이라는 산을 오를 것인가, 아니면 서 있는 자리에서 안분지족 하며 피크닉을 할 것인가.
멋있는 걸로 따지면, 내게 만족감을 주는 걸로 따지면 산을 오르는 게 답이 되지만
모든 사람이 산꼭대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등산을 하는 것은 아니다.
피크닉을 하는 것만으로도 멋짐을 완성하는 무수히 많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발견하는 것을 현실감이라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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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감을 잘 느끼기 위해선, 꿈이나 공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어렸을 적의 나를 돌아보면 장래희망이 여럿 있었다.
시간이 변화함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었고, 그것들을 모두 오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그때에 그런 꿈을 꿨기에 지금 이런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지 않은가.
꿈은 방향키가 되어준다.
어디쯤에선가 나는 닻을 내리고 그물망을 던질 것이다.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서 그날 잡은 물고기들을 헤아릴 것이다.
나는 어쩌면 집에서 물고기를 맛있게 해먹을 수도 있고
어느 날에는 내 물고기를 자랑하고 싶은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이 거기서 끝나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나는 다시 바다로 나가서 키를 잡을 것이다.
하지만 삶이 거기서 끝나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렇게 삶이 굴러갈 것이다.
지금 어떤 방향키에 시선을 두고 있는지를 아는 것만큼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한 아주 유용한 지표가 되어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꿈이 훌륭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조금 식상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내가 쓰는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글을 쓰는 것을 멈춘다면
언제 다시 이만큼 바다에 나와볼 수 있겠나?
그런 마음에 글을 발행하기를 선택하는 것도 현실감과 친해지는 과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